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12일 금요일

Kuhn's normal science(정상과학, 규범과학): 과학혁명의 구조 역자해설

자료: http://csaweb.yonsei.ac.kr/~rhee/html/scirev.html


다음 글은 Thomas S. Kuhn이 지은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의 한국어 번역판인 「과학혁명의 구조(김명자 옮김; 동아출판사; 1994)」에 실린 '역자 해설'을 옮겨 적어 놓은 것입니다. 참고로 토마스 쿤은 이 글이 쓰여진 후인 1996년 6월 17일에 타계했습니다.

역자 해설

I

20세기의 현대사상 가운데 토마스 쿤(THomas S. Kuhn, 1922∼)의 과학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패러다임 명제가 실린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는 1962년 그 초판의 출간과 동시에 열광적 찬사와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광범위한 영역에서 '쿤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과학 변천 및 발전에 관한 이론은 특히 과학철학 분야에서 심각한 논쟁을 유발시켰고, 자연과학분야에서 나아가 사회과학 분야에 더욱 심오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쿤의 이론이 기본 골격을 갖추게 된 배경은 어떠한가? 1922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Cincinnati)에서 태어나, 1943년 물리학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수석 졸업한 쿤은 과학연구 및 개발 연구소(OSRD)에서 2년간 일한 뒤, 모교 대학원 물리학과로 되돌아가서 장학금(NRC)으로 학위과정을 밟는다. 「과학혁명의 구조」 서언에서 자서전적으로 술회하고 있듯이, 그는 화학자이면서 과학사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교의 코넌트(James Conant) 총장이 개설한 비자연과학계열 대상의 자연과학 개론 강의를 거들게 되면서 과학의 역사적 측면에 관해 깊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쿤의 과학사에 관한 관심은 1948년 하버드 대학 '주니어 펠로우(junior fellow)'에서와 1951년 하버드 대학 교양과정 및 과학사의 강사·조교수 경력을 거치면서 과학사상의 혁명적 변화들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십여 년 간의 철학·심리학·언어학·사회학 분야의 폭넓은 독서와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과학혁명의 이론은 점차 형태를 갖추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의 업적으로 학문적 역량을 널리 인정받게 된 쿤은 1956년 버클리 대학으로 옮겨 과학사 과정의 개설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 스탠포드 대학의 행동과학 고등 연구센터(Center for Advanced Study in the Behavioral Sciences)에서 사회과학자들과 생활한 것을 계기로 쿤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의 창안에 이르게 된다. 그 시절 그는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그 분야의 주제나 방법의 본질에 관한 공공연한 논란이 빈번한 것에 충격을 받았고, 자연과학자들의 과학 활동에서 그런 종류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한 논란이 덜하다는 사실과의 차이를 바로 과학 연구에서의 패러다임의 역할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패러다임(paradiam)이란 언어학습에서 사용되는 '표준예(exemplar)'란 뜻의 단어이다. 과학지식의 발전 이론에 이 용어가 도입된 것은, 어느 측면에서는 언어학의 영향을 보여 주는 셈이 된다. 쿤의 견해에 따르면, 학생들이 과학 교육에서 습득하게 되는 것은 흔히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인 과학적 개념의 정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용어들이 사용된 예제들을 푸는 표준 방법에서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과학 연구가 수행된다는 실제 과학의 특성에 주목함으로써, 과학 활동을 어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표준형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변형들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비유하게 된 것이 '쿤의 패러다임의 출현'을 낳았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에게 떠오른 패러다임이란 개념은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 집필에 필수불가결의 기본 요소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의 생각은 에세이로 옮겨질 수 있었다.

