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3권 “세계의 시간”
페르낭 브로델 지음(주경철 옮김), 1997년 까치 펴냄.
■ 발췌: 3권(역서 3-1권)의 서론 11쪽~
1.
이 책의 마지막 권인 3권은 일종의 내기와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내기와 주장이 이 권의 방향을 잡아주고 있다. 이 권의 제목은 볼프람 에버하르트의 훌륭한 표현을 내 나름대로 취하여 「세계의 시간」이라고 했다. 이 제목은 내가 실제로 다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는 있지만 여하튼 훌륭한 제목이다.
2.
내기를 한다는 것은 연대기적인 전개와 다양한 시간성 속에서 포착되는 역사에 대해서 최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역사의 흐름과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봄으로써 앞의 두 권에서 이미 수행한 연구의 결과를 확인하거나 파기하는 확실한 실험을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할 때 이런 내기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뒤에 깔려 있는 셈이다: 즉 역사는 하나의 설명(...)으로도 이용될 수 있고, 하나의 증명(..)으로도 이용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대단히 불완전하면서 동시에 도저히 다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 남아 있는 사료로부터 세계사의 타당한 도식을 제시하려는 이 시도는 더욱 담대한 주장이 될 것이다.
3.
이것이 이 권의 구체적인 구상이다. 독자들은 이 권에서 많은 이야기, 묘사, 이미지, 발전, 급격한 변화, 규칙성 등을 보게 될 테지만, 다만 여기에서 내가 시종일관 주의하려고 했던 점은 하나의 선, 하나의 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내세우기 위하여 너무 길게 이야기한다든지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겠다는 점이었다. 오로지 내가 추구했던 것은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증명하기 위하여 우선 나 자신이 보아야 하고 또 남들로 하여금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나의 연구가 정당화되고 더 나아가서 역사가의 직무가 정당화되는 것이 이런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이 일을 꾸준히 수행했다.
4.
그렇지만 세계사에는 가장 끈질긴 자, 혹은 가장 우직한 자라도 용기를 잃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강변이 없는 강, 시작도 끝도 없는 강과 같다. 아니 이 비유도 적당치 않은 듟하다. 세계사란 하나의 강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강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역사가들은 이와 같은 과잉에 대해서 이미 익숙해 있다. 그들은 이 과잉을 여러 영역(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으로 나누어서 단순화시킨다. 특히 그들은 경제학자들로부터 시간이란 여러 개의 시간성으로 나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길들여지고 결국 조종 가능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첫째로, 장기지속 또는 최장기지속의 시간성, 둘째로 어느 정도 느린 콩종튀르, 마지막으로 빠른 또는 순간적인 일탈 같은 것이 있다; 이중에서 마지막으로 든 가장 짧은 시간성이 대체로 가장 파악하기 쉽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계사를 단순화시키고 조직화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수단들을 얻게 되었다. 그것들은 세계의 수준에서 영위되는 삶의 시간, 즉 ^세계의 시간^을 추출한다. 그러나 그 세계의 시간이란 인가의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외에 속하는 이 시간은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단지 일부의 공간과 현실들을 지배할 따름이다. 그외의 다른 공간과 현실들은 이것에서 벗어나 있고 이것에 대하여 낯선 채로 남아 있다.
5.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인도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대륙이다. 이제 여기에 네 개의 선을 그려보자: 코로만델 해안선, 말라바르 해안선, 수라트 에서 델리를 잇는 축, 델리에서 갠지스 델타를 잇는 축이 그것들이다. 그러면 이 사각형 안에 인도가 들어가게 된다.[주2] 이 사각형 내에서 해안지역만이 진정으로 세계의 시간 속에서 살며 지구 전체의 교역과 리듬을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다른 곳과의 격차와 다른 곳으로부터의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시간^은 우선적으로 그와 같은 활기 있는 선분들만을 활성시킨다. 그러면 사각형 내부로도 그 영향이 미칠까? 물론 여기저기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들은 그런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인도라는 “대륙”의 규모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상의 다른 모든 지역, 심지어 산업혁명기의 영국 제도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는 일이다. {세계사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역, 침묵의 지역, 조용한 무지의 지역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나폴리] 왕국 안에는, 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사모예드 족이 문명화되고 세련된 것으로 보이는 그런 지역들이 존재한다”[주3]라고 경제학자 안토니오 제노베시는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하려는 작업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빈 공간들ㅡ사실 이 공간들은 승리한 역사의 바깥에 위치한 지역들로서 이 책의 1권에서 주로 다루어졌다ㅡ이 수없이 많이 깔려 있어서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게 된 세계지도 앞에 서 있다.
6.
^세계의 시간^은 따라서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 상층구조는 밑의 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것의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의 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 세계의 시간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7.
