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9일 토요일

[떠돌이별: 독자서평] 뉴캐피털리즘: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 이야기를 상실한 노동자

자료: http://blog.aladdin.co.kr/743070143/3322060

※알라딘서재에 위 출처의 독자가 평한 글이다. 메모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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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넷은 자본주의 질서에 따라 인간의 주체성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경제적 질서와 작업장의 변화와 관련하여 인간성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인간’이란 주로 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즉 노동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초 미국의 노동 계급을 분석한 <계급의 숨겨진 상처(The Hidden Injuries of Class)>, 급속한 이익 실현을 바라는 이른바 '조급한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성격(character)이 어떻게 훼손되는지를 조명한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The Corrosion of Character, 1998)>. 이 책,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은 앞서 나온 저서들과 동일한 학문적 궤도(academic trajectory)의 연장선에 있다.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에서 그는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 가능한 자아(sustainable self) 의식을 간직하는 인간성의 특징들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부당해고와 노동착취 등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보수적인 심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이 위기 속에서 ‘자아의 일관성 혹은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 책에서는 앞서 ‘지속 가능한 자아의식’의 단절 혹은 훼손이라고 명명한 인간성의 변화를 제도 혹은 ‘관료제’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일터, 노동의 가치 및 성격 변화를 추적하면서 색다른 시각에서 조명한다. 그는 최근의 자본주의 문화가 그 이전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신인류(new man)’를 출현시켰다고 본다.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에서는 기존의 조직이나 관습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독립적 개인, 불안정한 현실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카멜레온처럼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상적 인간형으로 규범화된다. 기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하루 하루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차곡 차곡 자신의 세계를 쌓아가는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 혹은 좀 심하게 말하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로) 루저가 되기 십상이다.

세넷은 과거 사회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노동 윤리가 내포하는 양가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능력과 가치를 과거의 업적과 경력에 따라 평가하는 ‘장인정신(craftmanship)’이 실종된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이것이 새로운 노동 윤리, 즉 과거의 업적을 무시하고 미래의 잠재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로 대체되면서, 노동 안정성이 붕괴되는 것은 물론 노동자의 인간성 역시 부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책에서 저자는 작업장과 노동자의 정체성 변화를 ‘훼손된 자아의 일관성’을 되돌리고자 하는 반작용, 즉 인간 심성의 보수화로 설명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것을 ‘서사적 삶(narrative life)’의 상실로 명명한다. 세넷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들려주고자 하는 욕구와 능력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자신이 겪은 경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행위(narrative agency)’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narrative)’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제도화된 시간, 즉 일터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지면서 노동 윤리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규범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변화되고, 구성원들 간의 소속감은 약화된다. 또한 제도가 주는 귀속성과 안정감을 상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해야할지 몰라 허둥지둥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나중의 보상을 위해 절제하던 근검․절약의 노동윤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게’(p216) 된다는 것이다. 진단과 분석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서사적 삶’의 상실이라는 명명에는 선뜻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의 말대로 서사적 삶을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과 경험들이 축적되는 것’(p218)으로 정의한다면, 서사적 삶의 단절이라는 진단은 적절하다. 그러나 문화적 실천으로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더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정의한 대로, 이야기하는 행위(narrative agency)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자신이 겪은 경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라면, 삶이 파편화되고 부유하는 상황이야말로 그 의미를 파악하거나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적극적 행위가 발생하는 시점이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세넷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천박한 문화'는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 사람이 자신의 일에 헌신할 수도, 일을 통해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낄 수도 없고, 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경험의 축적이 가능하지도 않는 상황,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연속선상에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아의 서사를 이어나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아의 연속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실천이 ‘인간 심성의 보수화’처럼 반동적인 것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세넷은 현재 시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게 해주고,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다. 고용 불안정 속에서도 노동자들에게 서사적 삶이 가능하도록 일자리 알선을 포함해 각종 사회복지기능을 담당하는 노동조합, 일자리 나누기, 젊은이들에게 일정한 자립 비용을 제공하는 제도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이 사회에서 밀려나 부유하지 않도록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체(polity)로서 국가와 노동조합에 주목한다.

비판적 논의가 늘 그러하듯 이 책에서도 역시 분석적 논의에 비해 대안은 허약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리처드 세넷의 미덕은 역시 경제학 논의가 간과하는 일상적 삶, 인간성의 양상이 자본주의 질서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으로서 ‘서사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조명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많은 통찰력을 던진다.

사족. 세넷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의 글은 생각보다 집중이 잘 안 된다. 왜 그럴까. 이 책에서는 유난히 인용이 많다. 학문의 범주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동원해 논의를 풀어나가는 건 세넷의 장점이긴 한데, 무릇 모든 것이 그러하듯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 대중적 글이건 학문적 글이건 인용이 너무 많아지는 건 경계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인용이 저자 자신의 서사를 압도해버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읽는 사람 입장에서 좀 불만스러운 부분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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