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말과 말뜻, 말의 활용과 용어의 선택] 물가 vs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일 년 전 ‘물가가 오르는 사태’를 가리키는 용어, 물가상승(혹은 물가 <띄고> 상승)과 인플레이션에 대해 적은 이 글 중 일부는 《새뮤얼슨의 경제학》하권의 역자 주로 반영되었다. 이 글을 적은 뒤, 이 용어 선택의 문제로 편집부와 한참 논쟁 중이던 그즈음에 전자우편으로만 적은 내 생각 몇 가지를 아래에 추려본다.

* * *
1.

적지 않은 대화의 사례에서 “<개념적>인 의미에서 인플레이션이란 말을 쓰자”라고 하는 발화에 접한다. 그런데 그 <개념>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물가가 오르는 사태’와 다른 내용의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말 자체를 중시하는 ‘외래어 존중자들’에게 ‘Monetary policy increasingly emphasizes low and steady inflation as a key goal’ 등과 같은 문장은 물론이요, 도대체 물가상승 이외에 담을 수 있는 ‘인플레이션’의 그 <개념>을 무엇이라고 주장하기에 <개념적> 표현으로서 인플레이션을 (주)용어를 쓰자고 하는 것인지를 <논증하라>고 하면 그 말 자체의 의미에서 벗어난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경우를 수없이 본다. 내가 묻는 질문은 인플레이션이라는 말(기표)에 물가상승 이외의 말뜻(기의)을 명시적으로 담을 근거가 무엇인지 <논증하라>는 것이다.

   영어에는 ‘가격(price)’이라는 말(기표)과 구분되는 ‘물가’라는 말(기표)이 단독어(독립된 낱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가를 표현하는 정확한 영어 표현은 ‘general(혹은 overall) price level’이다. 영어에서는 이 세 낱말(general, price, level)을 동원해서 표현해야만 우리말의 ‘물가’라는 말뜻(기의)이 정확히 묘사된다. 영어에는 이 세 낱말을 조합한 뜻의 통계적 관행어로 ‘price index(가격지수 혹은 물가지수)’가 존재할 뿐, ‘물가’라는 말뜻(기의)을 담을 단독어 기표가 없다.

   우리말에는 ‘가격(price)’이란 기표 외에 ‘일반적 가격(general price)’을 지칭하는 ‘물가’라는 기표가 단독어로 존재한다. 영어 낱말 ‘inflation’을 ‘rise in general price level’이라고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태도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inflation’은  우리말로 표현해 <물가 (띄어 쓰고) 상승>으로 적어 마땅하고 충분하다. 다른 낱말과의 조합─예컨대 ‘고속 물가상승’, ’극한 물가상승’ 등의 용례─를 고려하여 ‘물가상승’이라고 붙여쓰는 게 텍스트 전개 상 효율적이라고 볼 수 있다.

2.

영어를 비롯한 구미 언어권에서는 ‘물가’를 가리키는 단독어 기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서양 사람들이 ‘inflation’이란 용어를 여러 가지 문맥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활용할 때 이 용어 자체, ‘inflation’의 말뜻(즉, 물가 상승)에서 이탈해서 그냥 '물가'를 뜻하며 쓸 때도 왕왕 있다─혹은 꽤나 많다─고 볼 수 있다. 서양 학자나 언론인들이  “inflation is rising”이라고 표현할 때 이게 무얼 뜻한다고 보는가? 두 가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이 증후군처럼 발견된다. 즉, ‘inflation is rising’이라고 말하면서,
  • (1) ‘prices are rising(물가가 오른다)’ 을 뜻하는 표현으로 씀.
  • (2) ‘prices are accelerating(물가가 가속적으로 오른다, 즉 물가상승률이 오른다)’을 뜻하는 표현으로 씀.
위에 굵은 청색체로 표시한 용어 정의를 준수한다면 이 두 가지 의미 중 (2)의 의미로만 <inflation is rising>을 써야 하지만, 영어 사용자들은 정확한 기준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문맥을 통해 정확한 의미를 전달한다. 《새뮤얼슨의 경제학》의 번역에서도 ‘inflation is rising’‘prices are rising’의 뜻으로 번역한 문맥이 여러 군데 존재한다.

