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1일 수요일

개인으로 보는 금융시장의 역사: 시장을 만든 미국의 100대 인물


김홍식



1. 금융시장을 시험하는 폰지의 망령

2006년 제이유그룹 사기 사건에서 당시 검찰 추산으로 투자자들 수십만 명이 약 4조 5천억 원의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금보다 더 많은 수당”을 준다고 투자자들을 현혹했던 이 사기 수법은, 사실 1920년대 미국에서 찰스 폰지(Charles Ponzi)가 선보였던 고전적인 사기 수법의 변종에 불과하다. 폰지가 “90일에 100 퍼센트 이자”를 주겠다면서 외환거래와 국제 우표교환에 투자하는 복잡한 금융거래로 사기를 위장했던 것에 비하면, 제이유그룹의 속임수는 사기라고 하기에는 ‘성의가 부족한’ 조악한 사기 수법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이 노골적인 속임수에 1920년대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한국인들이 더 많은 돈을 털렸다! 폰지가 지하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도 100년 뒤에 한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냥 믿기에는 너무 좋은 미끼이지만, “원금보다 더 많은 수당”이나 “90일에 100 퍼센트 이자”를 벌려고 돈을 맡겼다는 사실을 볼 때, 이 행위는 사기로 불법화되기 전에는 명백한 금융거래로 작동했다. 모든 금융상품에는 ‘위험’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험’을 떠안고 금융상품을 매입하는 거래가 금융거래이기 때문이다(투자자들이 얻는 ‘수익’은 바로 그 위험 수용의 대가다). 사기 피해자들은 명백히 그 위험을 떠안고 거래에 뛰어든 ‘과감한’ 투자자들이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조직이 자신의 DNA를 복제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는 바로 이러한 (근본적으로 위험이 내재된) 거래다. 거래가 없다면 사유재산과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하는 시장도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돈이 거래되는 금융시장은 일반 상품시장과 달리, 아주 유연하고 민감하며 위력적이다. 좋든 싫든 산업과 수많은 일자리가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금융시장의 중개기능을 통해 돈이 돌아야 하기 때문에, 금융시장은 자본주의가 가장 막강한 위력을 행사하는 곳이다. 혁신이 가장 유연하게 일어나는 시장이 이곳이기도 하고, 사기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도 이곳이다.


2. 개인의 활동으로 본 금융시장의 탄생

켄 피셔(Kenneth L. Fisher)의 《시장을 뒤흔든 100명의 거인들One Hundred Minds That Made The Market》은 지금의 금융시장은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니며, 시장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갔던 개인들이 이룬 결실로 이해한다. 이 책은 미국에 산업혁명이 도입되기 전 유럽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시작해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 금융시장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 각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지은이는 미국에서 금융시장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소불위의 힘과 자금을 휘두르며 시장의 기틀을 놓았던 공룡 같은 거인들, 산업혁명에 돈줄을 대며 자본을 배분하는 막강한 힘을 행사했던 투자은행가들, 새로운 기법을 도입해 시장을 발전시켰던 혁신가들을 비롯해, 시장을 주무르고 세상을 놀라게 했던 대단한 사기범과 투기꾼 등 11개 부류로 총 10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 옛날 황무지와도 같았던 미국에서 지금의 현대적인 월스트리트가 형성되기까지 지은이는 약 200년(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에 걸친 미국 금융시장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교묘한 투시경을 들이댄다. 거대하고 갈수록 복잡해져가는 금융시장을 하나의 역사로 아우르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100대 인물들 각각이 펼쳤던 거래와 그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시장에 미쳤던 영향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장의 역동적인 모습이 개인의 삶으로 투영된다. 금융이 경제와 산업, 또 인간관계에 미치는 막강한 위력과 함께, 추악하고 교활한 모습이 이들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경제학자나 역사가들이 쓰는 역사는 시장 바깥의 멀리서 시장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이 덜하지만, 실제로 시장에서 위험을 떠안으며 투자업계의 전쟁에 참여했던 지은이가 재현하는 사실은 시장 안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현대 금융시장을 보는 안목과 그들이 남긴 교훈을 지은이는 독자들에게 던진다. 한편으로, 《시장을 뒤흔든 100명의 거인들》은 “월스트리트 위인전”이라는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는 금융시장의 진화 과정을 각 개인에 투영되는 시장 논리와 그 흥망성쇠로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이 책은 “금융시장의 역사”라는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는 시장 참여자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그들의 흥미로운 사생활과 가치관의 흔적까지 추적해서 묘사한다.


