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4일 화요일

윤동주 시의 은유세계

자료: 
http://dragon.yonsei.ac.kr/~kim212/spboard/board.cgi?id=jaryo&action=download&gul=31


지은이: 김 명복(연세대)

※ 자료를 공개해 주신 지은이께 감사한다. 텍스트 내에 일부 표기를 삽입하며 공부하며 읽는다. 원본을 보실 분을 위 링크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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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분석하며 비평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 그 의미를 분명하게 사용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는 세 가지 개념이 있다. 이미지, 은유 그리고 상징이 그들이다. 이미지(image)는 “마음에 그려지는 하나의 그림”(a mental picture)이다. 직역하면 심상이다. 이미지는 보편성을 띤 하나의 인상을 뜻한다. 그러나 그 인상은 산문으로 풀어서 의미가 전달될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엘리아데가 지적하고 있듯이, “개념에 저항하는 모든 것을 지시해주는 것이 이미지의 힘이자 사명이다.” 개념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지를 사용하여 전달할 필요가 없다. 이미지는 지시하는 하나의 기표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개념으로 파악하여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지의 사전상의 정의인 “마음속에 있는 그림”이 말해주듯, 이미지는 눈과 관련한 시각화의 표현 방식이다. 
  • 예술작품에서 이미지는 예술매체를 통하여 시각화된 형상(figure)이고, 
  • 문학작품에서 이미지는 언어를 통한 시각화된 형상이다. 
  • 우리가 이미지를 통하여 문학작품을 인식할 경우, 그 인식이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은 이미지가 단순히 그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형상(figure)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질베르 뒤랑은 서구에서의 상상(imaginaire)의 계보를 연구하며 이미지가 기독교의 문화에서 억압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 동로마 제국 황제의 성화의 형상 파괴(730-780 그리고 813-43), 
  •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소개되며 스콜라철학자들에 의한 성상파괴, 
  • 17세기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의 성상파괴, 
  • 18세기 흄과 뉴턴의 경험주의에 의한 성상파괴, 그리고 
  • 19세기 콩트의 실증주의의 성상파괴가 이미지를 억압한 역사의 계보이다. 
이와 같이 이미지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 억압되어왔다. 물론 종교개혁이후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 케톨릭의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하여 이미지가 장려되어 바로크 문화를 꽃피웠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상 이미지의 파괴는 예술 쪽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문학작품에서는 그 반작용으로 많은 이미지들을 산출하였다. 어찌 보면 문학을 통한 이미지 산출의 증대는 예술 편에서의 성상 이미지 파괴에 대한 인간욕구 분출의 안전판 역할을 한 것일 수 있다. 

   뒤랑에게 있어서 “이미지는, 표명 가능한 기표가 흐릿한 기의를 지시하는 간접사고의 유형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상징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다.” 
  • 이미지와 상징은 모두 간접사고의 유형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 그러나 이미지는 상징(symbol)과 달리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매체일 뿐이다. 이미지는 단순히 기표일 뿐이다. 
  • 이미지가 기표에서 의미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때 상징이 된다. 
흥미롭게도 독일어의 상징의 뜻을 지닌 sinnbild는 sinn(의미)와 bild(질료 또는 이미지의 형상)를 결합한 단어이다. 상징이란 기의와 기표가 결합한 기호이고, 이미지는 단순히 기표일 뿐이다.      

