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2일 금요일

발췌: 홉스봄의 역사론 (10장, 13장)

도서명: 역사론
지은이: 에릭 홉스봄

10장. 역사가는 마르크스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234-236쪽:

(...) [역사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두드러진 것이어서 마르크스 스스로 자신이 독창적으로 처음 해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성과마저 그의 업적으로 돌려질 정도였다. 역사적 유물론은 관습적으로, 때로는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서도 ‘경제 결정론’으로 묘사되었다. 

{경제 결정론이라는 용어를 부인하는 것과는 별도로, 또한 마르크스는 자신이 역사 발전의 경제적 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 또는 인간의 역사를 일련의 사회-경제 체제의 역사로 서술했던 최초의 사람이라는 점을 확실히 부인했다.} 
아마도 다음 문장과 같은 뜻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물론 이 독자의 추측일 뿐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제결정론이라는 용어를 부인하는 문제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마르크스는 자신이 역사 발전에서 경제적 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도 아니요, 인간의 역사를 일련의 사회경제 체제의 역사로 서술했던 최초의 사람도 아니라고 확실하게 부인했다.”
또 계급과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을 역사학에 최초로 도입했다는 점도 확실히 부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인은 헛일이었다. '이탈리아 백과사전' 엔 마르크스가 계급투쟁 개념을 역사학에 도입했다고 쓰여 있다. [이상 하나의 문단]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이 프랑스의 지적 생활 속으로 매우 늦게 천천히 침투되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최소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는 비교적 적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1920년대에는 상당한 정도로 프랑스 혁명사라는 매우 정치적인 분야에 침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장 조레스와 조르주 르페브르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프랑스의 사상적 전통에서 나온 이념과 결합하여), 프랑스 역사학자들의 방향 재정립을 이끈 것은 아날 학파였다.}
아마도 다음 문장과 같은 흐름의 메시지를 전하는 글일지도 모른다(물론 이 독자의 추측일 뿐이고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1920년대에 프랑스 혁명사라는 매우 정치적인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침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장 조레스와 조르주 르페브르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프랑스의 사상적 전통에서 나온 이념과 결합하여)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방향을 재정립하도록 이끈 것은 아날 학파였다.”
아날 학파는 역사의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은 일반적으로 아주 강해서,'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는 페르낭 브로델도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쓸 정도였다.)  (...) [이상 하나의 문단]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역사 서술의 현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정확한 기여를 결정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역사가들에게 끼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강력한 일부 견해들과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마르크스 사상이 고무했던 운동과 마르크스와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적이거나 또는 가장 영향력 있는 형태로 마르크스의 성숙한 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영향력을 "속류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 이제 분석의 주된 문제는 역사 분석에서 속류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구성 요소를 분리하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속류 마르크스주의'가 다음의 주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1) ‘경제적 역사 해석’은ㅡ슈탐러(Rudolf Stammler)의 표현을 사용하면ㅡ“경제적 요소는 근본 요소[이며]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은 경제적 요소에 종속된다”는 신념이다. 특히 이제까지 경제 문제들과 별 관련을 맺지 않았다고 간주되었던 현상들까지 경제적 요소에 종속되었다. {이것은 다음의 모델과 겹쳤다.[이 같은 신념은 다음 모델과 서로 맞물리게 되었다.]}

(2) (이념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토대와 상부 구조’의 모델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고, 그리고 라브리올라(Antonio Labriola) 같은 몇몇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고도로 세련된 관찰에도 불구하고, 대개 이 모델은 ‘경제적 토대’와 ‘상부 구조’ 사이의 지배와 의존이라는 단순한 관계로 해석되어 왔다. 이 관계는 대부분 ‘계급적 이해와 계급투쟁’에 의해 매개되었다.
“(...) 대개 토대와 상부구조 모델은 ‘경제적 토대’와 ‘상부 구조’ 사이의 지배와 의존이라는 단순한 관계로 해석되었고, 대부분 ‘계급적 이해와 계급투쟁’이 그러한 관계를 매개하는 거라고 이해되었다.”
(3) ‘계급적 이해와 계급투쟁.’ {사람들은 수많은 속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공산당 선언'의 첫 쪽의 "이제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서술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첫 문장 이상을 인지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4) ‘역사 법칙과 역사적 필연성.’ 인간 사회가 역사 속에서 체계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전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올바른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래서 장기적인 운동에 대한 일반화의 수준에서 우연적인 것은 이러한 발전으로부터 대부분 배제되었다. 초기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이 역사 속의 개인이나 우연의 역할 같은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한편 이러한 발전은 엄격하게 부과된 규칙성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대부분 그렇게 해석되었다. 일례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회-경제 구성체들을 들 수 있으며, 역사에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되는 기계적 결정론도 들 수 있다.

