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8일 수요일

베르길리우스 (로마 시인) [Publius Vergilius Maro, 버질]

자료: 다음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9b1864b


(영)Virgil/Vergil.
BC 70. 10. 15 이탈리아 만토바 근처 안데스~BC 19. 9. 21 브룬디시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개요: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d〉(BC 30년경 집필을 시작했으나 미완성작임)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주로 그의 국민서사시〈아이네이스〉로 유명한데, 이것은 로마의 전설적 창시자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인도하에 세계를 문명화한다는 로마의 사명을 천명한 작품이다. 그가 시인으로서 지속적인 명성을 누린 것은 그의 운문이 갖는 탁월한 음악성과 어법, 그리고 방대한 작품을 정교하게 엮어나간 솜씨뿐 아니라 그의 시에 구현된 경험 및 행위들이 지니는 항구적인 의의 때문이기도 하다.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는 이탈리아의 만토바 근처 안데스의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이탈리아의 시골과 농부들에 대한 애정은 그의 전작품에 나타난다.

베르길리우스는 크레모니·밀라노·로마 등지에서 공부했고, 그리스·로마의 작가들, 특히 시인들에 통달했으며, 수사학과 철학에 대해 깊이있는 교육을 받았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로(Siro) 또한 그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며, 그의 초기 시에는 에피쿠로스 철학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으나, 점차 스토아주의에 가까워지게 된다.

정치적 배경

베르길리우스의 청년기는 로마 공화정이 끝나갈 무렵으로, 이탈리아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은 혼미했고 참화에 자주 시달렸다. 마리우스와 술라 간의 내전은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패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베르길리우스가 20세였을 때,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남쪽으로 회군해 루비콘 강을 건넜으며, 이후로 계속된 내전들은 BC 31년 악티움 전투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로소 종식되었다. 이러한 내전에 대한 증오와 공포는 베르길리우스와 그의 동시대인 호라티우스에 의해 강력히 표현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 및 그 시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그 이전 시대의 혼란상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는 전적으로 시작(詩作) 및 관련 연구에 바쳐졌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으며, 군사적·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단 한 번 법정에서 발언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설령 공적인 활동을 하고 싶었더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생애의 전반부를 학자이자 은자로 살았다. 그러나 시인으로 유명해진 뒤에는 로마의 많은 주요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또한 지방민인 동시에 로마인이 되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낸 지방은 갈리아 키살피나로 알려진 포 강 유역으로, 이 지방은 BC 42년에야 비로소 로마로 편입되었다. 다시 말해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 셈이다. 로마에 대한 지방민으로서의 찬탄은 그의 가장 초기 작품들에 속하는 제1전원시에 잘 나타나는데, 이 작품에서 목동 티티루스는 최근 수도에 다녀온 일을 말하면서 그 찬란함에 경탄하고 있다.

문필활동

흔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으로 전해져 온 시집 〈아펜딕스 베르길리아나 Appendix Vergiliana〉에 실려 있는 시들 중 몇 편은 그가 쓴 초기 시인지도 모르나, 대부분의 것은 그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그의 것인 최초의 작품은 10편의 시들로 구성된 〈전원시 Eclogae〉(BC 42~37)이다(이 10편의 '에클로가'[선별된 짧은 시를 뜻함]로부터 후세에는 전원시 전체를 에클로그라고 일컫게 됨). 이 시들 중 일부는 그리스의 시인 테오크리토스(BC 280경 활동)풍으로 아르카디아의 목가적인 전원을 그린 도피적인 작품인데, 테오크리토스의 것보다 한층 더 비현실적이고 양식화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목동들이 양지바른 곳에서 그들의 단순한 기쁨을 노래하며 상투적인 비애조로 불행한 연애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생겨난 슬픔을 읊조리는 상상적인 세계의 이상화된 상황을 유창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직접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목가적인 세계를 현실세계에 접근시킴으로써 전원시라는 장르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들이다. 목동들의 왕 다프니스의 죽음을 노래한 제5전원시는 그 얼마 전에 있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과 분명 어떤 관련이 있으며, 제10전원시는 정치가로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동료 시인 갈루스를 목가적인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제1전원시와 제9전원시는 목동들이 농장에서 쫓겨나는 데 대한 비탄의 노래인데, 이는 베르길리우스 자신의 체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BC 42년 필리피 전투 뒤에 안토니우스와 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의 퇴역 군인들을 재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세습농지를 잃게 되었다. 뒤에 그는 세력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어쨌든 문제된 것이 시인 자신의 농장이든 주위 사람들의 농장이든, 그 시들이 베르길리우스의 개인적 체험과 결부된 것만은 확실하며, 거기에는 베르길리우스 특유의 것으로 간주되는 비통한 어조로 박탈당한 자의 슬픔이 표현되어 있음).

