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3일 금요일

山中妙心

답답하고 또 생각도 무거워질 때면 산을 걷게 됩니다. 서너 해 전에는 산을 걸어도 답답해 한동안 밤에 산을 걷는 야간산행을 즐길 때가 있었습니다. 퇴근길 동선에 맞춰 밤 9시 반이 넘지 않은 시각이면 산에 오릅니다. 늦어도 그쯤에는 입산해야 새벽 1시 이전에 하산할 수가 있습니다.


1. 막걸리 한 통, 김밥 한 줄

막걸리 한 통과 김밥 한 줄 마련해 터벅터벅 걷다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밝을 때 그렇게 자주 만나던 산인데, 어둑해지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낮의 산이 아버지라면 밤의 산은 할아버지 같고, 또 낮의 산이 갖가지 색의 화사한 아가씨들이라면 밤의 산은 한 가지 색깔의 푸근한 어머니 같습니다. 어둠이 산을 감싸는 덕에 온갖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살갗을 스치듯 들려옵니다. 어느새 맑은 땀이 몸에 흐를 때가 되면 널따란 마루가 달린 정자가 보입니다. 지날 때마다 들러 먹거나 쉬거나 하던 그곳에 가방과 짐을 풀고 한가운데에 꼿꼿이 앉아 숨을 돌립니다.

2. 벌떼와의 조우


헉! 그때였습니다. 새끼 손가락 두 마디쯤 되어 보이는 말벌 서너 마리가 하나 둘씩 나타나더니 웅웅거리며 제 주변을 맴돕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정자의 천정에 벌집이 보입니다. 뽀얀 색에 웬만한 바가지보다 큰 벌집인데 거의 다 지어가는 모양입니다. 순간적으로 그 녀석들 마음이 엿보였습니다. 서너 마리는 일종의 첨병으로 경계근무를 나왔던 것입니다. 여왕벌 모시고 살 궁전을 짓는 중인데, 한밤중에 과객이 배낭을 쾅하고 집어던졌으니, 경계 담당 병사들이 주변을 살피러 나왔던 게 당연하기도 합니다. 어둑한 덕분에 차분한 마음과 함께, 앉은 자세 그대로, 숨을 고르고 제 뜻을 전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수련차 산을 지나는 과객이란다.
막걸리, 김밥 펼쳐 산신께 인사 청하고
허기 좀 채워 가려하니 양해 바라마."

뜻이 통했나 봅니다. 녀석들은 제 앞뒤 좌우로 경계비행을 서너 바퀴 돌더니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담배 하나 불붙여 향불 삼아 바닥에 꽂고, 막걸리 한잔 올려 산신께 고하고, 목도 축이고 배도 채워서, 다시 산을 걷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마음 가는 대로 속삭이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나무야, 풀아, 초목들아. 어찌 그리 평화로우냐. 너희들 평화를 내게도 나눠주렴. 난 너희에게 따끈한 거름을 주마"하기도 하고, "어찌 공부하는 재주는 주셔서 이 답답한 길을 가게 하십니까"하기도 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저 아래로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3. 산중묘심

또 산의 밤모습은 흥겨운 구석도 있습니다. 60 센티미터 폭의 좁고 긴 길을 항상 지나게 되는데, 길 양쪽으로 우거진 나뭇가지들과 몸을 스치지 않으면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엔가 이 구간을 지나는데, 제 앞뒤로 밝은 색조의 나방인지 나비인지 엄지 발톱 만한 날벌레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저를 따라옵니다. 달빛에 반사된 날개동작들이 제법 근사합니다. 순간 목과 팔 주위에 간지러운 것들이 들러붙은 느낌이 들기에 거미줄이다 싶었습니다.


헉! "그러면 이 녀석들이 나를?" 하는 생각이 스치기에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천천히 걷다가 빨리 뛰다가 이렇게 두어 번 실험을 해보니 그 녀석들도 같은 박자로 저를 따라옵니다. 그 녀석들은 제가 거미줄을 걷어준다고 생각해 저를 따라오고 있던 모양입니다. 나름대로 저를 이용한 셈이었습니다. 미물들이라고 다 미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날벌레들과 한바탕 놀이를 한 셈이기도 합니다. 그 캄캄한 밤에 나 같은 포유류가 움직이는 틈을 타서, 거미떼들로부터 목숨을 구해보자는 그 녀석들의 신속한 의사결정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지만, 밤의 산길은 신기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비구름이 형성되기 직전인 듯, 안개 바람이 바위와 등성이를 감싸며 훑어 넘어갈 때면 "전설의 고향"처럼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에 따라서는 극히 시적일 정도로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길을 벗 삼아 밤의 정취에 마음을 풀어헤치는 야간산행이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장 아끼는 마음의 소리를 얻었습니다. 원래 마음의 소리에 머물던 것이어서 제목은 없었지만, 산중묘심(山中妙心)이라 칭해봅니다.

"이 놈아.
너 지금 울고 있니?
허. 딱한 녀석이로구나.
네가 살면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 마음먹기 따라서 한 가지는 얻을 게야.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앎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무엇이든 보일 게다.
그때 너는 너의 본모습이라 느끼겠지만,
사실은 나이니라.
내가 만든 모든 것, 내가 보는 모든 것을 네가 보리라.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은 모든 것을 얻음이니라.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네 마음먹기 달린 것임을 잊지 말거라.

허 참 그 녀석 되게 속상하게 하는구나.
옛다, 이 놈아!
건강한 신체라도 가져가거라.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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