3. 다양한 삶을 통해 드러나는 시장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남긴 교훈들

일례로, 거대한 채무로 피라미드를 쌓아올린 대표 인물의 하나로 새뮤얼 인설(Samuel Insull)이 등장한다. 그는 1920년대에 제너럴일렉트릭(GE)의 모태였던 전력 회사를 세우면서, 채무를 동원해 거대한 지주회사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이 피라미드가 무너질 때 인설은 투자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피해를 입히고 사기꾼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가 이렇게 무너진 이유가 과도한 채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기세등등한 J.P. 모건의 월스트리트를 경멸했기 때문이라는, 지은이의 사건 구성은 아주 흥미롭다. 실제로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주가 하락기에 공매도 공격에 나서서 인설을 무너뜨렸고, J.P. 모건(2세)은 그의 피라미드 제국을 통째로 집어삼킨 뒤 지금의 GE로 다시 만들었다. 인설이라는 인물을 두고 지은이가 전하는 교훈은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귀담아들어야 할 진지하고도 심각한 내용이다(본서의 7장).

한편, 1920년대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 반열에 올랐던 어빙 피셔(Irving Fisher)를 두고, 경제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건 신경 쓰지 말아야 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꼬집은 지은이의 지적은 매우 신랄하다. “그는 시장이 진지하게 쳐다봤던 최초의 거물 경제학자였고, 동시에 대놓고 시장을 망쳐놓은 최초의 경제학자였다.” 켄 피셔가 이 책에서 동원한 비판과 비난 치고, 이 정도의 비난이면 온건한 축에 낄 것이다(8장).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 케네디를 다룬 절을 본다면, 실로 케네디 집안에서 이 책을 전량 매점해서 불사르고 싶을 것이다. 그는 “좌충우돌로 큰돈을 모은 투기꾼이요, 막무가내로 몰염치한 데다, 호색가였으며, 주로 이기심의 발로로 출세에 매진했던 사람이었다. ··· 그에게는 명예라고 할 만한 게 없었고, 아들들의 후광 덕분에 나쁜 평판에서 구조됐다는 게 옳을 것이다.”(6장)

국내에서 전설적인 트레이더로 제시 리버모어(Jesse Livermore)를 모델 삼아, 그가 1940년에 썼던 《주식 매매하는 법How To Trade Stocks》을 투자의 고전으로 떠받드는 투자클럽이나, 투자와는 무관한 이 희대의 투기꾼을 위대한 투자자로까지 치켜세우는 출판사도 있는 것 같다. 지은이는 그를 시장에 유연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지나친 술과 여색의 유혹으로 일에 집중하지 못해 실패한 트레이더로 묘사한다. “번쩍번쩍 시선을 끄는 과도한 매매와 무절제”로 “드세게 몰아가는 트레이더들은 성공할 수는 있어도 성공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결론짓는 켄 피셔는 리버모어를 본받기는커녕 절대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할 무모한 투기꾼으로 평가한다(그는 결국 자살했다). 한편, 1830년대에 월스트리트 최초로 공매도를 도입한 무모한 투기꾼 제이콥 리틀의 정신적 후계자로 리버모어를 자리 매김하는 지은이의 시장관에는 역사를 관통하는 혜안이 엿보인다. 제이콥 리틀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월스트리트판 스턴트맨으로 지은이는 평가한다. 스턴트맨을 보고 멋있다고 박수칠 수도 있고, 연기 중에 사망한다면 애도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은 절대 스턴트맨을 따라하면 안 되겠다.