(5) 특별한 역사적 탐구의 주제가 마르크스 자신의 관심으로부터, 예를 들면 자본주의적 발전과 산업화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왔지만, 때로 무심결에 해버린 말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무심결에 해버린 말에서 역사적 탐구의 주제가 비롯되기도 했다”는 뜻일까?]

(6) 특별한 탐구의 주제가 마르크스로부터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과 연결된 운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예를 들어 억압받는 계급(농민, 노동자)에 대한 선동이나 혁명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7) 역사 서술의 본성과 한계에 대한 다양한 관찰들은 주로 항목(2)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진리를 편견 없이 추구한다고 주장하면서 오로지 사실이 본래 어떠했는가를 확증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던 역사가들의 동기와 방법론을 설명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잘해야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견해에서 일부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견해들과 동시대의 비마르크스주의적(이를테면 진화론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견해가 융합되었다는 사실도 명확해질 것이다. 이러한 항목들의 일부는 전혀 마르크스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대중 운동, 노동 계급 운동, 혁명 운동과 관련된 역사가들이 자연스럽게 발전시켰을, 그리고 마르크스의 개입이 없었어도 발전했을 사회 투쟁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초기 사례들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을 대표한다는 사실도 명백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 이러한 요소의 선택이 임의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앞의 간략한 개관 중 (1)부터 (4)까지의 항목과 항목 (7)은 전통적 역사학이라는 요새의 주요 부분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안되어 집중적으로 장치된 지적 폭발물이었다. 그 항목들은 그 자체로도 어마어마하게 강력했다. 아마도 복잡한 역사적 유물론 해석보다도 더 강력했을 것이고 (...)

239-241쪽:

우리가 역사 서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라고 간주하는 것의 대부분은 확실히 앞에서 설명한 의미에서 보면 속류 마르크스주의였다.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역사 속의 경제적, 사회적 요소를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강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몇몇 나라(이를테면 최근까지 서독과 미국)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계속 확고한 지반을 쌓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이 분명히 주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과 특별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강조해야만 한다.

[역사학과 사회과학 일반에 주된 충격을 미쳤던 마르크스 자신의 견해를 꼽자면 그것은 분명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시각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수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수준들이 서로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고 이해하는 모델이다.] 상호 작용하는 수준이나 양식에 대해 마르크스 자신이 상정한 위계질서를 (...) 가치 있는 일반 모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조차도 그것을 가치 있는 기여로서 매우 환영했다. (,...) 마르크스의 모델이 검토되어야 한다는 사실, 특히 [마르크스의 모델을 겨냥하여 일반적인 역사 검증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옳다. 불충분하거나 오해하기 쉬운 증거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모델 일부를 폐기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그 예로, 동방 사회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분야에서 자신의 심원한 통찰력을 잘못된 가정, 즉 몇몇 동방 사회의 내적 안정성에 대한 잘못된 가정과 결합시켰다. 오늘날 역사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요한 가치는 사회 일반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역사적 서술에 있다는 사실이 이 글이 주장하는 바이다.

