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8일 월요일

역자의 말: 장인, 그들은 언제나 일에서 인간을 봤다

리처드 세넷의 《장인The Craftsman》에 붙이는 역자의 말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크림의 부드러움과 과일, 초콜릿, 설탕 등 각종 향미 재료의 달콤한 맛을 즐긴다. 우유의 고소함도 빼놓을 수 없는 맛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근본 중의 근본 재료인 신선한 물의 맛은 그냥 지나친다. 우리가 사는 현대의 복잡한 시스템에는 이것저것 누릴 것들이 많다. 그림의 떡이든 진짜 떡이든 고급 주택과 각종 편의시설, 문화상품, 그 밖에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인간적인 것들과 비인간적인 것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러한 현대문화가 아이스크림이라면, 인간의 노동은 물과도 같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 다른 이들이 일한 덕분이지만 그저 ‘소비의 맛’에만 감각이 쏠려 있다. 인간의 노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선조 때부터 어떻게 일하며 살아왔는지 별 관심이 없다. 물의 맛과 가치를 잊은 채 아이스크림만 찾는 것과 비슷하다.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The Corrosion of Character)』(원작 1998년, 한국어판 2002년), 『뉴 캐피털리즘(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원작 2006년, 한국어판 2009년) 등 다수의 저작에서 꾸준하게 삶의 가치와 일의 의미를 추적해온 리처드 세넷은 그간의 저서 중 가장 공을 들인 이 책 『장인』에서 인간사회 모든 활동 중에서 물과도 같은 근본 재료인 인간의 노동과 일을 들여다본다. 일 자체를 위해서 일을 훌륭히 해내려는 욕망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파악하는 세넷은 인간이 일하는 모습을 조명하고자 광활한 시공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상고시대 그리스 도공, 로마제국의 이름 없는 벽돌공, 거대한 성당을 지어 올렸던 중세 석공, 르네상스 예술가를 비롯해 근대의 노동자, 리눅스 프로그래머, 건축가, 의사 등 현대의 전문 직종에 이르기까지 일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의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은 일하는 모든 인간 안에서 ‘살고 있지만’ 잘못된 제도와 어긋난 이데올로기로 고통받는 장인, 바로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잊힌 그를 불러내는 세넷의 대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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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펼쳐가는 세넷의 대화는 날이 갈수록 실종되어 가는 인간의 원초적 정체성을 복원해보려는 지식인의 몸부림이다. 그 원초적 정체성은 별다른 보상이 없더라도 일 자체에서 깊은 보람을 느끼고 별다른 이유 없이도 세심하고 까다롭게 일하는 인간, 바로 장인의 모습이다. 장인이 추구하는 근본 가치는 뭐라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저 ‘일 자체를 위해서 일을 잘해내려는 욕망’으로 사는 사람이 장인이다. 18세기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는 바로 이러한 장인들의 모습을 계몽의 무대로 삼았고, 세넷은 이를 이어받아 상고시대 그리스 장인의 흔적을 찾아간다. 모든 일의 이면에 자리하는 최고의 품질 목표, 그 최고의 경지를 가리켜 “아레테”라고 불렀던 플라톤은 장인을 어떤 일이든 대충 일하기를 거부하고 최고의 경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질을 추구하는 이러한 욕구와 그 사람들의 공동체, 이 두 가지에서 세넷은 상고시대 장인의 정체성을 찾는다. 『장인』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항해를 시작한다.

저자가 프롤로그에 언급한 책의 개요를 이 자리에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국어판 독자와 저자가 만날 무대의 연출자로서 좀 더 부각하고 싶은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다. 1부에서는 우선 현대의 장인이 지치고 바로 서기 어려운 이유, 그래서 점점 장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1장에서 세 가지로 짚는다(일할 동기의 약화, 손과 머리의 분리, 품질표준의 갈등). 이어서 역사상 장인이 밟아온 길을 일터, 도구, 의식 세 가지 갈래로 훑어본다. 장인의 집이자 일터였고 하나의 사회기관이었던 작업장(2장), 사람의 손을 떠나 스스로 작동하는 도구인 기계(3장), 물질을 생각하는 의식인 ‘물질의식’(4장)을 살펴본다. 2부에서는 장인이 기능을 습득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세넷은 기능을 숙달하는 일은 기존 서구 전통의 합리주의 모델과는 전혀 다른 과정임을 밝히고자 분투한다. 즉 손과 머리를 같이 쓰는 과정이고(5장), 상상력을 자극하고 활용하는 전혀 기계적이지 않은 과정이며(6장과 7장), 또 저항을 때려 부수고(정복자적 모델) 모호함을 걷어내는(합리주의적 모델) 게 아니라 저항과 모호함을 다스리고 때로는 참아내면서 그 상태와 사귀는 과정(8장)이라는 점을 조명한다. 3부에서 다루는 동기와 재능은 프롤로그의 요약을 길잡이로 삼아도 충분하겠다.

