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0일 월요일

[류가미의 문예 기행] 칸트와 숭고의 미학 --인간적 한계를 너머 저편으로

자료: 류가미의 문예 기행, http://kr.blog.yahoo.com/mjmhmom/folder/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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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주의와 숭고의 미학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낭만주의에 영향을 미친 칸트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사실 칸트는 유럽의 철학과 도덕 그리고 미학을 바꾸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숭고(sublime)’라는 새로운 미학적 범주를 체계화했습니다. 그가 주장한 ‘숭고’라는 개념은 18, 19 세기 낭만주의 미학뿐만 아니라 20세기 표현주의 미학의 핵심이 됩니다. 

서양 예술사를 가로지르는 두 가지 핵심어가 있다면 그것은 모방표현입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서양의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예술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놓고 수많은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답변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요약됩니다. 그 중 하나는 예술은 실재의 모방이라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은 숭고한 것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예술을 모방으로 보았던 사람은 바로 플라톤이었습니다. 그는 예술이 이데아의 모방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인(비극작가)들이 명정한 이데아에 관심을 두기보다, 희로애락에 물든 허구의 세계에 더 관심을 두고 있고 이성의 증진 보다는 신과 합일되는 열광(ecstasy)을 강조한다고 비판합니다. 사실 엑스타시는 자신보다 더 강력한 존재 앞에서 인간이 이성을 잃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모방 이론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엑스타시 효과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예술(비극)은 자아를 초월한 어떤 것을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감정을 정화(카타르시스)시킵니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이데아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숭고한 것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숭고(Sublime)라틴어 sublimus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sublimus는 접두사 sub문지방을 뜻하는 limen의 합성어입니다. 말하자면 sublimus는 ‘문지방 넘어’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숭고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나 신, 혹은 자연을 가리킵니다.


칸트 이전에 숭고의 개념을 부각 시킨 사람은 브왈로(Nicolas Boileau, 1636-1711)였습니다. 그러니까 브왈로는 칸트(1724-1804)보다 약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브왈로는 고전주의 시대 풍자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유명 인사들을 비꼬는 풍자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풍자시집(Satires)’의 반응이 좋자, 그는 운문형식으로 된 논문인 ‘시학 (L'Art poetique)’를 발표합니다. 그의 ‘시학’은 훗날 고전주의의 원리를 밝혀주는 중요한 이론서가 됩니다. 


오랫동안 브왈로는 고전주의 희곡과 시의 원칙을 창안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낭만주의 이론에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리스의 수사학자 롱기누스(Cassius Dionysius Longinus, 217~273)가 쓴 책, ‘숭고에 대하여’를 번역합니다. 그는 라틴어로 된 이 책을 불어로 번역하면서 서문과 주석에서 자신이 이해한 숭고의 개념을 구체화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책 덕분에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숭고(hupsous)라는 말은 불멸의 명성을 얻은 뛰어난 작품에 붙여지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숭고에 대하여’라는 책은 위대한 문학 작품에 대한 평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위대한 문학작품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특징을 언급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원대하고 중요한 사상’이고 두 번째 특징은 ‘격렬한 정서’였습니다. 롱기누스는 바로 이 특징들이 숭고의 조건 혹은 그 구성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단순한 쾌락이나 지적 신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엑스타시를 경험하게 하며 그 속에서 독자의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롱기누스가 브왈로가 번역했던 ‘숭고에 대하여’란 책을 쓴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롱기누스는 3세기에 그리스에 살았던 실존인물입니다. 또한 그는 ‘원리에 대하여’, ‘궁극 목적에 대하여’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숭고에 대하여’란 책을 쓴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숭고에 대하여’는 룽기누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려 쓴 가짜였던 셈입니다. 가끔씩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의 권위를 믿고 글쓰기를 하게 되면, 브왈로 같은 바보짓을 하게 됩니다. 


브왈로의 숭고라는 개념을 새로운 미학적 범주로 체계화시킨 사람이 바로 칸트입니다. 자 이제 칸트의 철학과 숭고라는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봅시다.


칸트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규정하는 인식의 틀이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감성형식(공간형식과 시간형식)사고형식(오성의 범주)이라 인식의 틀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합니다. 


칸트가 말한 인식의 틀은 유리창과 비슷합니다. 창 너머에 어떤 물건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그 물건을 유리창이라는 인식의 틀을 통해서 파악하게 됩니다. 만약 유리창 색깔이 푸른색이라면 창 너머의 물건도 푸르게 보일 것이고 유리창 색깔이 노란 색이면 창 너머의 물건도 노랗게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의 틀에 의해서 왜곡된 그 물건의 이미지입니다. 다시 말해 실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밖에 존재합니다. 


사실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놀라운 것이었는데,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플라톤 이후 거의 2300년 동안 내려오던 서양 철학의 전통을 흔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은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서 실재(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을 이러한 실재(이데아)의 모방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예술이 모방할 실재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나섭니다. 


결국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은 모방의 대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인식의 틀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실재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궁극의 실재(그것을 이데아로 부르던, 신이라고 부르던, 물자체로 부르던)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일까요?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실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통해서, 인식의 틀 저 너머에 있는 실재를 경험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폭풍우 치는 바다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제한된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초월적인 그 무엇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그 초월적인 무엇을 그려내 보려고 하지만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납니다. 그것은 규정지을 수도, 형언할 수도 없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 초월적인 경험숭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에게 궁극의 실재는 자연의 법칙이자 윤리적 법칙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초월적 실재를 경험하는 순간 (다시말해 숭고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그와 동시에 초월적 실재를 이땅에 실현시킬 방법을 찾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칸트에게 숭고는 미학적 체험인 동시에 도덕적인 체험이었던 셈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초월적 실재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이 땅에 실현시킬 도덕적 요청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숭고를 경험하는 것은 감정(감수성)의 영역이라면 이러한 도덕적인 요청을 실천하는 것은 이성적인 영역입니다. 칸트는 숭고라는 개념을 통해서 감정과 이성의 화해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숭고를 통해 인간의 초월적 감수성(transcendental aesthetic)과 실천적 이성(도덕성)을 결함시켜보려고 했던 칸트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감정과 이성의 조화보다 감정의 거침없는 표현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독일 전기 낭만주의를 요약해주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질풍노도(Strum und Drang)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클링거의 동명(同名) 희곡(1776)에서 나왔습니다. 사실 이 말 속에는 이성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와 계몽주의와 맞서,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감정에 따르겠다는 저항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못가서 질풍노도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874), J.C.F. 실러의 군도(群盜, 1881) 같은 낭만주의 작품들을 대표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젊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했던 전기 낭만주의는 얼마 못가서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사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한 정국과 관계가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의 젊은 지식인에게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정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를 겪은 후, 프랑스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 왕정을 지지하는 주변국가와 전쟁을 치러야만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이라는 군사적 천재가 등장합니다. 


나폴레옹과 시민군이 독일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독일의 젊은 지식인들은 그들의 편이었습니다. 헤겔은 진군하는 나폴레옹과 시민군을 보고 저기 시대정신이 걸어온다고 했고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위해 영웅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과 시민군은 그들에게 점령자가 아니라, 해방군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폴레옹과 시민군이 독일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주의 이상을 전파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공화주의 이상을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실각하고 유럽은 비인 회의에 의해서 혁명 이전에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제 혁명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던 독일의 젊은 지식인에게 남은 것은 짙은 환멸감뿐이었습니다.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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