당대 상황과 연관있는 작품으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제4전원시(이 작품은 훗날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되어 '메시아적 전원시'라고도 함)이다. 이 고결한 시는 죄악을 몰아내고 평화를 회복시켜 황금시대를 돌이킬 한 아기의 탄생을 낭랑하고 신비적인 언어로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내전의 암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무렵에 씌어졌을 것이며 그 집필 연대는 BC 41~40년으로 확실시 된다. 베르길리우스는 삼두정의 세 집정관 중 하나였던 안토니우스와 그의 아내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사이에 태어난 아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는 특정한 역사적 배경을 넘어서 상징적인 차원에서 세계 평화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아우구스투스 때에 어느 정도 실현될 것이었다.

내전이 가져온 가장 불행한 결과들 중 하나이며 베르길리우스가 시골 사람으로서 가장 강하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이탈리아 농촌의 피폐상이었다. 농부들은 전쟁에 끌려갔으며 버려진 농토는 황폐해졌다. BC 37~30년 내전의 마지막 시기에 씌어진 〈농경시 Georgica〉는 이탈리아의 전통적 농촌 생활을 복구할 것을 강력히 호소한 작품이다. 교훈시의 형식을 취한 이 시는, 그러나 뒤에 세네카가 말한 대로 '농부들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씌어졌다. 실제적인 가르침(밭갈이, 나무 키우기, 가축 돌보기, 벌 치기 등)은 자연에 대한 생생한 통찰력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이탈리아 농촌의 아름다움(제2권 136행 이하)이나 추수가 끝난 뒤의 농부의 기쁨(제2권 458행 이하) 같은 주제로 매우 치밀하고 시적인 삽문들이 끼어들곤 한다.
〈농경시〉는 각권의 서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재상들 중 한 사람으로 대표적인 예술 후원자였던 마이케나스에게 헌정되었다. 그무렵 베르길리우스가 속해 있던 모임은 궁정모임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사랑하는 조국이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을 보고자 한 그의 열망은 농토를 재건하고 도시에 대한 압박을 줄이고자 하는 국가적 요구와도 일치했다. 베르길리우스가 정치적 선전만을 위해 글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시는 당대의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요구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자신 또한 정부와 동일한 이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BC 31년, 베르길리우스가 38세 되던 해 아우구스투스(당시에는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쳤고, 그이후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다른 많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내분이 마침내 끝난 데 대해 안도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인물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전통과 그 헌정 형태를 보전하려고 애썼으나 사실상 로마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이룩했으며, 로마인들에게 국민적 긍지와 선조들의 종교 및 전통적 덕목들, 즉 용기, 절약, 의무, 책임, 가문에 대한 헌신 등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고취하고자 진력했다. 그런가 하면 베르길리우스는 역시 시골 사람으로서, 이탈리아 민족의 단순한 미덕들과 종교적 전통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동안 서사시를 쓰기 위해 준비해왔던(당시 서사시는 최고의 시 형식으로 간주됨) 그는 이제 자신이 그리스 로마의 이상을 〈아이네이스〉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BC 12세기에 트로이가 그리스인들에 의해 멸망당한 후 조국을 떠난 트로이의 왕자가 이탈리아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거기에서 로마가 나오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2가지 점에서 그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첫째, 이야기의 연대 및 주제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매우 가까우므로, 그는 많은 일화와 인물들을 그리스의 위대한 선배 시인에게서 차용할 수 있었다. 둘째, 그 이야기는 아이네아스를 로마적 생활 양식의 원형(최후의 트로이인이자 최초의 로마인)으로 제시함으로써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연관될 수 있었다. 더욱이 예언과 계시, 아이네아스의 방패에 그려진 그림이나 당대 관습 및 제도의 기원을 묘사하는 등의 기법을 통해 로마 역사의 실재 사건들을 예시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서사적 영웅의 시대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라는 이중의 시대적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체제가 약속해주는 로마의 재건에 대해 베르길리우스가 느꼈던 열광은 시에도 자주 반영된다. 주피터의 낭랑하고 엄숙한 예언(제1권 257행 이하)은 신에 의해 예언된 로마의 운명을 펼쳐보임으로써 감동적인 애국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에게 나는 시공(時空)의 제한을 두지 않노니 내 그들에게 무궁한 통치권을 주었노라"(278~279행),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는 "거친 세대들이 부드러워지며 전쟁들이 쉬게 되리라"(291행). 주피터의 긴 예언은 의인화된 광폭이 사슬에 묶여 그 피 묻은 이빨을 헛되이 갈아대는 것을 묘사한 인상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제6권의 끝부분에서는 하계(下界)를 방문한 아이네아스의 눈 앞에 장차 태어날 로마 역사의 주역들이 지나간다. 그의 아버지 안키세스의 유령은 그에게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면서 끝으로 로마의 사명은 정부 및 문명과 관련된 것임을 말한다(그리스의 성취가 예술·문학·이론과학에 있었던 반면). "네 마음껏 민족을 다스리라, 정복된 자들을 살려주고 교만한 자들을 쳐부수라"는 것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의 미래에 대해 갖고 있던 전망, 즉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고 민족들 사이에 운명과 법치(法治)를 전파할 신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전망을 말해주는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그의 한 송가에서 로마인들에게 "그대들은 신들의 하인이므로 지상의 주인이다"라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아이네이스〉의 위대함은 비단 로마의 앞날에 대한 숭고한 전망을 제시한 데 있는 것만은 아니며, 베르길리우스는 인생의 공적인 측면 외에 사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아이네이스〉는 단순한 찬미가의 차원을 넘어, 로마의 거대한 통치 기구가 갖는 목표와 그 성취를 개인들의 좌절된 희망이나 고통과의 긴장 속에서 제시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그리고 흔히 말해지듯 로마 시인이 창조한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 문학에 길이 남은 인물은 디도이다. 카르타고의 여왕으로서 로마적 생활방식과 대조를 보인 그녀는, 단순히 로마를 찬미하기 위한 작품에서였더라면, 아이네아스가 그녀를 버리는 것이 칭찬할 만한 행동인 것처럼 그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제4권에서 그녀는 너무나 진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독자는 과연 그러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로마를 건설해야 하는가에 회의를 느낄 정도이다. 또한 이탈리아에 도착한 아이네아스는 투르누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데, 자기의 신부를 앗아가려는 침입자에게 대적하는 이 인물이 아이네아스보다 덜 세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패배도 사뭇 동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것들은 로마 낙관주의에 대한 긴장상태를 보여주는 2가지 예이며, 베르길리우스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간 상황의 비애와 고통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결국 아이네아스가 목표를 달성하고 의무에 대한 헌신이 승리하게 될 때 로마의 독자는 이렇게 국가를 말할 것이다. "로마를 건설한다는 것은 그렇게도 위대한 임무였으니까"(제1권 33행).
베르길리우스는 11년 동안이나 〈아이네이스〉의 집필에 매달려 있었고, 끝마무리를 하지 못한 채 죽었다. BC 19년, 앞으로 3년을 더 이 작품에 바치기로 한 그는 그리스로 떠났는데, 이는 아마도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부분들에 좀더 지방색을 살린 손질을 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행 도중 열병에 걸려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뒤 곧 죽었다. 그가 살았더라면 〈아이네이스〉가 대폭 수정되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소원은 그것을 태워버리라는 것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저지했다고 한다. 여하튼 남아 있는 그대로도 이 작품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가 품었던 이상과 국민적 성취의 기념비인 동시에, 영광뿐 아니라 '사물에 배인 눈물'을 알고 있었던 시인의 고독하고 감수성 깊은 음성의 기념비이다.