   이미지는 보편성에 근거한 종합의 특성을 지닌 의미를 지녔다. 이미지는 기의와 기표가 양립하는 기호학의 분야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가 텍스트를 감상한 후에 그려지는 인상이다. 그러나 은유(metaphor)는 이미지와 달리 수사학의 분야에 속한 것으로, 인상이 아니라 의미를 요구하는 비유의 기법이다. 이미지의 특징 중에 하나인 보편성과는 달리 은유는 개인성에 근거한 특수성의 의미를 가진다. 
  • 은유는 하나의 기호(sign)와 같아서 은유의 문자상의 의미는 그 자체가 기표(signifier)가 되고, 그 기표에 해당되는 기의(signified)는 그 기표 속에 항상 잠재해 있다. 
  • 리차즈(I. A. Richards)는 이 기표와 기의의 의미를 매체(vehicle)와 의미(tenor)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표가 전혀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은유에서 기표란 단지 상징차원에서의 기표이다. 즉, 기표는 일차의미이고, 기의는 이차의미이다. 
   수사학의 전통에 따라 은유는 그 의미가 지니는 특수성이 하나의 고유한 개인의 의미와 관련이 있고, 상징은 집단성과 반복성의 성질을 지닌 까닭에 단수의 의미를 지니는 은유와는 달리 그 의미가 복수의 성격을 지닌다고 이해되어 왔다. 상징이 복수의 의미를 지닌다는 의미는 상징이 은유처럼 개인에 의하여 처음부터 그 의미가 형성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은유가 개인에 의하여 창조되어, 그 은유가 개인의 특수성을 잃고 집단이 공유하는 특질을 가질 때 은유는 상징이 된다. 필립 휠라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은유는 항상 그 의미가 고정되면 상징으로 변한다. 은유는 그 의미가 “고정되어 반복되는 경우” 하나의 상징이 된다. 은유의 기표가 기의를 부여받지 못하고 표류하며 계속 반복되다가 하나의 기의를 받으면 상징이 된다. 

   질베르 뒤랑은 상징의 반복성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되풀이되어 나타나면서 하나의 형태 속에 가장 모순적인 특질을 통합하기까지 하는 기표의 제국주의는, 스스로를 표명하기 위해 꾸준히 <현현>(epiphany) 행위를 반복하면서 모든 감각적인 세계까지 넘쳐흐르는 기의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반복이라는 공통된 영역을 갖고 있다. 상징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비적합성은 바로 이 반복의 힘에 의하여 무한히 메워질 수 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상징은 그 집단성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무의식에서 비롯된 종교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상징이란 감추어진 의미를 나타나게 만드는 하나의 재현이며, 신비의 현현이다.” 상징이 개인이 아닌 집단의 의미정형화라는 정의는 리쾨르에게 있어서 “은유는 담화의 자유로운 발명품인 반면 상징은 우주에 묶여 있는” 특성을 강조하게 했다. 그리하여 “은유는 이미 정화된 로고스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반면, 상징은 삶의 세계(bios)와 이성의 세계(logos)를 갈라놓고 있는 분리된 선에서 망설이고 있는” 기표가 된다. 이는 종교학자나 인류학자 그리고 신화비평가들이 은유 대신에 상징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다. 그들에게 상징은 성스런 세계의 요소들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언어가 된다.

   기호학의 관점에서 보면, 은유는 공의의 기의가 연기된 상징의 기표이다. 공의를 띠지 못한 기표가 은유이고, 은유가 공의의 의미를 가지는 순간 상징이 된다. 이처럼 은유는 작가의 창조성으로 선별된 고유의 개별성 의미를 지니게 되고, 상징은 작가의 고유성이나 창조성을 벗어나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보편성의 일반화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의미에서 상징은 타락한 형태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타락이란 의미는 기표가 지녔던 순수한 고유의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산문과 시를 수사학과 관련하여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산문은 그 독서방법에 있어서 수평의 사고를 가능하게 하고, 시는 수직의 사고를 강요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시에서 환유의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산문의 경우보다 덜하고, 산문에서 은유의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시의 경우보다는 덜하다. 산문은 풀어서 뜻을 전하고, 시는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열어준다. 
  • 풀어서 뜻을 전하는 뜻의 영어는 paraphrase라는 단어이다. paraphrase는 para, alongside + phrazein, to show의 희랍어에 어원을 가진다. 이 단어의 뜻인 “나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환유의 성격을 드러내 준다. 그것은 수평의 사고이다. 이런 의미에서 산문은 이해의 장에서 그 의미가 닫혀져 있는 반면, 시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그 의미를 열어준다. 
   쏘쉬르는 담론(Discourse)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선형(linearity)의 구조 속에서 외부에서 결합이 이루어지는 “문장구조의 관계”(syntagms 혹은 syntagmatic relations)이고, 다른 하나는 선형의 구조가 아니라 화자의 언어를 구성하는 의미의 내적 의미 결합체로 수직의 구조를 지니며 담론의 외부에서 형성되는 상호관련성들로 “연상구조의 관계”(paradigms 혹은 associative relations)가 그들이다. 야콥슨은 실어증에 관한 글에서 쏘쉬르가 제시한 담론의 두 가지 기능에서의 장애와 관련하여 은유와 환유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언어는 수평과 수직의 국면이 있는 데, 그들은 각각 langue와 parole이다. 전자의 장애는 선상구조(sequence)의 요소들을 결합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인접성의 무질서”를 보여주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하나의 요소를 다른 요소로 대체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유사성의 무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다. 야콥슨은 이 두 무질서와 관련하여 수사학의 두 방식인  환유(metonymy)와 은유(Metaphor)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환유는 인접성질(contiguity)에 근거하여 결합과 상호 텍스트의 특징이 있고, 은유는 유사성질(similarity)에 근거하여 선별의 능력이 요구되는 특성을 지닌다. 이와 같이 위상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환유는 수평의 측면을 그리고 은유는 수직의 국면을 가진다. 