4. 금융시장을 낳았던 또 하나의 춘추전국 시대

지은이는 금융시장이 미국에서 가장 발달했고 또 가장 많은 금융혁신이 가장 먼저 도입된 이유로 미국의 “문화 부재un-culture”를 들고 있다. 다양한 곳에서 모여든 이민자들 사이에 지배적인 공통 문화가 없었다는 역사가 자본주의와 자본시장에 비옥한 토양이 됐다는 해석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시각이다. 중국에서 주나라 말기에 곳곳에서 제후들이 군립했던 춘추전국 시대는 백성들이 시달렸던 난세였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제후들마다 부국강병의 전략과 방법론을 찾느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풍요로운 ‘사상의 시장’이 형성됐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금융시장이 형성되는 시기도 대단한 난세였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제후들마다 각종 전략을 기용해 군사를 움직이며 ‘땅 따먹기’를 했다. 금융시장의 형성기에는 시장을 움직이고 또 새로 만들었던 개인들이 ‘돈 따먹기’를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활동이 집중된 시기는 미국 자본주의가 틀을 잡아가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이다. 바로 미국이 산업혁명을 겪었던 제2차 산업혁명기이고, “날강도 귀족”으로 불렸던 악덕 자본가들이 판을 쳤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한 난세에 활약한 개인 중에는 유비 같은 덕장들도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모략에도 불구하고 소액 주주들의 지지에 힘입어 뱅크오브아메리카를 지켜냈던 아마데오 자니니(Amadeo P. Giannini), 대공황 전에 금융재난에 맞설 리더십 부재를 걱정했던 “연방준비제도의 아버지” 폴 워버그(Paul M. Warburg), 또 밴처캐피탈을 최초로 도입하면서 사람됨을 가장 중시했던 조르주 도리오(Georges Doriot)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 밖에 피셔(Fisher) 형제와 사이러스 이튼(Cyrus Eaton) 등 덕장으로 봐야할 사람들은 더 있다. 반면, 조조 같은 모략가와 다른 사람 등쳐먹기를 일삼았던 모사꾼들도 있었다. “주식 물타기”를 최초로 도입해 내부자 조작을 서슴없이 벌였던 다니엘 드루(Daniel Drew), 은행을 본거지로 삼아 내부자 정보의 노골적인 남용과 밀어내기 식의 기만적인 판매술책은 물론, 막무가내로 주가 조작과 투기를 벌였던 내셔널씨티은행의 찰스 미첼(Charles E. Mitchell)과 체이스은행의 앨버트 위긴(Albert H. Wiggin)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보다 더 험악하고 무지막지한 사기꾼과 불한당, 투기꾼도 출현했다. 그들은 월스트리트의 “악령”, “백여우”, “해적”, “왕곰”, “마녀” 등의 전설을 남겼던 성공한 투기꾼들과 실패한 투기꾼들이다.

한편, 춘추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있었듯이, 금융시장 형성기에도 그런 아이디어 맨들로 세 부류가 등장한다. 찰스 다우(Charles Dow)와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과 같은 금융 언론인 및 작가들, 최초로 지주회사를 만들고 풋과 콜의 옵션을 창안하고 성장주 투자와 뮤추얼펀드, 현대적 기업사냥을 도입했던 혁신가들, 경제학자 등의 전문가들과 기술적 분석가들이 그들이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아직도 미치고 있는 기술적 분석가 중에서도 세 사람이 등장한다. “갠각Gann Angle” 혹은 “갠부채Gann Fan”로 유명한 윌리엄 갠(William D. Gann)과 1980년대 말부터 유행을 탔던 엘리엇(R.N. Elliott: 엘리엇 파동으로 유명하다), 또 기술적 분석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존 매기(John Magee)다. 이 세 사람은 지은이가 혼내주고 싶은 기술적 분석가들 중에서 세심하게 선정된 듯하다. 존 매기의 시각에 대해서 지은이는 정중한 비판을 논리적으로 제시한다. 대중을 속이고 장사를 하려했던 다른 파렴치한 기술적 분석가들과는 달리, 비록 틀린 생각이라도 장사에 연연하지 않고 솔직한 생각을 책으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갠과 엘리엇의 이름을 팔아먹는 장사치들에 대해선 예리한 비판과 비난의 화살이 날아간다. 이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운운하며 1920년대 강세장에 올라타 투자자들을 가지고 놀았던 에반젤린 애덤스(Evangeline Adams)라는 여류 점성술가와 다름없는 월스트리트의 주술사이자 돌팔이 약장수로 평가된다. 갠각과 엘리엇 파동이 국내 일이위를 다투는 유수한 증권회사의 2008년 시장전망 자료에 아직도 믿을 만한 이론인양 등장하는 게 우리 시장의 현실인 것을 보면, 더 이상 속기 싫은 투자자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간절히 권한다.


5.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되풀이한다”

마지막으로, 이 100대 인물을 통해 지은이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많지만, 지은이가 가장 전하고 싶어하는 집약적인 주장을 전하는 게 옮긴이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 하나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초두에 언급했던 제이유그룹 사기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다른 하나는, 투기가 좋든 싫든 산업을 가동하려면 금융시장이 필요하고, 금융시장을 유지하려면, 투기를 허용하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잘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무지막지한 투기가 횡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무지막지하게 투기를 금지하는 것도 문제이며, 자본주의 원리로 볼 때는 후자가 더 심각한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다. 물론 이 해석은 옮긴이의 해석이지만, 독자들은 다양한 시대와 환경에서 이러한 저자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치르는 동안 남발했던 대륙달러Continental dollar의 화폐 가치가 극도로 폭락했고 미국 정부의 신용은 바닥에 떨어졌었다. 오죽하면 “대륙달러만큼이나 값어치가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미국 최초로 시도된 중앙은행이었던 미합중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이 이런 미국 정부의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 대륙달려의 가치를 환불해주었던 시도가 미국 최초의 투기를 일으켰고, 이것이 곧 미국 금융시장의 근원적인 출발점이었다는 지은이의 지적은 꼭 투기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자본주의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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