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4일 일요일

근대modern와 현대modern (강유원 서평:《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김덕영 지음, 인물과사상사)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김덕영(지음),  인물과사상사, 2008.
강유원 서평.

※ 메모:  학습을 위해 위 출처의 텍스트 일부에 밑줄을 긋거나 굵은 글시체, 줄바꿈 등의 변형을 취해 봤다. 원본을 보시려면, 위 출처 링크를 참조해주시기 바란다.

***
1.

이 책의 부제는 "학문과 지식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이고 머리말 제목은 "진정한 지식인을 위하여"이며, 맺음말은 "대학, 학문 그리고 지식인의 근대성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책 제목은 막스 베버의 '인물과 사상'에 대한 탐구를 가리키는 듯한데, 이렇게 부제, 시작과 끝은 '지식인'에 관한 일반론을 가리키고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이러한[혼돈으로 가득찬] 한국 대학과 지식인의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즉 나는 이 책에서 나 자신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타자를 찾아서 그 타자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분명 저자는 막스 베버, 그의 시대의 지식인들과 학문의 흐름을 조망하면서 그 속에서 한국의 지식인(과 지식인 집단)이 본받아야 할 뭔가를 제시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저자의 이러한 목표가 성취될지는 의문이다.

물론 저자는 지식인과 학자로서의 막스 베버의 일생을 다루면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귀감으로 삼을만한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겨냥하고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책들을 잘 읽지 않을 뿐더러 설혹 읽는다해도 여기에 제시된 것처럼 행동하기는 어렵다. 그들을 움직이는 요소는 학자의 명예와 진리추구라는 숭고한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을 읽을 때 저자의 분노와 고언을 간과해도 괜찮을 것이다.

2.

modern이라는 말은 '근대'로 번역되기도 하고, '현대'로 옮겨지기도 한다. 서구의 경우 르네상스 시대를 근대라 하기도 하고, 계몽주의 시대를 근대라 하기도 하며, 독일관념론의 시대도 근대에 속한다 하며, 막스 베버를 근대사상가라 한다. 그런데 베버는 현대 사상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들은 다 맞는 용례이다. 
  • modern이라는 말이 15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프레임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에는 근대라고 옮기면 적절하다. 이를테면 '21세기 한국사회는 근대적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관철되고 있는 시공간'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 
  • 그런데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선 시기는 15세기부터, 과학혁명, 계몽주의 등을 거쳐 19세기 중반까지이고, 이어지는 시기는 19세기 중반 — 굳이 연대를 특정하자면 1850년대 — 부터 오늘날까지이다. 나는 앞의 시기를 근대라 하고 이어지는 시기를 현대라 부른다. 
  • 그러니까 구조적 프레임으로서의 '근대' 안에 시기로서의 근대와 현대가 들어가는 것이다.

    (1) 앞선 시기인 근대에 '근대적 세계'의 기본적인 틀—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정치체제, 과학혁명에 따른 학문적 방법론의 보편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세계화된 시장의 맹아—이 형성되었다면,
    (2) 이어지는 시기인 현대에는 그러한 기본적인 틀이 유지되면서도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분화되는데, 이를테면 근대의 자본주의가 '점잖은 자본주의'1)를 지향하고 있었다면, 이 시기에는 약탈적(또는 탐욕적)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나며, 학문의 본격적 분화2)와 전문화3) 등이 생겨난다.
베버는 바로 이러한 현대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지식과 통찰을 제공하는 학자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 세계에 등장한 사회과학 논의를 읽으려면 그가 제시한 학문적인 방법론, 술어 등을 익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대의 여러 사회과학들의 기본적인 학문 방법론을 이해하고 베버 시대에 생겨난 본격적인 전문 분과들의 영역을 개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베버 시대의 학자들 중에서도 빈델반트, 리케르트가 속했던 신칸트학파, 마르크스, 니체 등과 같은 철학자들과 경제학자, 법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3.

앞서 말했듯이 베버 시대에는 학문이 전문적인 직업(Beruf)이 되었다. 그에따라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학자는 연구와 강의에 전인격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진정한 지식인과 학자가 되기위해 연구와 강의에 혼신을 다했다." 베버의 학문은 사회과학의 전 영역에 걸쳐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다양한 학문을 편력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학문적 관심 자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 그는 "근대 서구의 역사적 형성 조건과 발전 과정, 그 구조적 특징 및 병리적 현상"에 관심을 가졌고, 
  • "이러한 인식관심을 '합리화'라는 개념적, 이론적 축에 입각해 추구했다." 
일관성있는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고는 하나 이처럼 베버가 가진 관심은 하나의 학문 분과에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국가, 관료제, 봉건주의, 시민사회, 법률, 자본주의, 시장, 종교, 예술, 학문, 에로스, 도시 등 실로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베버를 통해서 근대적 세계에 살고 있는 현대의 전문적 학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주제들은 어떻게 탐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근대 세계'라는 문제의식을 붙잡고 있던 베버에게는 독일의 현실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근대 세계라는 일견 보편적인 문제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의 독일 시민계층의 과제와 역할이라는 특수한 문제로까지 자신의 관심을 넓혔는데 그가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는 "독일 시민 계층의 정치적 미성숙"이었다. 베버는 이것이 "독일 국민 국가가 직면한 가장 취약한 문제,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일 역사의 종말을 고할지 모를 정도로' 국민국가에 '위협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 시민 계층이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이유는 아직도 귀족 계급이 주도하는 군주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인 국가체계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버가 보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시민계층을 정치적으로 교육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정치에의 실천적 참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학문에서의 이론적 작업을 통해서 정치적 교육을 시키고자 시도했다."

독일 시민 계층에 대한 베버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의 역사를 보면 심각하고도 예지력있는 것이었다. 독일 시민 계층은 그의 진단처럼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 아래에서 무기력했으며, 독자적이고 건전한 문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귀족계급을 뒤쫓는데 급급했다. 그렇다면 나치 독일 시대에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보여준 무기력한 모습, 더나아가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집단애국의 탄생"4)은 바로 베버가 우려했던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이는 권위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21세기 한국의, 허위의식으로 가득찬 시민들에도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결국 아직도 중요한 것은 근대적 계몽주의, 즉 근대성의 실현인 것이다. 

1)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근대 초의 '온화한 상업doux-commerce론' 등을 논의한 앨버트 허쉬먼의 < <열정과 이해관계>>를 참조할 수 있다. 

2) 예를들어 근대의 칸트나 헤겔 시대에만해도 '국가학'이라는 포괄적 범주에 들어있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법학, 심지어 윤리학 등이 현대인 베버 시대에 오면 별개의 학문 분과로 나뉜다. 

3) 이를테면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는 왕실이나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취미 차원에서 학문 활동을 했다면 현대에는 그렇지 않은데, 베버의 강연 <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이를 잘 집약하고 있기도 하다.

4) 라파엘 젤리히만은 <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근대에 대한 사유가 역사적, 지리적 요인 때문에 온전한 힘을 펼칠 수 없었다. 19세기 초 독일인들은 나폴레옹 군대를 통해 단기간에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설익은 이성적 사유는 해방전쟁이라는 목욕물로 계몽사상을 단호히 씻어냈다. 독일 부르주아지의 절대다수는 피히테와 아른트의 이상주의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재발견한 게르만 신화의 세계에 공감하며 그 속으로 도피할 뿐,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인식을 냉철한 기준에 따라 검토하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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