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자료, 발췌] 마사 누스바움


출처 1: 철학을 권하다: 삶을 사랑하는 기술 (줄스 에반스 지음. 길벗 2012)

※ 발췌:

( ... ... ) 이번 시간에는 인생의 문제점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하는 스토아 철학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분명 유용하고 건강에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점에 적응해 버려서는 안 되는 영역도 있다. 예컨대, 영아 사망률의 엄청난 감소와 같은 문명의 위대한 발전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강하게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운명론과 엄숙하고 철저한 금욕주의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줄 것이 많다. '스토아 철학자'의 현대적 의미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사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것처럼, 감정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분석은 "서양 철학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절묘하고 타당성이 있다."[주]14 스톼 철학이 인지 행동 치료에 영향을 끼친 덕분에, 나를 비롯해서 수백만 사람들이 감정을 변화시키는 스토아 철학적 아이디어와 기법의 이점을 경험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완전히 냉정하게 거리를 두자는 스토아 철학의 목표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고, 인진 행동 치료처럼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치료법에서 스토아 철학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는 힘들 수도 있다. 그래도 스토아 철학을 통해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감정을 바꿀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내면에서 모든 격정을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목표를 추구하는 철저한 스토아 철학 신봉자들은 극히 드물다. 사실, 오늘날에는 만성적인 정서 장애가 되지 않는 한 이 세상에 대한 감정 반응은 적절하고 유용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좀 더 보편적이다. 대다수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 또한 행복해지는 데 내면적인 미덕만으로 충분하다는 스토아적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애정이 넘치는 가정, 친구들, 괜찮은 집,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직업, 자유로운 사회 등의 외적 요인들도 필요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을 선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정말로 큰 타격을 입는다. 이는 곧 인간선이라는 것이 다치기 쉽다는 얘기다. 불운한 사고를 겪으면 인간은 선량함을 잃을 수 있다. 큰 재앙은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 정신적으로도. 이것이 마사 누스바움이 저서 <선함의 허약성The Fragility of Goodness>에서 주장하는 바다. 물론 누스바움의 주장은 옳다. 가난은 우리의 인격을 파괴할 수 있다. 심각한 정신적 외상은 우리의 인격을 파괴할 수 있다. 모욕, 무시, 전쟁, 끊임없는 잔인성 또한 우리의 인격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인간성의 도덕적 허약함만이 아니라 인간성이 지닌 회복 탄력성, 내면적인 힘, 최악의 상황에 품위 있게 직면하고 저항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자들을 존경한다. 그것이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가 19세기에 쓴 시 <불굴의 영혼Invictus>에 잘 요약되어 있는 태도다. 이 시는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넬슨 만델라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나를 덮고 있는 밤,
온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운 이 밤에,
나는 신들에게 감사한다
무너뜨릴 수 없는 영혼을 주신 데 대해.

포악한 환경의 마수에 붙들려도
나는 움찔하거나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몽둥이로 내려치는 위협 속에서도
내 머리는 피투성이가 될지언정 굽히지는 않는다.

이 분노와 눈물의 땅 너머로는
어둠의 공포만이 보이지만,
오랜 세월의 위협에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문이 아무리 좁더라도,
그 딜이 형벌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상관없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고
내가 내 영혼의 선장이다.


출처 2: 서사적 상상력: 인문학적 페미니즘의 가능성(임옥희 지음. 탈경계 인문학. 5권 3호 2012.10. 5-29.

※ 발췌:

( ... ) 앞서 누스바움이 언급했다시피 혐오감은 인간이 자신의 허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때 나온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향연>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영원불명의 사랑이 아니라 알키비아데스가 경험한 사랑의 허약성에 주목한다.[주20: The Fragility of Goodness. 6장 "The speech of Alcibiades: a reading of the Symposium"] ( ... ) 누스바움은 인간의 허약성, 바로 그 점을 인정할 때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을 재해석한다.

( ... ... ) 누스바움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허약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보편성에 바탕하고 있는 자유로운 이성 주체다. 포스트 이론이 이성의 해체를 능사로 알고 있지만, 그녀는 다시 인간의 보편성에 기대어 인간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누스바움의 인문학적 페미니즘은 이미 실험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시민적 자아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그녀가 주장하는 품위 있고, 교양 있는 보편 주체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백인 남성 부르주아의 이상이라는 점을 누누이 지적해 왔다.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가 지적했다시피 '그녀의 입장은 유럽의 고전적 인문주의, 특히 그리스 고전 고대의 교육, 문화, 사회적 이상을 전유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방식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녀의 저서 <선의 허약성(The Fragility of Goodness)>은 9.11 이후 신자유주의 미국 학문 시장에서 마치 하나의 대안처럼 읽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바로 그런 이상을 버릴 것이 아니라 젠더를 넘어서 그런 이상적 자아를 재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페미니즘의 편협성은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스바움의 말을 번역하자면 열정과 사람을 회복하고, 탈이해 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인문학적인 페미니즘의 열정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사랑하는 동물이다. 섬처럼 고독하고 자유ㅗ운 개인들이 세계와 조우하고, 세계를 발명하고, 세계에 책임지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자신을 연다는 것은 자신을 취약성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취약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사랑을 바탕으로--타인들과 함께 산출한 세계만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며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 ... ... )


출처 3: The Philosopher of Feelings (Rachel Aviv, The New Yorker, Ju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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