2009년 5월 9일 토요일

Bauhaus

자료: 다음백과(브르태니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8b3093a


정식 이름은 Staatliches Bauhaus. 독일의 디자인 학교.

1919~23년 사이에 존속했는데, 1925년까지는 바이마르에 본거지를 두었다가 1932년에는 데사우로 옮겼고 베를린에서 문을 닫았다. 그란드 듀칼 색슨 예술 아카데미와 그란드 듀칼 색슨 공예학교를 합병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세워 바우하우스('건축의 집')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가옥 건물'이라는 뜻의 독일어 '하우스바우'를 거꾸로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바우하우스에서는 그로피우스가 예술의 모태인 건축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았던 여러 가지 수공예를 가르쳤다.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숙달된 기능을 동시에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이 2가지의 분리를 막으려고 시도했다.
그 이전 19세기 중반에는 윌리엄 모리스(1834~96)가 이끈 개혁가들이 목적에 부합되는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는 우수한 수공예품을 강조함으로써 그와 같은 분야에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했다. 1890년대에는 이러한 노력들이 미술공예운동으로 이어졌다. 미래에 대한 안목을 가진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파들은 일상 생활의 모든 측면을 고려한 훌륭한 디자인에 정성을 쏟았으며 개인적으로 창안한 사치품에 역점을 두지는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이러한 노력이 20세기에 들어와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기계적 생산이 디자인의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 학교의 방침을 대량생산 쪽으로 끌고갔다. 이러한 그로피우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이후의 현대 디자이너들은 부유층을 위한 개별 작품보다는 전체 사회를 위하여 쓸모있는 작품과 미적 즐거움을 주는 물품을 생산한다는 차원에 노력을 기울였다(→ 대량생산).
바우하우스에 다니는 학생들은 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요하네스 이텐과 조지프 앨버스, 라슬로 모호이 노디가 가르치는 6개월 과정의 예비학습을 받아야 했다. 목공·금속공·도예·스테인드글라스·벽화·직조·그래픽·인쇄·무대연출을 다루는 실습장에서는 대체로 이론을 강조하는 예술가(조형교수라고 불렀음)와 기능인 두 사람이 맡아 가르쳤다. 3년에 걸친 실습교육 후 학생들은 전문직공 자격증을 받았다.
바우하우스의 교수 가운데에는 파울 클레(스테인드글라스·회화 담당), 바실리 칸딘스키(벽화 담당), 리오넬 파이닝거(그래픽 담당), 오스카 슐레머(무대연출 담당), 마르셀 브로이어(실내장식 담당), 헤르베르트 바이어(인쇄·광고 담당), 게르하르트 마르크스(도예 담당), 게오르크 무헤(직조 담당) 등 20세기의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이 있었다. 만들어진 작품들은 아주 다양했지만, 입면체와 직4각형, 원형에 기초를 둔 특수한 스타일이 바우하우스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바우하우스의 구성원들은 1919년부터 건축에 관여했다(특히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의 행정과 교육·주거 단지). 그러나 이 특수한 학교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계획에 중심을 이룬 건축부는 1927년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다. 건축부 학과장으로는 스위스의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가 지명되었다. 그 이듬해 그로피우스가 사임하자 마이어가 1930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다. 마이어는 정치적으로 극좌파로, 데사우 당국과 다투었기 때문에 사임하게 되었다. 그후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1933년 나치군이 학교를 폐쇄하기 전까지 새로운 교장으로 있었다... (중략.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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