II

쿤의 과학관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지식의 변천 및 발전이 혁명적이라는 데 요지를 둠으로써, 과학의 진보가 축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종래의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의 발전 모델에 의하면,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대체되는 비축적적인 변화의 에피소드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혁명에 의해 과학이 변화한다면 그런 혁명들 사이에는 과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안정된 활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 규정한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어느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anomaly) 현상들의 빈번한 출현에 의해 위기(crisis)에 부딪침으로써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며, 그 결과는 새로운 정상과학이 된다. 전상과학은 과학자 사회의 전형적 학문 활동의 형태로서 패러다임에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쿤의 이론에서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사실상 패러다임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하고 완벽하게 정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다만 여러 가지 구성 요소로 기술될 수 있을 따름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과학 분야의 기본 이론과 법칙·개념·지식 등이 그 요소를 이루는데, 과학도들은 실례 문제-풀이로부터 패러다임을 익히게 되므로 이런 예제들도 그 요소가 된다. 기본 법칙을 적용하는 표준적 방법, 법칙들과 자연 현상을 연관시키는 데 필요한 실험기술과 장치 또한 패러다임의 구성 요소로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정규적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들도 패러다임의 기본 요소를 이룸으로써, 예컨대 이론의 정확성, 간결성, 체계성 등을 중시하는 그 분야의 가치관, 과학자 사회의 공유된 관념, 관습까지도 패러다임에 포함된다.

패러다임은 이렇듯이 정의되기 힘든 개념인 까닭에 과학도들은 명문화된 규정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 과정에서 은연중에 터득하게 된다. 특히 교육 과정에서는 과학 연구의 결과를 평가하는 그 분야 과학자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자 사회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며, 쿤의 과학지식 이론에서는 과학자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된다. 정상과학에서는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비판적 질문, 예컨대 기본 이론의 성립 여부에 관한 논의 등은 제기되지 않았다. 정상과학의 출현은 그 분야가 성숙된 단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며, 패러다임의 부재는 과학-이전의 단계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 사회과학의 제분야가 과연 과학의 자격을 얻었는가에 관한 논란이 제기된다.

쿤의 분석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안주하여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의 연구 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첫째로 패러다임의 틀 속에서 자연 세계 현상들의 본질에 대한 사실 탐구, 둘째로 기본 이론들로부터 예측되는 결과를 직접 관찰한 사실과 비교·설명하는 작업, 셋째로 예측과 사실 사이에 부합되는 정도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의 패러다임의 수정·보완 및 명료화 작업으로 분류된다.

정상과학은 수수께끼-풀이(puzzle-solving)에 비유된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푸는 사람들이 확실한 해답이 존재함을 알고, 풀이를 얻는 데 필요한 규칙과 지침을 터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규적 연구에서 패러다임의 기본 이론과 상치되는 결과를 얻는 경우에는, 이론의 성립 여부가 의심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능력 여부가 의문시되는 것이 상례이다. 성급하게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과학자는 마치 '연장을 탓하는 목수격'이 된다.

그러나 그 과학자 사회가 더 이상 설명해 낼 길이 없는 기본 이론과 모순되는 이상 현상들이 누적되는 경우 정상과학은 위기를 맞게되며, 그 반응은 과학연구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기존 패러다임에 기초한 활동과 판단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급기야 새로운 이론 체계들이 나타나며 과학자 사회는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이 때 연구 방법과 현상을 지각하는 관점에서의 대규모 재조정이 수반되며, 개념 체계 역시 재구성의 과정을 겪게 된다. 쿤은 이것을 가리켜 과학혁명이라 일컫는다. 과학자는 그가 속한 분야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자연 세계의 어느 측면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택은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전향을 의미하며, 이렇듯이 새로운 기반(basis)으로부터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과학혁명을 통해서 지식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패러다임들은 논리적 기준에 의해 비교할 수 없는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incommensurability)을 띤다. 하나의 이론 체계를 수용한다는 것은 그것의 개념·법칙·가정들을 포함한 패러다임 전체를 믿는 것을 의미하므로, 따로 분리시켜 비교한다거나 새로운 체계에 의해 옛 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경쟁적인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기준을 전제로 하는 까닭에 논증의 설득력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쿤은 과학혁명을 정치혁명에 비유하면서, 정치혁명의 목적은 기존 제도를 파괴하는 방법을 통해 정치적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므로 정치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생활 양식 사이의 선택은 과학자가 이론 체계의 간결성·사회적 필요성·문제 해결 능력 등의 요소 중 어느 것에 우선성을 부여하는가 하는 개인적·주관적 이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쿤은 이런 전환을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 또는 종교의 개종(conversion)에 비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III

쿤의 과학관은 철학 분야에서 가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이론이 발표될 당시 과학철학 내에서는 이미 제기되어 있던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적 과학철학에 대한 문제점들의 해결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과학 이론의 인식론적 이해에 있어 이론의 내용과 현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종래의 정적·비역사적 고찰로부터 탈피하여 이론의 발견·변천·수용에 걸친 동적·실제적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대두되어 있었던 까닭에, 쿤 이론에 대한 과학철학자들의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뜨겁게 가열된 비판과 반론의 배경을 살펴보건대, 쿤의 용어를 빌자면, 이들 논란의 주된 원인은 양진영이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탓이라 여겨진다.