   (1)의 용례처럼 ‘inflation is rising’이라고 말하면서 ‘prices are rising’을 뜻할 경우, ‘inflation’은 ‘물가 상승’도 아니고 그냥 ‘물가’를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 이 같은 서양 사람들의 용어 활용을 보면 ‘inflation’이 문맥에 따라 다의적으로 쓰인다는 얘기인데, 특별한 개념어로서 복합적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inflation’이라는 기표를 그들 나름대로 다양하게─우리말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확하게─쓰는 관행일 뿐이다.

   이와 같은 그들의 언어 사용 관행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말과 다르게 가격과 구분되는 단독어로서 물가라는 말뜻의 기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가’라는 단독어 기표가 존재하지 않는데, ‘물가 상승’을 뜻하는 ‘inflation’이란 기표가 그에 앞서 폭넓게 활용되어 존재해 왔기 때문에 구미 언어권의 용어 사용 관행에서 ‘inflation’의 말뜻이 ‘물가 상승’도 아니고 그냥 ‘물가’가 되는 매우 중의적이고 모호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복수로 쓰는 ‘prices’가 가격과 구분되는 물가라고 봐야 할 때도 있지만, ‘prices’는 ‘여러 가지 개별 가격’을 뜻하는 문맥도 있고 ‘일반적인 가격(즉, 물가)’를 뜻하는 문맥도 있어서 이 복수명사 역시 중의적이고,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3.

‘inflation is rising’와 같은 말이 위 (1)과 (2) 둘 다를 뜻할 수 있으니 글쓴이가 그 모호함의 위험을 분명히 자각하면서 (2)의 의미를 전달할 경우는 다음 (3)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 (3) ‘inflation is accelerating.’
그런데 이 문장 (3)은 결국 위의 문장 (2), ‘prices are accelerating’과 같은 뜻이니, 이  용례에서도 <inflation = 물가>를 뜻하게 된다.

   이처럼 중의적이고 모호한 언어 사용 관행은 영어 사용자들이 복합어를 만들어 쓰는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흔히 NAIRU라는 약자로 통하는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라는 용어다. 이 용어를 절을 활용해 풀면,
  • (4) ‘rate of unemployment which is not accelerating inflation’ 혹은
  • (4') ‘rate of unemployment under which inflation is not accelerating’이 된다.
인플레이션이란 외래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표현하면 이 용어는 <인플레이션을 가속시키지 않는 실업률>이란 뜻이다. 위 (4)와 (4')의 풀어쓰기에서 보듯이 이 복합어를 조합하는 논리에는 위 문장 (3)의 활용이 숨어 있다. 의미상 이것은 <물가를 가속시키지 않는 실업률>과 정확하게 똑같다. 따라서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라는 외국어 용어를 번역할 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조준한다면 <물가 비가속적 실업률>로 충분하며 ‘인플레이션’이란 말 자체를 쓸 이유가 없다. 《새뮤얼슨의 경제학》에서는 바로 이 번역어를 택하고 ‘인플레이션’이란 말을 버렸다. 일찍이 조지 오웰은 “의미가 단어를 선택하게 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주장에 누구나 동의하지 않는가?

4. 

서양의 언어가 이렇게 말(기표)과 말뜻(기의)을 활용하는 문맥에서 중의적인 것은 그들 나름의 관행이고 그들에게는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를 도착어로 삼아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되살리려고 할 때, 물가라는 말을 활용하면 전달해야 할 사태를 얼마든지 쉬운 한국어로 묘사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 ‘물가 상승’이나 ‘물가 하락’처럼 명사 어구를 활용할 수 있고,
  • ‘물가가 오른다’, ‘물가가 떨어진다’처럼 절을 활용할 수도 있고, 
  • ‘물가가 가속적으로 오른다(혹은 물가상승률이 오른다)’, ‘물가는 오르지만 물가상승률이 떨어진다’와 같은 식의 쉬운 한국어로 ‘inflation is positive and accelerates’, ‘inflation is positive and decelerates’와 같은 표현이 뜻하는 사태를 충분히 묘사할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이유에서 쓰는 기표를 그대로 수입해 쓰는 고정관념 때문에 본래 있는 한국어로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법을 버릴 이유는 없다. 더구나 모호하지 않고 쉽게 전달되는 한국어 용어법을 활용할수록 강의실 안뿐만이 아니라 강의실 밖의 일반 독자에게 지식이 더욱 수월하게 퍼져나가는 자산을 만드는 일이 된다.

5. ( ... ....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