   은유라고 하면 보통 하나의 단어나 숙어가 다른 말로 대체 가능한 수사학의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은유가 그처럼 문장의 전체성의 의미를 단절하여 미시 관점에서만 취급될 경우  시가 가지고 있는 유기성이나 전체성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사실 은유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문장의 문맥이나 시의 전체성과 유기성을 배제하고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환유와 은유의 구별이 모호한 경계를 이루며, 수사의 구별을 무력화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야콥슨의 입장에서 수평국면을 고려하면 은유는 더 이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환유의 국면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야콥슨의 입장을 좀 더 심화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단어나 숙어를 대체하는 그런 입장으로 은유나 환유를 고려하는 입장을 배제하고 문맥이나 문장을 은유나 환유로 생각하는 경우, 은유는 paraphrase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니는 수평의 국면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수직의 국면을 지닌다. 환유는 수평국면과 관련하여 대체가 가능하나, 수직국면과 관련하여 대체가 불가능하다. 독서하는 위상구조의 측면에서, 리차즈의 용어를 사용하여 매체(vehicle)는 의미(tenor)와 수평으로 나란히 독서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 환유라면, 은유란 그 독서방법에 있어 수직의 독서를 강요하는 수사라고 할 수 있다. 환유는 앞으로 나아가고, 은유는 상하로 우리의 의식을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기능을 한다.    

   기표와 기의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우화가 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 사람이 손을 들어 별자리를 가리켰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손을 쳐다보며 한 마디 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가리키는 별자리가 아니라, 그의 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주위의 사람들은 기표를 이야기하고 기의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 텍스트도 이와 같다. 독자층의 독해방식이 교육되지 않고는 기표는 기표로 머물 수밖에 없다. 비평가의 자리는 손이라는 기표가 아니라 손이 가리키는 기의를 보도록 독자를 유도하여야 한다.  