책을 읽어가는 세 갈래의 실타래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만드는 일이 곧 생각의 과정이라는 근원적 명제다. 손과 머리는 하나이며, 행동하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게 장인이 일하는 방식임을 뜻한다. 둘째는 인간은 스스로를 만드는 자기 창조자라는 생각이다. 그 자기 창조 활동의 근본은 물건을 만드는 일이다. (세넷이 사유를 펼치는 닻이라고 밝힌 문화적 물질주의는 구체적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을 깨닫자는 주장이고, 이 두 가지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읽힌다.) 셋째는 그렇게 인간이 벌이는 일(물리적 노동과 물질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읽어낼 거울은 판도라와 헤파이스토스의 양가성이라는 것이다. 판도라는 인류를 공도동망으로 몰고 갈 ‘화려한 해악’이고, 헤파이스토스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수줍은 일꾼’이다.

어쩌면 요즈음 세태에서 장인을 주제로 말한다는 게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사람의 손이 필요 없는 것 같다. 물질만능주의는 극에 달해 가짜가 판을 치고 식품에 유해물질을 집어넣기까지 한다. 이런 마당에 ‘일 자체를 위해’ 열심히(또 훌륭히) 일하는 장인적 정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라고 푸념할 때가 더 많다. “장인의 운명이 바로 이렇게 끝날 거라고 믿지 않는다.” 세넷의 말이다.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제 아무리 기술이 첨단을 달린다고 해도 현대문명의 근본은 여전히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의 손끝에서 품질이 결정된다. 미 항공우주국이 17억 달러를 들여 만든 허블우주망원경만 봐도 그렇다. 1990년 이 정교한 물건을 우주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1993년 다시 비싼 돈을 들여 우주 상공에서 수리해야 했다. 주 반사경 광학계의 구면수차(球面收差)란 결함 때문이었는데, 반사경 제작의 기준을 정하는 영점 보정계를 ‘사람이 잘못 잡았던’ 게 원인이었다. 1990년대 초 국내 특정 회사의 중형차 모델(1800cc급)을 놓고 일본의 모 자동차회사와 비교하면 제조원가 차이가 30~40 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일본 회사가 월등하다는 말이 나돌았다. 최첨단 자동화 생산라인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초 이 회사 제품이 줄줄이 품질사고를 내더니 최근까지도 총체적 품질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월등하다던 회사가 어찌 된 연유일까? 급속한 세계화 추진에 따라 공급망 관리에 무리가 따랐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 배후의 근본 원인은 십중팔구 ‘장인의 손길’이 사라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프롤로그에 나와 있듯이 『장인』은 물질문화를 다루는 삼부작의 첫 책이라는 점에서 끝나지 않은 이야기지만, 다른 의미에서도 계속되는 이야기 같다. 책을 펼치면 1962년 쿠바 미사일위기를 배경으로 판도라의 공포가 서두를 장식하고, 우리말로는 (경우에 따라) 아무리 읽어도 속뜻은 물론 겉뜻도 파악하기 곤란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지나, 수많은 책과 소재를 다루면서 이야기는 종횡무진으로 달린다. 지난날 장인의 역사를 주로 다루지만 지금의 산업사회와 견주어보면서 군데군데 명시적 결론을 내지 않거나 암묵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곳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이러한 부분들은 작가의 의도를 고민한 끝에 적극적인 의역을 많이 시도했고, 그만큼 토론의 여지도 많고 오류의 여지도 있을지 모른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질타를 토론과 공부의 계기로 삼고 싶다. 한편 우리에게 생소한 구미문화의 소재가 수없이 등장하는데, 배경 지식을 파악해야 할 경우도 많아서 인물, 작품, 건물, 지리 등 갖가지 자료를 찾아 공부해야 했다. 예컨대,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지은 집의 사진 자료를 찾아 생생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찾아본 자료들은 모두 블로그(“번역가 김홍식의 블로그입니다”)에 내용과 출처를 기록해 두었다. 검색엔진으로 쉽게 찾아지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참고자료로 쓰이기를 바란다.

