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다음백과(브리태니커),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37589&v=42
1729. 9. 26 안할트 데사우~1786. 1. 4 베를린.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비평가·성서번역가·해설가.
그의 명성은 독일 부르주아지에 동화하려는 유대인 공동체의 노력에 이바지했다.
가난한 율법학자 메나헴 멘델 데사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모세 데사우라는 이름으로 통했지만, 글을 발표할 때에는 히브리어로 벤 멘델('멘델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나온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을 썼다. 히브리어 대신 독일어 멘델스존을 선택한 것은 그가 다른 유대인에게 요구했듯이 독일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1743년 베를린으로 가서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와 독일의 사상가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 크리스티안 폰 볼프의 사상을 공부했다. 1750년 멘델스존은 비단 제조업자 이사크 베른하르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베른하르트는 1754년 멘델스존을 사업에 끌어들였다. 같은 해 독일의 일류 극작가 곳홀트 에프라임 레싱을 만났다. 〈유대인들 Die Juden〉(1749)이라는 희곡에서 고결한 유대인 상을 그린 레싱은 멘델스존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로 보게 되었다. 그뒤 레싱은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1779)이라는 희곡의 주인공을 묘사할 때, '독일의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지혜로운 멘델스존을 모델로 삼았다. 라이프니츠를 찬양한 멘델스존의 첫번째 저서 〈철학적 담화 Philosophische Gespräche〉(1755)는 레싱의 도움에 힘입어 출간되었으며, 같은 해 감정의 정신적 의미를 강조한 〈감정에 대한 편지 Briefe über die Empfindungen〉도 출판되었다.
멘델스존은 베를린 유대인들에게 돈을 받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전쟁(1756~63) 동안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든 것을 축하하는 아부 편지를 썼지만, 음악과 예술의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멘델스존이 자기의 시(詩)를 비판한 데 화가 나서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이 1763년 프로이센 학술 아카데미가 주최한 문학 경연에서 상을 받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태도를 바꾸어 유대인들이 관례적으로 당해온 법적 무자격 상태에서 멘델스존을 면제해주었다. 멘델스존이 상을 받은 논문은 형이상학 명제의 논증 가능성을 수학 명제의 논증 가능성과 비교한 것으로 그의 본명으로 나온 첫번째 글이었다(1764). 가장 유명한 저서 〈파이돈:영혼 불멸에 관하여 Phädon, oder über die Unsterblichkeit der Seele〉(1767)는 그당시 유행하던 유물론에 맞서 영혼의 불멸을 옹호한 글로서, 이 책의 제목은 플라톤의 〈파이돈〉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
1771년 멘델스존은 스위스의 신학자 J. C. 라바터와 그리스도교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결과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라바터는 2년 전 동료인 스위스 신학자 샤를 보네의 저서를 직접 번역하여 멘델스존에게 보내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네의 논증을 반박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라고 도전했다. 멘델스존은 종교논쟁을 싫어했지만, 자신의 유대교를 재확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극도로 날카로워진 신경은 1774년 〈시편〉을 번역하기 시작한 뒤에야 풀렸다. 이어서 그는 유대인의 종교전통과 독일문화의 연결을 돕기 위한 계획을 세워 〈구약성서〉의 첫 5권인 '모세오경'의 역서를 독일어로 쓰고 히브리어로 인쇄했다(1780~83). 이무렵 그는 파문(破門) 교리를 둘러싼 새로운 논쟁에 휘말렸다. 이 갈등은 그의 친구이자 그리스도교도인 빌헬름 폰 돔이 알자스의 유대인을 위해 탄원서를 써주기로 동의한 데서 비롯했다. 알자스 유대인은 원래 멘델스존이 그들의 해방을 위해 직접 개입하기를 바랐다. 돔은 〈유대인의 시민권 향상에 관하여 Über die bürgerliche Verbesserung der Juden〉(1781)에서 유대인의 해방을 탄원하면서도, 교인을 파문할 수 있는 유대 교회의 권리를 정부가 지지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결과 돔의 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멘델스존은 이 반발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마나세 벤 이스라엘이 쓴 〈유대인을 위한 변호 Vindiciae Judaeorum〉의 독일어 번역판 서문(1782)에서 파문을 비판했다. 익명의 작가가 모세 율법의 핵심을 파괴했다고 그를 고발하자, 멘델스존은 〈예루살렘:종교권력과 유대교에 관하여 Jerusalem, oder über religiöse Macht und Judentum〉(1783)라는 책으로 응수했다. 이 책에서 정부는 국민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서만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뿐, 교회와 정부는 사상을 침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논쟁은 레싱이 스피노자의 범신론(汎神論)을 지지했다는 주장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 논쟁에서 멘델스존은 레싱을 옹호했지만 마지막 저서 〈아침 Morgenstunden〉(1785)에서는 라이프니츠의 일신론(一神論)을 지지했다. 7권으로 된 그의 전집은 1843~45년 출판되었다. 그의 아들 아브라함은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