                                      *   *

   윤동주의 시들 중에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많이 애독되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시가「서시」이다. 이 시를 통하여 은유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 가를 보기로 하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지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위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 세 문장은 모두 산문의 독해방식에서 볼 수 있는 독자의 수평식 독서의 흐름을 단절시키며, 우리의 의식을 수직으로 향하도록 강요한다. 시의 의미의 모호성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이 시를 환유로 읽기를 거부한다. 첫 문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는 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는가? 그는 괴로워 할 것이 많이 있었기에, 심지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그는 죽은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그를 부끄럽게 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으로 그는 괴로워했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부끄러움의 실체를 파악하기 전에 시에 대한 일반론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시가 문학의 장르만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하여, 시는 N. 프라이가 그의 『비평의 해부』에서 문학의 장르를 네 가지로 분석하였듯이, 시가 지니는 세계관을 비극, 희극, 아이러니 그리고 풍자(satire) 등으로 구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윤동주의 「서시」는 비극의 세계관을 지닌 시이다. 인간은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비극성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왜 시인이 부끄러워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존재론의 의미에서 우리가 태어나서면서 부여받은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극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가 비극의 존재라는 그의 자각이 그를 부끄럽게 한다. 그리하여 바람은 그의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의 “기표”가 된다. 바람이 기의가 되어, 그를 부끄럽게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바람의 기표는 환유인가? 야콥슨의 이론에 근거하여 바람과 부끄러움 사이에 어떤 인접성질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은유인가? 바람은, 은유의 속성으로, 부끄러움과 일치하거나 유사한 의미의 관계의 망을 이루고 있지 않다. 바람이라는 그 자체는 수사학의 전통의 분류법이나 야콥슨의 이론에 근거하여서는 하나의 은유이거나 환유일 수가 없다. 바람은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는 기표이다. 바람은 그저 바람이라는 사물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며 수사학의 범례의 허용을 거부하고 있다. 

   다시 문장 전체를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여기에서 하늘은 단순히 물리현상으로 나타나는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그것은 외부에 나타나 있으면서 내재화되어 있는 하늘이다. 그것은 나의 자아를 가늠하기 위하여 설정하여 놓은 최고의 도덕성이다. 그리고 그 도덕성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인간은 아무도 없다. 하늘은 최고의 도덕성을 뜻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곳에 가까이 이르면 다시 뒤로 멀어지는 무지개처럼 우리를 부르는 몸짓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괴로워 슬퍼하는 것은 값싼 감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의 슬픔은 아주 깊은 심연에서 울려오는 도덕의 관념이 형이상학의 질문과 함께 어울려 있는 고결함이다. 그리고 그 고결함을 일깨우는 바람이 그를 괴롭게 한다.

    지극한 도덕성이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다음은 그런 자세의 인간이 살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지 길을/ 걸어가야겠다.” 아무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이 삶을 살 수 없는 비극의 존재로 인간이 태어났다면, 우리는 그러한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달리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그 사랑은 “별을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별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인가? 시인은 그의 시 「별 헤는 밤」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이 시에서 별은 하나마다 하나의 은유로 그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후에도 하나의 연을 할애하여 이름들을 하나씩 나열하고 있다. 모든 인간들과 모든 사물들이 모두 하나의 별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별이 되자 그들은 하나의 은유가 된다. 문맥상으로 별들은 그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여받음으로 하여 그 별의 의미가 확장된다. 별은 추억이, 사랑이, 쓸쓸함이, 동경이, 시가 그리고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이름을 부여받는 그 순간 그 은유들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된다. 윤동주의 시에서 하늘은 순수함과 고결함과 도덕의 완성의 상징이다. 이제 그 하늘에 별들이 이 세상의 이름들이 은유를 부여받자, 하늘은 부끄러움의 존재들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별을 헤는 마음은 부끄러움을 헤는 마음이 된다.  

