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자료] 미래세대와 신앙교육

자료: 미래세대와 신앙교육: 다중적 앎과 다중적 경험의 문화세대 위한 교육목회적 대안
지은이: 김영래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교수)
출처: 제36회 청암논단 (2003년6월25일) 주사랑 장로교회 에서

※ 검색어: participating consciousness

※ 발췌 메모:
(...) 그러면 이제 EPIC 교회모델을 토대로 다중적 앎의 기독교 교육적 함의를 간단히 살펴보자.

(1) 경험적 앎: 전통적 교육은 경험을 학습의 한 요소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Paulo Friere가 말하는 "은행저축식(banking)" 개념을 지지했다. 은행저축식 개념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학습자가 교육을 의미 있고 상관성 있게 만들 수 있는 행동(action)이 배제되어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전통적 교육에 의존한 기독교교육은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앎의 문제라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경험적 앎을 기독교교육에 포함시킬 것인가? David Kold는 첫째, 인식과 의미를 가져올 활동적 실험과 발견을 통해 앎을 경험할 수 있으며, 둘째, 추상적 개념들을 형성하기 위해 환경 속에서 구체적 행동을 통해 경험적 앎을 갖게 되고, 셋째, 공동체의 사회적 삶에서의 생산적 관여와 참여가 경험적 앎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David Kolb가 지적하듯이 학습에는 반드시 활동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바로 이 같은 앎이 바로 Friere가 말하는 프락시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앎의 활동은 학습자로 하여금 학습을 일차원적 사고로 조직하는 것에서 벗어나, 지식은 사고(사고의 행동: actions of the mind)와 행동(육체의 행동: actions of the body)의 연합을 통해 구성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교육에서도 놀이와 작업을 통한 학습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앎과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적 작용이라는 것을 활동을 통해 인지되고, 경험되며, 신념화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참여적 앎: 물리학자인 John Wheeler는 "우리는 '관찰자(observer)'라는 낡은 말을 지워 버리고, 이를 '참여자(participator)'라는 말로 대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사실상 앎의 주체와 앎의 대상이 분리된 앎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상정해왔을 뿐이다. 참여된 의식(participating consciousness)이라 불리 우는 Michael Polanyi의 인식론에 의하면 지식에는 촛점적(focal)인 것과 부수적(subsidiary)인 것이 있는데, 촛점적 지식은 인식자의 집중된 관심이 대상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고, 부수적 지식은 인식자가 사용하는 대상 그 자체를 넘어서는 실마리 또는 도구로 사용되는 지식을 말한다. 즉 망치로 못을 치는 지식은 촛점적 지식(명시적 지식: explicit knowledge)에 해당하며, 망치를 들고 있는 손에 저장된 지식이 부수적 지식(암묵적 지식: tacit knowledge)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가운데 인식자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된 의식을 촉진시키는 기독교 교육적 방법 중 대표적인 예로 이야기 들려주기(storytelling)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Jeanette Brown에 의하면 "이야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행동양식의 결과를 깨닫고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사는 방식 속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참여란 단지 정보나 사실을 듣는 것을 넘어서 이야기의 사건에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이야기 들려주기는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면서 다양한 활동과 경험 속에 참여하게 하여 학습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주체적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3) 이미지 추구적/상호작용적 앎: Gregor T. Goethals가 지적하였듯이 대중 미디어의 영향력이 점차 증대되면서 이를 통해 묘사되는 이미지는 권위의 상징과 공동의 가치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 영상적 이미지로 전달되는 내용은 문자보다 더욱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시청각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살펴보면 이미지의 교육적 역할은 결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올림피아와 델피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이미 교육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다시 말해 신전의 조각상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신화들을 시각적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살펴보면 초대교회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이미지를 통한 메시지의 표현과 전달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자 중심의 논리적 소통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상대적으로 이미지에 의한 메시지의 전달은 객관성이 결여된 신뢰할 수 없는 방법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영상을 포함하는 대중 미디어의 등장은 지식의 형성과 경험의 양상을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Margaret R. Mills "이미지는 [이것을 경험하는] 이의 삶의 상황과 태도와 가치가 개인화 되고 무의식적 선택에 적합하게 된 메시지의 관심을 가진 인지를 허락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이미지는 개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그 해석은 자신의 삶의 상황에 연관을 가지는 생명력 있는 지식 경험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앎에 있어서 일차적 경험이 요구되는 신앙교육에 있어서 이미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지 추구적 앎은 "시각을 통한 이해(to understand through the eyes)"를 가지고 다양한 해석과 창조를 필요로 하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언어적 추상적 앎이 가지는 단편성과 편협성을 극복하는 적극적 방안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Joseph C. Pearce는 기독교교육자는 반드시 "눈을 감고 바로 앞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연결적/공동체적 앎: 연결적 앎은 모든 앎의 대상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독립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상관성과 전체성이라는 원리에 의해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현재 전지구적으로 당면한 환경과 생태학적 문제(environmental and ecological issues)에 대한 생태신학적 해법으로서 그 중요성을 가진다. 사실상 우리는 오랫동안 Charles Dawin의 적자생존이론에 근거하여, 강자와 약자 사이에 형성된 먹이사슬(food chain)의 관계로 세상을 이해해왔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하는 먹이망(food net)의 틀에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연결적 앎은 생명력 있는 지식을 생성해내는 요건이 되는 셈이다.
한편 공동체적 앎에 대한 언급하자면, 지식은 본래 자율성(autonomy)을 이상으로 하는 전통적 인식론적 구조에 의해 이해되어져 왔기 때문에 개인적 노력이라고 여겨졌다. 또한 자율적 인간은 자기충족적(self-sufficient)이며, 독립적(independent)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러한 자율성의 이해는 개인주의를 고무시켜왔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결국 공동체적 관계의 유형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학습자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협조를 통해 학습한다. 학습자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대화, 협력, 협조가 일어나는 학습자 공동체의 일부일 때 가장 활발히 학습하게 된다. 전통적 인식론적 구성은 지식형성의 중심으로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개인주의적 인식론은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과 일치하거나, 기독교 신앙형성에 효과적인가에 대한 적절한 분석 없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목회와 교육의 많은 부분을 구성해왔다...[결국] 개인주의라는 문화적 환경은 기독교 신앙형성과 목회에 대한 제한점들을 보지 못하게 했다. Maureen R. O'brien은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보다 연결을 맺는 것(making connections)이 참된 실천신학의 모습이라고 했다.

*********
Newton과 Descartes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분석적 관점은 산업혁명의 시작과 함께 기술적 세계관(a technological worldview)으로 발전하면서 경험적 논리와 증명을 중시하는 서구 사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서 앎의 방법은 피할 수 없이 제한되고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육은 학습의 다양한 가능성을 격려하기보다는 제약하고, 무엇보다도 학습자 자신의 잠재적 앎의 기회를 확장시키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일고있는 생태학적 세계관(ecological worldview)은 통전성과 전인성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전뇌사고(whole-brain thought), 연역과 귀납의 융합, 이성적, 그리고 직관적 앎의 통합을 통해 이해와 경험의 지평을 넓히려고 하고 있다. 특별히 이성과 계시의전영역을 다루는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앎의 방법의 다양화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Leonard Sweet이 제시한 EPIC 교회모델로부터 발전시킨 경험적, 참여적, 이미지추구적/상호적, 연결적/공동체적 앎은 미래를 맞이하고 있는 교육과 신학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연구되고 적용되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