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http://theology.co.kr/article/jung.html
출처: 전철의 신학동네
제목: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 이하, 발췌를 통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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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Self와 〈자아〉Ego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자기〉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놓여 있는 세계이다. 또한 그 세계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세계보다 훨씬 작은 세계이다. 그리고 의식과 분별의 세계이다.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원형의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것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융에게 있어서 삶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은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 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 는 여정이다. (...) 어둠의 세계인 자기의 세계를 빛의 세계인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 ...) (3절. “칼 융의 사상” 중에서)
■ [주19]
우리는 개성화(individuation)와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융에게 있어서 개성화는 개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개인주의는 한 개인에게 부과된 고유한 기질의 단층이다. 또한 개인주의의 기질은 한 개인의 사회적 실현을 간과하거나 혹은 억압한다. 하지만 개성화는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을 온전히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특성에 대한 깊은 사려는, 더욱 성숙한 사회적 실현을 추구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 C. G. Jung, The Relations between the Ego and the Unconscious, The Collected Works, vol. 7, p.171.
■ [주18]
융은 우주의 대극쌍으로서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를 말한다. 융에게 있어서[:]
- 플레로마는 원형의 세계이고 자기 (Self)의 세계이고 영원의 세계이고 무(無)의 세계이다. 플레로마는 이 세계의 근원이자 뿌리이다. 그리고 플레로마와 대극의 자리에는 크레아투라가 놓여있다.
- 크레아투라는 자아(自我)의 세계이고 의식의 세계이다. 융은 의식의 기원을, 이해하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충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해는 지(知)이고 그것은 분별(分別) 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무의 세계인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분별의 세계인 클레아투라로 나아가려는 것, 그것은 플레로마 자신이 자신을 밝히[밝게?][밝혀?] 드러내어 보이려는 강렬한 의지이고 신념이다. 그런데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의 긴장적 대극적 운동은 플레로마의 세계인 무로 와해되는 것, 그리고 클레아투라의 세계인 끊임없는 분열상으로 와해되는 것을 동시에 지양한다.
- 클레아투라를 통하여 플레로마가 승화되어 드러나는 과정, 혹은 플레로마의 중심인 자기로 향해 가는 과정이 개성화(個性化)이다. 이 개성화의 과정은 자기실현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을 거치지 않은 깨달음이란 또한 없기 때문이다. 또한 플레로마의 무로 와해되지 않고 클레아투라의 구별로 와해되지 않는 고양과 상승의 과정으로서의 개성화는, 결국, 세계를 배제하지 않고 수용한다 ;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p.365,466. C. G. Jung(이부영 역), {현대의 신화} (서울 : 삼성출판사, 1993), p.21 참조.
■ 5. 결론 : 칼 융이 주는 의미
첫째, 융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중심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문명화된 의식이다. 의식은 자아의 세계이다. 이 〈자아〉라는 것은 〈자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우리의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우리의 중심인 자기를 향해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는 자아의 세계가 전부로만 착각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의 세계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는 자아의 세계를 전부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서 노예의 자리로 추방당하였다. 우리는 중심을 상실하였 다. 현대인의 마음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보헤미안의 서글픈 운명이 맺혀 있다.
융은 희미한 잔영으로만 남아있는 자기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왔고, 오늘 우리에게 그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건네주고 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자기의 세계는 너와 내가 서로 넘나드는 화해의 세계이고 통합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보다 보편적이며 진실한 세계이고 영원한 세계이다. 오히려 그곳은 그늘에 가리워진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이다. 그리고 중심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꿈을 통하여, 신화를 통하여, 상징을 통하여 자기의 세계에서 자아의 세계를 향해 건네주는 메세지에 우리는 귀를 모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의식의 치명적인 손실은 꿈에 의해 보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저 깊은 내면의 무의식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겠다.
둘째, 우리의 세계는 설명 가능한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특히 자아의 세계 안에서의 ‘이성’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마음의 전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 다.[14]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이성이 지배하면 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곤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우리가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삶을 통합할 수 있다.”[15] 의식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겸허함을 상실한 채, 이성의 왕국으로만 전진하려는 현대문명의 기나긴 행렬은 사실 막대한 손실을 지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었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성은 존재하지 않는가. 단지 이성의 등불이 건져내지 못하는 심연의 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바벨탑이 감내해야 할 불길한 징후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심연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치 빛이 소멸하고 어둠에 깃든 저 밤하늘에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별만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연은 존재를 망각케 한다. 하지만 존재는 심연에 앞선다. 오히려 존재는 어둠을 품는다. 심연과 어둠에 서 있는 존재는, 비록 설명되지 않을지언정, 자명한 존재이다. 그래서 은폐되어 있고 불가해한 존재 (essentia absconditus et incomprehensibilis)는 모르는 존재(essentia ignotus)가 아니다.[16] 사실 ‘비합리적인 것’은 모르는 것이나 인식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조차도 이름붙일 수 없을 것이 다.[17] 이름은 존재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실로 융의 동시성 이론이나 죽은 자와의 대화는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빈약한 기능인가를 예증해 준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는 않고 설명되지는 않는 세계가 우리 가까이에 있고, 그리고 그 세계가 우리를 인도한다고 융은 말한다.
셋째, 융은 우리 각자의 生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 심성의 뿌리에는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 전체의 세계와 닿아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生은 결코 가볍거나 보잘 것 없는 生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生은 우주를 닮아 있다. 영원의 세계인 무의식의 현현이 각자의 生인 것이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클레아투라의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사건이 生이다.[18] 우리의 生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生은 끊임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 지향이 바로 '개성화'인 것이다.[19]
우리는 융을 통하여 살아있음(生)이 결코 예사스럽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제 생은 환희이고 생명은 경이로움이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하는 저 새를 보자. 새는 날기 위하여 얼마나 지난한 시간 동안 새가 되려는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얼마나 긴 계절을 인간의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백 년의 삶을 만나기 위하여 백 만년 동안, 그 한 순간만을 꿈꾸어 온 존재이다. 백만 년 겨울잠의 기나긴 제의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주어진 것이다. 우리 삶의 밑둥에는 백만 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뿌리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단지 백 년을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백만 년을 몸으로 살아 가는 푸른 생명나무이다. 그 생명나무가 가장 찬연한 열매를 맺는 그 순간,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지금의 生이다. 그러기에 生은 저 영원의 빛의 드러남이다. 또한 지금의 生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구현 (Individuation)’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꿈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예언한다. 꿈이란 자기와 자아가 체험하는 두 지대의 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삶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중심의 소리이다. 꿈은 삶의 해리를 통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고백하였다면, 융은 "꿈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지금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꿈을 타고 우리에게 건너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서늘하게 만났던 융에 대한 감정은 이제는 따스한 할아버지로, 예리한 관조의 시선을 통하여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해 주는 영혼의 의사로, 오늘의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문명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천상의 헤르메스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
꿈은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門)이며 그 문은 저 우주의 태고적 밤을 향하여 연다. 그것은 아직 자아의식이 없던 시기의 마음이었고 자아의식이 일찍이 도달할 만한 곳을 훨씬 넘어서 있는 마음이 될 태초의 밤이다.[20] - 칼 구스타프 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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