   그렇다면 벌레는 어떠한가? 벌레가 벌레라는 그 이름을 부여받자 그 은유는 그를 부끄럽게 한다. “밤을 새워 우는 벌레”가 시인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벌레를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시인이 말하는 모든 대상들은 하나의 실존으로 그 자체가 부끄러운 존재이고, 부끄러운 존재이기에 슬픈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 그가 자신의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던 것도 그 이름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다시 「서시」로 돌아가자. 별을 노래하며 그는 부끄러움을 발견하였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부끄러움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시인에게 “모든 죽어 가는 것”은 부끄러움을 지녔고, 그 부끄러움을 시인은 사랑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인은 「서시」의 첫 줄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운 존재로 상정하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랬다. 그의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기준이 되는 점은 하늘이다. 그리고 그의 시 「별 헤는 밤」에서 그는 하늘에 있는 별들 하나 하나에 그가 살아온 경험의 침전물들을 은유로 파악하는 시도를 하여본다. 그러자 그의 부끄럼은 더욱 증폭되어 나타난다. 그는 이 시에서 마치 아담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듯이 별들에 이름들을 붙임으로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 부끄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제 일연 두 번째 문장 말미에서 “그에게 주어진 길”이란 무엇인가? 그가 시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길은 부끄러움을 자각하게 하는 길이다. 그에게 있어서, 은유는 사물과 그 자신이 하나가 되는 하나의 기표이다. 경이롭게도 모든 사물들은 완성의 도덕성이라는 하늘의 상징에 비추어진 은유로 해석되면서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변화를 겪는다. 윤동주의 시에서의 은유는 자각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동시에, 그 세계가 도덕성과 연결되며 부끄러움이라는 공간이 된다. 윤동주의 시가 자연을 노래하는 경우, 그것은 순수하게 자연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연은 그의 도덕심을 일깨워 주는 기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은 그의 도덕성과 연결을 맺게 되는 은유가 된다. 자연은 그의 고뇌가 서려있는 부끄러움의 기의를 지닌 기표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부끄러움을 부여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의 대상은 구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부끄러움은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별 헤는 밤」에서 그러한 실존의 삶의 신비에 시인은 매료되어 그리움에 휩싸인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윤동주에 있어서 유토피아라 말할 수 있는 동경의 대상인 이상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세계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희극의 세계가 아니다. 그의 세계는 철저하게 도덕성이 뿌리를 내린 실존의 자각이 이상향과 대립되는 비극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가 “무엇인지 그리워”라고 말할 때, 그것은 순수하게 동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분리된 자아의 눈으로 무엇인지 그리워하는 자아를 비극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워하는 인간의 비극성을 동정과 풍자의 눈길로 바라보는 시인이 지닌 비판의 눈길이요 자조의 음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은유의 별들이 내린 언덕 위에서 시인은 자신의 이름인 은유를 첨가한다. 은유가 가지는 그 불완전함의 무한한 가능성이 또 다시 그를 꿈꾸게 한다. 자신의 이름이라는 은유는 부끄럼의 은유로, 다른 은유들이 제 각기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듯, 그렇게 똑 같은 운명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리워한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이다. 그러한 희망을 가지는 것조차 시인은 부끄럽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써 놓았다가 흙으로 덮어버리고 만다. 그가 신비롭게 생각하는 것은, 은유들이 만들어 가는 다양한 부끄러움들의 모습들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인간이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는 불완전함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하여 부끄러움을 다시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것을 노래한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사색과 풍자의 계절인 겨울에 부끄러움을 배우고, 부끄러움을 잊은 듯 생명의 욕구가 충만한 봄이 오면 시인은 또 다시 부끄러움의 꽃을 피울 것이다. 윤동주의 시에서 은유는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고, 은유 그 자체는 부끄러움의 기의를 지닌다. 그에게 이름을 붙이는 그 은유 그 자체가 부끄러움을 자각하게 하는 행위이다. 이제 윤동주의 하늘은 샤갈의 그림처럼 그의 꿈의 조각들이 별을 대신하여 하늘을 가득 채운다. 은유는 그의 꿈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이다. 은유는 설명을 하지 않고 지시하여 주는 역할만을 하고 침묵한다. 서로 타협이 불가능하고 유사성이 전혀 없는 두 개념이 하나로 결합하여 이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은유는 시인에게 있어 부끄러움의 세계를 열어주는 연금술이다. 

   그리고 「서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의 시학을 이루는 부끄러움의 자각을 경험한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양의 낭만주의 시대에 시인들에게 있어서 바람은 시인들의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셸리가 그의 시 「서풍의 노래」(Ode to the West Wind)에서 그랬고 워즈워드의 시 「서시」(The Prelude)에서 그랬다. 별이라는 은유를 깨워서 시의 세계로 인도하는 바람은 시인의 시 세계로 통하게 하는 주술이다. 별이 은유의 길을 열어놓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별을 깨우는 시인의 도덕심이 잠재되어 있었다. 윤동주 시의 은유는 부끄럼의 상상을 확보하는 시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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