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http://blog.aladdin.co.kr/n69/1379693
(중략)
버크의 저술은 외부의 대상을 지각하는, 감정과 감각기관에 대한 심리적 분석에 의존하여 아름다움과 숭고란 관념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다. 영국 경험론 전통의 ‘고전적인’ 명쾌함과 재치가 담긴 저작이다. 기계적 인과관계로 환원시키는 思惟의 테크닉이 주는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1. 버크의 기본논리.
일반적으로 버크의 책이 이론사적인 맥락에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이유는, 그가 아주 명석하게 ‘숭고’와 ‘아름다움(美)’의 조건(기원)을 각각 다른 영역에 배치시켰다는 점에 있다. 항상 뒤섞인 현상처럼 보이기에 단지 양적인 차이처럼 파악된 미학 상의 문제가 실은 다른 기원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숭고란 개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 그의 공으로 평가된다.
버크의 저작에서 핵심적인 논의들은 ‘고통과 즐거움’이란 감정현상에 대한 그의 명료한 이해로부터 연유한다. “고통이나 즐거움 모두 나름의 고유한 내용이 있는 독립적인 감정이다.”(77쪽)란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 그의 아름다움과 숭고에 대한 논의의 출발이 된다.
고통과 즐거움은, 고통은 즐거움의 결핍이며 즐거움은 고통의 부재이다,란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즐거움의 결핍은 아주 일반적인 경우 평온함으로 돌아감을 의미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꽃냄새를 맡고 기분이 좋아졌다가 그 냄새가 사라졌다고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물론 즐거움의 부재가 고통과 유사해질 때가 있다.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선사하던 연인이 갑자기 떠나버리거나, 죽었을 때, 갑작스런 그 ‘즐거움’의 중단은 강한 실망이나 슬픔으로 나타나고 이건 고통스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치통이나 고문 따위가 주는 절대적인 고통과는 다른 내용을 갖는다. 실질적인 어떤 고통 앞에서 우리는 단지 벗어나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상실의 괴로움에 빠져있는 연인은 그 슬픔에 기꺼이 머물고, 그것이 커지도록 내버려 둔다. 즐거웠던 각각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거기 머물고, 그 전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완벽한 즐거움을 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환기하며 그 슬픔을 감미롭게 견디는 것이다. 즐거움의 부재에 대한 태도는 실질적인 고통에 대한 반응과는 다른 문제다.
마찬가지로 고통의 부재에서 느끼게 되는 기쁨은, 평온한 마음상태에서 어떤 것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즐거움과 같지 않다. 즐거운 어떤 것에 접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부드럽고 관능적인 만족과, 절박한 위험이나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때의 우리 마음이 지니게 되는 절제된 감정, 일종의 경외감, 두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평온한 느낌은 다른 내용이다.
이상과 같은 추론에서 快의 느낌을 주는 미적 현상의 정서적 두 근원이 구분된다. 긍정적인 즐거움으로서의 Pleasure와 고통의 사라짐에 의한 기쁨으로서의 Delight. 그 각각에서 전자가 바로 아름다움을 느낄 때의 감정 상태(혹은 관념)이며, 후자는 숭고함을 느낄 때의 상태(혹은 관념)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는 것은 만족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며, 반대로 숭고의 원천은 고통과 위험을 주는 대상이다. 또한 목적론적으로 보면 즐거움(pleasure)은 사회적 결집을 위해 준비된 감정이고, Delight(안도감)은 자기보존을 위해 준비된 감정인 것이다.
이어 버크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느낌을 주는 주관의 상태와 대상의 특질을 분석한다. 숭고의 대상은 주관에 경악(astonishment), 경탄과 숭배, 존경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들의 잔상이 Delight다. 이를 유발하는 대상의 속성은 공포, 불분명, 힘, 결핍, 광대함, 무한함, 어려움, 웅장함, 갑작스러움, 간헐적인 지속 등이다. 반대로 아름다움의 대상은 순수한 즐거움을 유발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대상의 속성은 작음, 부드러움, 점진적인 변화, 가냘픔 등이다.
2. 평가
버크의 작업은 감정의 근본적 원리에 대한 탐구이다. 서양철학사에서 혼돈스럽고 모호한 것으로 재판받고 배제된 감각·감정·감성의 영역에 대한 복권인 셈이다. 하기야 철학의 변방으로서의 ‘미학’이 떠맡은 일이 그것을 생존시키는 것이었고 보면, 이건 별반 특이한 일이 아니다. 투명한 이성의 영역에 대해서, 신비처럼 존재하고 있는 예술의 문제에 접근한다고 했을 때, 누구도 편리하게 인간의 감성의 영역을 불합리로 기각해 버릴 순 없기 때문이다.
미학에 관한 이 저작이 지닌 특징은 그것이 일종의 ‘감정의 인식론’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버크가 기원을 탐색해 나가는 방식이란 대상(자연)과 그것을 느끼는 주관이란 두 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문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마치 인식론 혹은 생리학에 관련된 저작처럼 읽힌다.
매우 복합적인 요인들로 구성되어 있을 ‘대상’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문화적 습득·습관 그리고 지성까지 결부되어 있을 복잡한 ‘주관의’ 문화적 취향(taste)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즉, '대상(자연)'과 그에 반응하는 '의식']로 분해시킨 후, 고찰하는 것은 분명 효과적인 전략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전략을 택하면서 그가 끌고 들어가는 가정이다. ‘자연으로서의 대상’과 주관이 거기서 반응할 수 있는 최초의 ‘느낌’에 관한 심리적 인과관계 분석으로 문제를 환원시킴은 자연과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예술을 동일지반에 놓는다. 이에 대해 좀 오버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져 볼 순 있을 것이다 : 똥을 쌀 뻔한 공포에서 벗어났을 때의 안도감(delight)과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본 후 느끼게 될 안도감(delight)이 동일한 기원이라면, 단순한 생리현상과 문화적 반응은 단지 양적인 차이만을 갖는 것인가?
일례로, 버크의 방식에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하지만 사람이나 동물 속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은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아무런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이 불러일으키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욕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144쪽) 그는 이어서 다음처럼 근거를 달아놓았다 : “물론 때로는 욕구가 아름다움이나 사랑과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것은 보통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수반되는 저 폭풍우같이 맹렬한 감정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신체적 흥분상태를 가리키지 아름다움 그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리키지는 않는다.”(144쪽)
그런데 분명 버크는 즐거움과 고통에 대한 기본적인 감정상 반응(그것은 욕망 혹은 욕구들이 아닌가!)을 통해 논의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다르다”고 하지만, 버크의 논리체계에서 ‘사랑이라는 감정’과 ‘욕구’는 분리되기 힘든 것이다.
그런 점은 칸트가 해결해야 할 문제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나 훌륭한 통찰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재치있는 생리학 혹은 감정의 인식론과 더불어, 어떤 예술이 감상자에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근거들을 명쾌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제5부(225~242쪽)에서 그가 문학작품이 지닌 힘에 관해 분석하고 있는 부분은 그의 ‘천재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거기서 그는 언어예술이 명확한 표상의 제시란 차원에서 회화보다 전달력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더 큰 감동을 유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의 대답은 언어가 어떤 의미나 대상에 관한 한갓 표상(모방)이 아니라, ‘사물자체(혹은 감정자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궁금한 분은 읽어보시길. 아주 탁월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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