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4일 수요일

[발췌: 정희진 선생, 강연] "사랑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에요"


출처: 경향신문, 2015년 4월 29일.

여성학에 깊이 관련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아주 빨라서인지 잘 이해하지 못할 부분들이 있어서 언제 다시 읽어보려고 급하게 발췌식으로 메모해 둔다.

* * * 

( ... ) 굳이 말한다면, 사랑에서의 성공은 상호 성장을 의미하는데, 매일 매력을 갱신하는 사람은 드물죠. ( ... ) 게다가 동시에 두 사람이 일신우일신, 발전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오래가는 게 사랑이 '잘 된' 걸까요? 오래가는 사랑도 없어요. 회자정리(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를 거스르는 관계는 없습니다. 우선, 누구나 죽잖아요?

그래서 전, 사랑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랑이 뭐가 새삼스럽습니까. 다 안 되잖아요. 그냥 욕망이 있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사랑이라는 제도를 작동시키죠.

사랑은 일단 '제도'입니다. 제도에는 규범이 있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또한 강제가 있고요. '이렇게 하면 된다, 안 된다'. 그리고 구속력이 있습니다. 둘째로 사랑에는 '정상'과 '비정상'이 있습니다. ( ... ) 세 번째로 사랑에는 '윤리학'이 있습니다. 사랑과 존중, 폭력, 착취의 관계죠.

( ... ) 비정상은 '변태'가 아니라 제도 밖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 ... )

( ... ) 사실, 사랑의 범위와, 실제 행위는 엄청나게 넓지만 규범적으로 용인하는 사랑은 매우 협소합니다. 제도 밖의 사람이 힘들면서도 열정적인 이유는 규범을 거스르는 용기와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 ... )

( ... ) 연애 중인 많은 젊은이들이 '밀당'에 대해 관심이 많죠. 저는 밀당을 아주 싫어합니다. 일단, 밀당의 전제는, 더 사랑하는 쪽이 더 헌신하는 쪽이 약자라는 거죠. 연애에서조차 권력자가 되고 싶은 거죠. 연애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밀당이 있잖아요. ( ... ) 저는 밀당 대신 협상을 제안하고 싶어요. 제가 밀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노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피곤해요. ( ... )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밀당에 힘을 쏟는 대신에 그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자는 거죠. 밀당은 굉장한 여성성을 필요로 해요. 여자들이 대체로 잘하죠. 밀당의 핵심은 이중성과 모순성인데요, 왜 여성이 강하냐면 ( ... ) 여성의 성역할 노동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 ... ... )

저는 '밀당을 잘 해야 연애를 잘한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명언이 있어요. '남자들이 말이 없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화제가 없어서 혹은 무식해서다'. 말 많은 남자가 훨씬 낫습니다. 말 없는 남자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위험한 남자입니다. 성폭력/가정폭력 상담을 많이 하다 보니 '누가 안 때릴 남자냐'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그건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떤 남자랑 식당을 갔는데 종업원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감은 잡히죠. 제가 맨날 주장하는 게 '사랑'보다는 '존중'이거든요. 존중이 훨씬 어려워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밀당엔 더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라는 전제가 있어요. 실연의 고통을 인격이 성장이나 예술로 승화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사랑한 사람과 사랑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성장할 것 같아요? 사랑한 사랑이 성장하죠. 모든 문학 작품은 '그가 나를 떠났도다, 내가 남겨졌다' 이렇게 남겨진 사람의 시점이죠. '내가 너를 버렸도다' 이런 관점으로 쓰인 작품은 전 세계에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은 받은 사람은 언어가 없어요,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언어를 가질 가능성이 높죠.

( ... ... )

( ... ... )

이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

1. 사랑은 권력 관계, 즉 힘의 관계다. 이 얘기는 사랑은 정치적 관계이고 정치적 의제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인권,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거지요. 사랑 나쁘게(?) 하는 남성이나 여성은, 윤리의식이 낮은 사람이고 인권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권력을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은 곧 '자원 혹은 매력의 교환'을 의미합니다. 무조건적으로 눈이 먼다는 건, 신화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 배타적 1:1 사랑은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입니다. 생긴 지 200년밖에 안 됐어요. 개인이란 개념이 생기면서 연애라는 개념도 생겼죠. 사랑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자원과 매력이 성별화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이 때문에 많은 남성과 여성이 고통을 받습니다. 보통 남성의 매력은 돈과 짛식, 여성의 매력은 외모라고 여겨지죠. ( ... ) 그만큼 사람의 성립 자체가 사회적 행위라는 겁니다.

제가 사랑은 '자원'의 교환이라고 말했는데 자원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캐릭터, 인격, 여러 가지 그 사람만의 고유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유성은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고요,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고유성은 이것(남자는 돈과 지식, 여자는 외모)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상대에게 대체되지 않는 고유성을 원하지만 그런 사랑 주실 분은 신밖에 없어요. '법 앞에 평등', '신 앞에 평등' 이게 그런 뜻이거든요. 내가 어떤 모습을 가져도 사랑한다? ( ... ... ) 제 얘기는, 우리가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자체를 당연시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상대방한테 사랑이나 매력을 느낄때, 그건 '순수한' 감정이 아니에요. 사랑이 순순하다고만 생각하면 사랑의 어려움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순수한 게 원래 없는데, 특히 사랑이 제일 순수하지 않아요. 젊은 이성애의 경우 더욱 더 그래요. ( ... ... ) 사랑이 '힘의 관계'라고 얘기하는 건 그것에 대한 성찰을 해보자는 뜻에서입니다. 나는 이 사랑을 순수하게 생각하는데 '과연 상대가 10살 많아도 좋아했을까'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유한 그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 조건의 산물입니다.

2. 인간의 인격은 사랑받을 때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태도는 늘 고귀합니다. 그런데, 사랑받을 때는 어떤가요. 특히 내가 사랑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나를 사랑할 때 태도가 중요합니다. ( ... ... ) 제가 사랑은 권력 관계라고 강조했지만, 이건 새삼스러운 상투적인 말이죠. 다들 사랑받으면 권력을 부리잖아요.

3. 자기 모멸감으로만 안 끝나도 성공한 사랑입니다.

상처가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나요. 문제는 상처로 계속 갖고 갈 것이냐 아니면 성숙의 자원으로 삼을 것이냐 입니다. ( ... ... )

제 생각에는요, 그래도 상대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 정도면, 헤어져도 '대성공'이라는 겁니다. 자기 모욕만으로 끝나지 않아도 성공한 사랑이에요. 특히 여성에게 이성애는 동일시 감정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가 괜찮았다면 상처가 덜해요. 그런데 '거지 같은 남자'였다면,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상처가 깊죠. 저런 인간을 사랑하다니 ... 수치심이 남죠. 실연의 추억이냐, 악몽이냐. 그게 나한테만 달린 문제가 아니므로 행운을 빌어야죠.

<질의응답>

질문: 강의 초반에 헤어질 때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헤어질 때 성숙하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걸까요?

답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두 가지. 끝났으면 끝났다고 얘기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취할 게 있으니까 그냥 놔두는 사람이 있어요. 상대를 희망 고문과 미스터리로 고민하게 하는 게 가장 저질입니다. 또 하나는 좋은 이미지로 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쁜 여자, 나쁜 남자 되기 싫어서 질질 끄는 경우 있잖아요. 이별은 정산입니다.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는데, 이익만 남기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죠. 이성 관계에서 좋은 인상으로만 남으려는 것, 이것은 인간의 가장 추잡한 욕망입니다. 저는 의사표현을 분명히 할 것,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망을 버릴 것, 이렇게 두 가지 꼽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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