우리말 짝짓기가 까다로운 용어에 대해서 몇 가지만 언급해야겠다. ‘craftsmanship’은 장인정신을 뜻할 때도 있지만, 그러한 관념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장인의 기예를 구현하는 품질’을 뜻하는 사전적 어의 외에 ‘장인정신이 살아있는 일’ 또 그러한 ‘사고방식’을 뜻할 때가 많아, 때로는 ‘장인노동’으로 옮기고 때로는 ‘장인의식’으로 옮기면서, 경우에 따라 이 둘을 같이 담아 표현하려고 애썼다. 수공업이나 수공예 또 그 솜씨를 가리키면서 그러한 일 자체와 직업에까지 어의가 번져 있는 ‘craft’의 역어 찾기가 까다로웠다. ‘기술’이라고 하자니 ‘technique’와 중복됐고 ‘skill’과도 의미가 중첩되는 한편, 예술과의 관계에서는 ‘craft’와 ‘art’가 대조되고 ‘technique’과 ‘expression’이 대조되니, 의미장의 중첩과 대조 관계가 복잡했다. 고민 끝에 ‘craft’의 중심 역어로 ‘실기(實技)’를 택했다. ‘craft’가 수작업 일 자체를 뜻하는 문맥에서는 ‘실기’ 혹은 ‘실기작업’으로 옮겼고, 수공업으로서의 직업을 뜻할 때는 ‘실기 직업’으로 옮겼으며, 기예의 경지로 일하는 기술 측면이 부각될 때는 ‘장인의 실기’나 ‘장인적 실기’로 옮기기도 했다. 자의적일 위험은 따르지만, 수작업 도구를 써서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을 일컫는 ‘craft’를 ‘technique’, ‘skill’, ‘work’ 세 가지 용어의 의미장 관계로 이해해 craft=f(technique, skill, work)라는 함수 관계로 생각했고, ‘실기(craft)’, ‘기술(technique)’, ‘기능(技能, skill)’, ‘일(work)’로 역어 체계를 잡았다. 의미상 ‘기술(technique)’은 도구의 쓰임 측면이 부각되고(활용되는 도구의 객관성), ‘기능(skill)’은 그 쓰임을 숙달해 몸에 체화하는 측면(도구를 활용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부각된다고 봤다. 전쟁을 예로 들어 총을 쓰는 ‘기술’이 있고 탱크를 쓰는 ‘기술’이 있다면, 총이든 탱크든 그 기술을 몸에 익히는 과정이 ‘기능’이고, 그 기술을 기능으로 익혀서 전쟁이라는 ‘일’에 써먹는 과정이 전쟁의 ‘실기’라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총을 잘 쓰고 탱크를 잘 쓰면 분명히 전쟁에 유리하겠지만, 총과 탱크 기술을 기능으로 잘 익혔다고 해서 꼭 전쟁에 이긴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일을 잘 이해해 기술과 기능을 잘 써먹는 제삼의 요소인 함수 f가 자리하는 공간을 실기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칸트의 철학체계에서 ‘understanding’은 이성과 감성하고 구분해 ‘오성(悟性)’으로 부르는 게 상식이겠지만, “계몽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의 유명한 칸트 인용문은 저자가 설정한 앞뒤 문맥의 흐름상 꼭 그렇게 옮길 필요는 없어보였다. ‘알 수 있는 능력’이란 의미를 따라서 앞뒤 어구의 어울림에 맞추어 ‘알 수 있는 것’, ‘앎’이란 평이한 말을 택했다. ‘sublime’은 철학과 미학 계통에서 보통 ‘숭고’로 옮기지만, 본문 중의 ‘sublime tool’을 ‘숭고한 도구’라고 옮길 수는 없었다. ‘높일 숭(崇)’ ‘높을 고(高)’를 따라 글자 그대로 조합하면 숭고는 ‘높이 받들다’는 게 일차적인 어의가 되지만, 본문에서 일자 드라이버나 최초의 직조기계를 예로 든 도구를 ‘높이 받든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sublime’의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의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이고, 논의를 펼치는 이에 따라서 그러한 경지의 ‘장대함’, ‘공포’, ‘신비’, ‘희열’ 등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 경험하고 접할 수 있는 한계, 그 ‘문지방 끝’의 그 무엇이 ‘sublime’에 담긴 의미라면, 숭고보다는 차라리 ‘영험(靈驗)’, ‘현묘(玄妙)’, ‘신통(神通)’이 더 어울리는 말이라고 봐서 ‘영험한 도구’라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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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옮긴 책은 많지 않지만, 주로 금융과 투자를 다뤘다. 노동, 사회, 심리, 철학을 넘나드는 『장인』은 이를 훌쩍 뛰어넘는 쉬울 리 없는 책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애착이 갔던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 금융과 투자는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이 시스템의 화려하지만 연약한 ‘꽃’이다. 그 꽃을 들여다보려고 금융과 투자를 공부하려고 한다. 둘째, 그 꽃잎들이 산산조각 나는 금융위기가 아무리 위협적이어도 ‘시장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제는 ‘시장 밖’을 봐야할 때가 되었다. 시장은 명백히 도구다. 그것이 도구임을 알려면 시장은 물론 인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장인』은 그를 위한 좋은 화두를 던져준다. 언제부턴가 ‘소비자’가 대중, 나아가 인간의 동의어가 돼버렸다. 시장 안에서만 생각하면 인간을 소비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소비하는 인간’이라는 게 철학도 그 무엇도 없는 얼마나 천박한 인식인가? 시장 밖에서 인간을 볼 줄 알 때 시장을 인간에 이롭게 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블로그에서 많은 독자들과의 토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옮긴이 김홍식


※ 출처: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의 《장인The Craftsman》에 붙이는 역자의 말
2010.02.08, 201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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