영향과 평가

베르길리우스의 시는 로마에서 즉시 유명해졌고 로마인들의 찬탄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다음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그들의 국민 시인으로서 그들 자신의 이상과 성취를 대변해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둘째, 그는 시 예술(구성·어법·운율 등)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겨졌다. 이 2번째 이유로 그의 시들은 학교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1세기 로마의 비평가이자 교사였던 퀸틸리아누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들에 바탕을 둔 교과과정을 제안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죽은 지 몇 년 뒤 후배 시인 오비디우스에 의해 모방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은 백은(白銀)시대 내내 계속되었다. 학교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가르치는 일은 라틴어 교육이 이루어지는 한 계속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이유로 그를 칭송하게 되었는데, 학자들은 그의 시들에서 지혜와 지식의 보고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들은 주로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마크로비우스(400경 활동)나 베르길리우스 주석가 세르비우스(4세기말~5세기초)를 위시한 많은 후세 작가들의 저작들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비유적 주석은 차츰 우세했고, 그리스도교의 영향하에 특히 중세 전반에 걸쳐 널리 확대되었다. 그리스도교적 비유해석이 가능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제4전원시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신적인 소명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위시해 〈아이네이스〉가 표방한 가치관이 그리스도교의 가치관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의 극대화된 표현은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에서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서 연옥을 지나 천국의 문 앞까지 시인을 이끌어주는 인도자로 나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영문학에 미친 베르길리우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스펜서는 〈요정 여왕 The Faerie Queene〉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위한 끊임없는 영감을 그에게서 얻었으며,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은 그 구성 및 진행뿐 아니라 문체와 어법까지도 〈아이네이스〉를 본받은 것이었다. 존 드라이든을 위시해 영국 고전주의 시대의 많은 작가들은 베르길리우스의 시야말로 형식 및 윤리적 내용에 있어 완전의 극에 이른 것이라고 보았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그에 대한 약간의 반동이 있었으나, 매슈 아널드, 앨프레드, 로드 테니슨 등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들은 그에게서 낭만주의자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불평했던 감수성과 정서를 얼마든지 찾아냈다.
R. D. William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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