이제까지 가장 효과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그리고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역사학을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변환시키는 일반적인 경향의 중요한 일부이다. (...) 과거의 이러한 경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한 기여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 즉 사회과학의 연구를 자연과학의 연구와 일치시키거나 인간적인 것에 대한 연구를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연구와 일치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것은 사회를 인간관계의 체계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관계는 생산과 재생산을 위해 맺어진 관계로서 마르크스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체계들의 구조와 기능을 (비인간적이고 인간적인)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내부적 관계 속에서 자신들을 유지하려는 실체로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학을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변환시키는 일반적인 경향에 마르크스주의가 기여한 커다란 부분은] (...)  사회를 인간관계의 체계로 인식하는 것이며, 인간관계를 생산과 재생산을 위해 맺어진 관계라고 이해하는 시각이다. 마르크스에게 가장 근본적인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인간간계의 체계를 구성하는 구조와 기능을 (비인간적이고 인간적인)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분석함과 동시에,  체계 자체가 자신의 내적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실체라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구조기능주의 사회 이론 중에서 최고라고 주장되지만, 결코 구조기능주의 사회 이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 대다수 구조기능주의 사회 이론과 다르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현상의 ('토대'와 '상부 구조' 같은) 위계질서를 주장하고, 둘째,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체제의 경향에 반작용하는 내적 긴장('모순')이 사회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


13장. 영국 역사학과 아날 학파


(...) '아날'과 '아날' 집단이 (...) 영국에 더 크고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적어도 자극을 주었던 데에는 더 구체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전후 프랑스는 우리가 근대 세계로의 발전에서 중요한 시기, 즉 16-17세기의 경제라고 알고 있는 것을(월러스틴은 이에 대한 첫 번째 연구자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유일한 나라로 보였다. (...) 1950년대 초 모리스 도브와 스위지(Paul Sweezy)의 유명한 논쟁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15세기와 18세기 사이 어디에 서 있었는가, 즉 이 시기가 근대 세계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가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을 탐구하면서 다른 관점에서ㅡ브로델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걸 강조하게 되는데, 그가 날 용서해 주길 바란다ㅡ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프랑스 학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19세기를 주로 연구했던 나도 17세기 위기론으로 잠시 관심을 옮겼고, 당시 내가 썼던 논문을 뒤돌아보면 '아날', '아날'에 실린 논문과 브로델, 뫼브레(J. Meuvret) 같은 '아날' 출신의 학자들을 {꽤?}왜 많이 참조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참조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확실히, 당시 그 문제가 토론되었을 때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가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프랑스 학자들은 그간 줄곧 다루어오던 문제였던 것이다. 트레버로퍼는 옳았다. 프랑스는 그 문제를 줄곧 다루어왔고, 그리고 트레버로퍼의 언급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단지 영국 역사학계의 한 학파에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학파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왜 그랬을까? 다시 한번 회고해 보면, 16-17세기가 근대 세계 발전에서 중대한 시기였음을 알 수 있지만, 왜 우리가 이 단계에 관심을 집중했는가는 여전히 어느 정도 모호한 상태로 남는 것 같다. 확실히 '패스트 앤드 프레즌트' 초기에, 우리들은 제출된 논문들 중에서 엄청나게 많은 논문들이 16세기와 17세기를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16세기와 17세기가 뜨거운 쟁점이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아날' 사이에 어떤 결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열중을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는 분과 학문이 작동하는 모호한 방식으로, 적어도 장기적인 경제적, 사회적 과정에 흥미를 느꼈던 사람들에게 중심적 관심사가 되었고,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와 '아날'은 접합점을 찾았다. 영국에서의 '아날' 수용 과정에 대한 역사와 기억을 살펴보는 것은 이만 끝내기로 하겠다. 이제 '아날'이 지금 하고 있는 것, '아날'이 하고 있거나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망탈리테에 관한 이야기...]


(...) 확실히 영국에서, 르페브르의 '1789년의 대공포'는 보통 사람들의 역사, 민초들의 역사를 실제로 연구하는 우리 같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망탈리테라는 문제로 유혹하는 데 이상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국의 영향력과 함께, 중요한 지역적, 국제적 영향력이 존재해 왔다. 그람시(A. Gramsci)를 포함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로 이것은 이념과 감정의 세계와 경제적 토대, 즉 사람들이 생산을 통해 살아가는 방식 사이의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둘째, 여러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결국 토대와 상부 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 모델은 토대뿐만 아니라 상부 구조도 중요시한다. 즉 이념도 중요시한다. 17세기 영국 혁명에 대한 논쟁에서 순수 경제 결정론자들에 반대하여 청교도 정신(Puritanism)의 중요성에 대해 변함없이 주장했던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힐은 청교도 정신을 사람들이 믿었던 중요한 것으로 보았지, 계급 구조나 경제 운동 위에 있는 시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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