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http://www.kpicaa.co.kr/shop/mView.asp?gCode=521&find=
작품 설명
생명주를 그냥 두면 풀기 때문에 곰팡이가 슬거나 벌레가 끼어 보관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생명주의 풀기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잿물에 삶아 익명주를 만들어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 삶을 때는 볏짚 잿물을 쓰는데, 빨래를 마친 익명주는 하얀 색깔로 반짝이며, 생명주일 때의 뻣뻣함이나 거친 느낌이 없어지고 대신 부드럽고 매끈하게 된다. [작가 소개]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일반적으로 견사로 만든 견직물을 ‘비단’이라고 하지만 견사 종류와 세직 및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 목화를 재배하여 무명을 짜기 사작한 것은 조선초기의 일이다. 조선초 여흥 민씨에서 시작된 두리실 명주짜기의 기능은 구한말에는 동래 정씨에서 남양 홍씨로 전해졌다. 이 후 일제시대에 이 집안의 14대 종부였던 맏며느리 강석경(동서)이 시어머님인 남양 홍씨로부터 누에를 치고 실을 잦고 명주를 짜는 일련의 기예를 전수받았다. 조옥이 보유자는 15세 이전에 이미 친정어머니께 베짜는 기예를 익혔지만, 19세에 시집을 와서 맏동서인 강석경과 함께 시어머니 남양 홍씨에게 명주짜기의 여러 기술을 더욱 배우고 익혔다. 일제 때 명주베와 무명베를 많이 짤때는 연간 200자 정도, 5필까지 짰으며, 일제 말에는 공출 때문에 남는 물건이 없을 정도라 실에다 무명대를 넣어 목화를 말려가지고 와서 몰래 몰래 길쌈을 했다고 한다. 더욱이 시집온 지 1년만에 독수공방을 하게 되어 시어머니께 딸을 맡기고 베틀을 안방에 놓고 벗 삼아 살게 된 후, 베짜는 솜씨가 좋기로 소문이 나면서 무명베와 명주를 팔아 가게에 보내며 살림을 일구었다. 그러나 1960대 말 이후 명주짜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면서 누에를 먹이는 사람들도 줄어 집에서 직접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먹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농약 친 뽕잎을 주면 누에가 죽는 것도 집에서 누에를 먹이는 큰 이유이다. 이처럼 보유자 조옥이는 직접 누에를 먹여 실을 써서 물레질하며 베틀에서 생명주를 짜고 익명주를 다듬는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유지하며 전통 명주짜기를 전승해 왔다. [제작과정] 제작과정은 목화재배와 수확, 씨앗기와 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날기, 베매기, 무명짜기 순으로 나뉜다. 씨앗기와 솜타기는 목화에서 씨를 빼내고 솜활이라는 기구를 이용해 솜을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이다. 고치말기는 솜을 말판 위에 펴놓고 말대로 비비는 과정이며, 실잣기는 물레를 이용해 실을 뽑고, 뽑은 실을 가락에 감는 단계이다. 무명날기는 실의 굵기에 의해 한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무명날기가 끝난 날실을 팽팽하게 하는 베매기와 풀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하여 무명을 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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