쿤의 이론은 역사적·실제적으로 과학 활동이 어떻게 수행되는가에 대해 경험적·사회적 측면에서 타당한 설명을 제시한 다음에 규범적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그 반면에 철학쪽의 비평 세력은, 현실 속의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규범에 의해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의미에서의 과학 발전을 설정함으로써, 경험적 근거를 무시한 채 분석적·논리실증적 관점에서의 엄밀하고 명시적인 설명을 요구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 이렇듯이 대비적인 두 시각에서 바라보는 한, 갈등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쿤 이론은 과학사학자·과학사회학자·과학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소의 과학 활동에서 체험한 특성들이 쿤에 의해 구체적으로 체계화됨으로써, 쿤의 기본 개념들은 과학사적 인식과 설명에 요긴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자 사회의 구조·규범·제도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출발점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쿤 이론에 대한 반응은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서 더욱 열광적이었다. 당초 그의 이론에서의 혁명적 불연속성에 관한 발상은 정치·문화·음악·미술 등의 역사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것인데, 이제 쿤의 발전 이론은 그들 분야로 되돌아가 지식의 변천에 관한 모델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쿤 자신은 이러한 원용에 관련하여, 과학과 달리 다른 분야들은 단일 패러다임에 합의하여 비판없이 세부적인 문제-풀이 활동을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한 바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 이외 쿤의 그 밖의 저서로는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와 「The Essential Tension: Selected Studies in Scientific Tradition and Change」(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이 있고, 공저로는 T.S. Kuhn, J.L. Heilbron, P. Forman, eds., 「Sources for the History of Quantum Physics」(Philadelphia, Pa.: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67)와 T.S. Kuhn, Alan L. Porter, eds., 「Science, Technology, and National Policy」(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등이 있다.

IV

쿤의 이론은 아직까지 진화 과정에 있다고 평론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우선, 언어학자 매스터먼(Margaret Masterman)에 의해 분석되었듯이, 패러다임의 의미가 자그마치 스물두 가지로 쓰였을 만큼 모호하다는 비판에 대해, 쿤은 1970년 증보판 후기에서 전문분야 행렬(disciplinary matrix)을 새로이 제안하는 것에 의해 보완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의를 불문하고 패러다임이란 요어는 매우 친숙하게 널리 퍼져 사용되고 있다. 쿤의 이론에서는 또한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의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과 그들 사이의 선택에 관한 설명 등이 특히 공격을 많이 받는 부분이다. 쿤(1964년 이후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 1979년 이후 MIT의 언어학 및 철학과 교수)은 현대의 대표적 사상가답게 매우 설득력 있는 반론을 펴오고 이Ydmsk, 논리적 분석의 엄밀성에서는 아직도 완전한 합의에 이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이 쿤 이론의 중요성을 깍아내리지는 못한다. 그것은 과학과 과학 활동의 본질에 내재한 원천적 모호성, 즉 그것들 자체가 명시적 요소뿐만 아니라 논리에 부합되지 않는 묵시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엄밀하게 분석할 수 없는 요소들이라는 이유로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과학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측면을 경시하는 극단적 입장에 선다면, 결국 과학의 본질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포기하는 길밖에 안 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어쩌면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제시하는 혁명적인 결론 가운데 하나는, 과학도 인간의 여타 활동과 유사한 방식에 의해 변천하는 것이며, 통상적으로 과학의 특성이라고 간주되었던 객관적, 논리적, 경험적, 가치중립적 성격들이 타분야에 견주어 볼 때 그 정도가 더한 것은 사실이나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진리를 실증적으로 보여 준 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쿤은 1987년, 만 65세를 맞으면서 다시 새로운 책의 집필에 진력하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서언에서, 과학지식의 발전과 변천에 관한 그의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지면의 제약을 받았다고 술회했던 만큼 앞으로 출간될 그의 새 책은, 그의 사상의 변천을 보여줌과 동시에 쿤 혁명을 완결시키기라 믿어지기 때문에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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