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다음백과(브리태니커)
1805. 8. 29 잉글랜드 서퍽 노먼스턴~1872. 4. 1 런던.
19세기 영국 성공회의 주요신학자. 많은 저서를 냈으며 주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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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앙고백인 39개 조항(Thirty-nine Articles)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케임브리지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지 못하게 되자 1830년 이 신앙고백을 따르기로 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 들어갔다. 수년간 런던에서 작가와 문학잡지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1834년 유일한 소설인 〈유스타스 콘웨이 Eustace Conway〉를 발표했다. 사제 서품을 받아 곧 런던에 있는 가이 병원 신부가 되었다. 1840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영문학교수와 근대사교수로 부임한 지 6년 뒤에 신학부 교수가 되었고, 런던의 법률 학회인 링컨 법학회관(Lincoln's Inn)의 기관신부가 되었다. 저서 〈그리스도의 왕국 The Kingdom of Christ〉(1838)이 출판되어 신학자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이 책에서 교회는 개인·당파·종파들의 다양성과 편파성을 초월한 연합된 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 에큐메니컬 운동을 예고한 선구자적인 견해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정통 성공회 인사들로부터 의혹을 받았다. 이것은 1848년 그가 온건파 성공회 신부인 찰스 킹슬리, 존 맬컴 루들로, 그밖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운동을 주창하자 한층 더해졌다. 1853년 발표한 〈신학 에세이 Theological Essays〉에서 지옥이 영원히 존재함을 그가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모리스에 대한 반대는 더욱 심해져 그해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서 해임되었다. 교육자로서의 재능과 노동자들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열정을 합해 노동자 칼리지(Working Men's College : 1854)를 세우고 초대 학장(1854)이 되었으며, 노동자와 함께 협력단체를 만들었다. 1860년 링컨 법학회관의 기관신부직을 사임하고 성베드로 교회에서 봉직했으며, 그곳에서 그의 설교에 감탄한 사람들로부터 '예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1866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도덕철학교수로 임명받아 윤리적 주제들에 관해 강의하면서 유명한 〈사회도덕 Social Morality〉(1869)을 썼다. 죽을 때까지 교수직에 있으면서 1870년 케임브리지 성에드워드 교회의 신부직을 겸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의 저술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었고, 일부 비판자들은 그의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모호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다재다능하고 창조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도덕철학과 형이상학 Moral and Metaphysical Philosophy〉(1850~62)·〈계시란 무엇인가? What is Revelation?〉(1859)·〈성서의 주장과 과학의 주장 The Claims of the Bible and of Science〉(186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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