원칙적으로 3권은 한 영역의 역사, 즉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역사를 우선적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 마지막 권에서 내가 파악해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15-18세기의 세계^경제^사이다. 그러므로 나의 작업은 단순화될 것이다. 또는 그래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수십여 종의 탁월한 일반 경제사 책들을 알고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간략하다는 장점이 있고[주4] 또 어떤 것들은 참고자료들이 방대하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이용한 것은 1928-1929년에 두 권으로 발간된 요제프 쿨리셔이ㅡ 「일반 경제사(Allegmeine Wirtschaftsgeschichte)」[주5]이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가장 믿을 만한 최고의 참고서이다. 그외에 내가 이용한 책으로는 베르너 좀바르트의 기념비적 저작 「근대 자본주의(Der moderne Kapialismus)」(마지막 판인 1928년판)가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양의 독서와 해석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일반 저작들은 한결같이 유럽이라는 틀 속에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역사는 전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비교를 통하여 추론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프리드리히 노빌리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모든 역사는 필연적으로 세계사이다.”[주6] 실제로 세계경제사는 유럽에만 한정된 경제사보다 더 명료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더 단순화시킬 수 있을까?
8.
적어도 50년대 이래 경제학자들[주7]이나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의 역사학자들은 경제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영역이라든가 경제사가 다른 것과 분리하여 연구될 수 있는 한정된 영역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오늘날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분명히 동의한다. 위톨드 쿨라는 “발전된 자본주의에서[내가 여기에 덧붙여 이야기한다면 초기 단계의 자본주의에서도] 독자적인 경제가 존재한다는 이론은 순전히 학자들간의 약속에 불과한 것”[주8]이라고 보았다. 호세 젠틸 다 실바에 의하면 “역사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특히 경제활동은 정치 및 정치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신념들과 분리될 수 없으며, 또 경제활동을 위치짓는 여러 가능성 혹은 제약과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주9] 사회 족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경제인(homo economicus)일까? 로스토우[주10]은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디외르디 루카치[주11]는 경제적인 문제가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다른 문제들과 정말로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레이먼드 퍼스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들은 “경제적 측명, 사회적 측면, 문화적 측면” 그리고 당연히 정치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주12] 요제프 슘페터는 경제사가 “순전히 경제적인 것일 수만은 없다”[주13]고 이야기 했고 민족학자인 장 푸아리에는 “경제학자가 경제적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이상의 것을 보아야 한다”[주14]고 이야기했다. 오늘날의 한 경제학자는 “정치경제학과 다른 사회과학들의 단절이란 받아들일 수 없다”[주15]고 했는데, 이전에 장-바티스트 세 역시 이미 이와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한 바 있다(1828): “정치경제학은 물질적인 재화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체계 전체와 사회 내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주16]
9.
세계경제사란 따라서 세계의 전체사이되, 그것을 경제라는 독특한 전망대에서 바라본 역사이다. 그런데 경제라는 전망대를 선택하든 아니면 그외의 다른 어떤 전망대를 선택하든 간에 그것은 사전에 어느 한 일원적인 설명에 우위권을 준 것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나 역시 그 위험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련의 경제적 사실들에 우위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아무리 조심해서 그 경제적 사실들을 통제하고 제자리를 잡아주며 또 그것을 넘어서려고 해도 어떻게 우리가 그 교묘하게 스며드는 “경제주의”와 사적 유물론이라는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유사(流沙)를 지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10. (...)
11. (...)
12.
우선 나의 손전등부터 불을 밝혀야 했다. 그래서 이론적인 첫 번째 장인 ^공간과 시간의 분할^에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경제의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경제와 함께 이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 가지는) 정치, 문화, 사회의 전후좌우 혹은 위아래에서의 경제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려고 했다.
13.
그 다음 2장에서 6장까지의 여러 장들에서는 시간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제부터 시간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심지어 유일한 적수이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장기지속^[주17]에 의존했다. 이것은 분명히 주마간산 격일 수밖에 없으므로 에피소드들과 단기간의 현실들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자크 쾨르의 일생이라든가 거부 야코브 푸거의 초상, 혹은 로 체제에 대한 진부한 설명 등을 다시 접하는 따위의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접에서는 분명히 빈틈투성이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달리 간략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14.
훌륭한 전통적 방식에 따라서 나는 ^세계의 시간^을 여러 개의 긴 시대로 나누었다. 그것은 유럽이 차례로 겪은 경험에 따른 구분이다. 두 개의 장(2장 베네치아, 3장 암스테르담)에서는 ^도시가 지배하는 경제^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전국시장^이라는 제목의 4장에서는 18세기의 국민경제의 발전을 연구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영국을 주요 대상으로 할 것이다. ^세계와 유럽: 지배와 저항^이라는 제목의 5장에서는 소위 계몽의 세기라고 부르던 시대의 전 세계를 차례로 일주할 것이다. 마지막 6장인 ^산업혁명과 성장^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기원이 되는 거대한 단절을 연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결론은 상당히 긴 분량으로서 거의 하나의 독립된 장에 가깝낟.
15.
우리가 제법 자세히 그리고 여유 있게 살펴볼, 이렇게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서 이 책의 이전 권들에서 행했던 분석들이 확인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슘페터 말고도) 다른 사회과학 전문가들 역시 그처럼 역사 속에서 인식과 탐구의 탁월한 수단을 발견했으면 한다. 현재의 절반 이상은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과거의 먹이가 아닐까? 또 과거는 그 규칙성, 차별성 및 유사성을 통해서 현재를 진지하게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열쇠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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