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0일 토요일

인간과 시장, 노동과 정치

언제부터인지 정치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는 시장이 입는 옷"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그래서 시장의 허망함을 본 뒤로는 정치는 더 허무해보였다. 그저 시장의 춤사위에 색깔만 바꾸는 게 "그것" 같다. 요즈음은 정치의 이념이라는 게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게, 어떻게 내 연락처가 그리로 갔는지 일부 정치인(즉 국회의원)의 보좌관들로부터 핸드폰 문자 메시지가 오는 걸 보면 그렇다.

"오늘 어떤 방송의 뭐시기 프로그램에 아무개 의원님이 나오시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던 "메시지"이지만, 요즈음의 "정치문화"인 것은 분명한데, 이건 "메시지"가 아니라 "광고"다. 이 작은 사례에서도 정치가 시장에 먹혔음을 볼 수 있다. 정치가 이념의 뜻과 생활의 해법을 잇는 아젠다를 대중에게 전하는 게 아니라, TV 출연 자체가 선전인 데다 그 선전을 또 선전하면서 "고객관계관리CRM"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즈음 정치문화의 실태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가치"를 확인하고, 그 가치와 현실의 연결 고리로 자리 매김하는 "이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의 정치는 다음 둘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니 둘 다인 것 같다.

(1) 시장의 애로나 욕구를 풀어주는 대리자들의 게임판
(2) 정치 그 자체가 시장이 되어버린 "인기 연예인들"의 홍보전(혹은 "비인기 연예인들"의 비방전)

그냥 한번 해본 생각이지만, "시장이 정치를 움직인다" 혹은 "경제가 정치를 좌우한다"는 생각은 역설의 극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경제적 하부구조가 정치적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좌파적 사상을 낳았던 맑스의 생각이 바로 이런 생각이기도 하지만, "모든 문제를 시장에 맡겨라"는 신자유주의적 생각도 똑같이 이런 생각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맡기라는 게 무슨 이야기인가? 시장이 필요하다는 대로 제도와 규정을 정하라는 말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어떤 명분과 이념으로 경제질서를 바꾸려한들, "시장과는 이질적인 모든 힘"은 "시장의 힘"에 의해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또 하나의 경제결정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둘의 출발점은 어쩌면 똑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둘이 서 있는 발판이 같다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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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접했던 글에서 좀 다른 시사점을 얻었다. "시장"이 "정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시장도 하나의 제도이고 게임의 규칙이므로 시장 그 자체가 정치라는 생각이다. <시장이 곧 정치>라고 선언한다면 어폐가 심한 말로 들리지만, 시장 그 자체가 <정치의 힘에 좌우되는 제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게임의 규칙."

시장 예찬론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 다음으로 좋아하는 말이다. 규칙을 정하거나 바꾸고, 규칙을 해석해서 행동을 통제하는 것 등등은 모두 정치다. 시장과 인간을 대비한다든가, 경제와 이념을 대비하는 관념을 지워버리고, 노동과 정치를 대비하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단서를 이 글이 주는 것 같았다. 시장도 게임의 규칙이고, 정치가 그 게임의 규칙을 게임으로 삼는 것이라면 말이다.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이 게임의 파노라마가 궁극적으로 가지고 놀겠다는 그 원초적인 대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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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일부를 옮겨본 그 글을 읽다 보니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아도 흥미로운 구석이 엿보인다. 시대와 문화는 달랐어도 육도삼략(六韜三略)에 나오는 강태공의 말도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君子樂得其志
小人樂得其事

군자는 (그 나름의) 뜻이 이루어짐(뜻을 얻음)을 즐거워 하고,
소인은 (그 나름의) 일이 이루어짐(일을 얻음)을 즐거워 한다.

뭐, 동양과 서양의 향취가 전혀 맛이 다르기는 해도, 아렌트의 'Homo laborans'는 어쩌면 강태공이 말하는 '소인'과도 같다. 뜻은 없고 일만 찾는 인간이다. 군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별로 보이지 않고 온통 소인들이 득실대는 세상을 두고 "속세"라고도 할 수 있겠고, 이런 소인들이 넘쳐나다 못해 정치와 제도와 교육이 이들 손에 놀아나는 세상을 두고 "난세"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속세인가 난세인가? 작게는 책을 만들어 읽을거리를 공급하는 출판업계를 보면, 뭐가 잘 팔리는 신호가 보이면 헐레벌떡 달려들어 그런 냄새를 풍기는 책을 내려고 아우성을 친다. 좌파 불온서적을 경계하는 모 정부부처에 대한 언론보도가 나간 뒤로 오히려 그런 책들이 잘 팔리자, 이때가 기회라고 소리치면서 그런 책을 내려고 헐레벌떡인다. 또 거대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금융위기가 지금 이슈다 싶으면, 단 한두 달 만에 대충 그런 제목의 책들을 번역출간하려고 헐레벌떡 달려든다. 그래서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든다.

"책 만드는 뜻은 없고, 책 내는 일만 있다"

그렇게 책 내는 사람들이 책에 담긴 생각에 관심 있을 리 없다. 마치 음식 만드는 사람이 그 냄새에 질려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음식 파는 일에 넋이 나간 모습이 떠오른다. 짜장면 만드는 사람이 자기 노동의 결실이 어떤 내용인지 아무 생각이 없고 팔리는 그릇 수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런 노동의 양상을 두고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노동의 본질이 이러하니, 중금속을 넣든 괴상한 발암물질을 섞든 "난 모르겠다. 쳐먹는 너희들은 돈만 내면 된다"라는 식의 마음이 싹트는 것 아니겠는가?

(...) "난 모르겠다. 책 사는 너희들은 돈만 내면 된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자본주의다 뭐다 하는 거창한 경제체제와 이념을 따지기 이전에, "상품"이라는 범주 자체에 오묘한 "판도라"의 비밀(아니 비밀들)이 숨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과 사상을 통해 인간들이 교류하는 문화여야 할 책마저도 "상품"이란 껍데기를 쓰게 되는 순간, 책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그야말로 껍데기로 둔갑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사에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웅장한 역사를 일궈낸 바 있던 중국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볼 때도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상품", 달리 말해 "시장"이란 것은 어쩌면 인류가 만든 아주 매력적인 물건이지만 지내놓고 보니 쉽게 극복할 수 없는 판도라의 선물인 것 같다.

한편, '뜻'을 좇고 또 즐거워하는 '군자'가 아렌트의 'Homo faber'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렌트는 'Homo faber' 상위에 무얼 하나 더 생각했다고 읽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찾아볼 수밖에. 다행히 이 블로그에 기록해 두었으니 언제고 다시 공부할 수 있겠지...

물론, 이렇게 적어보는 내 생각과 그 글에 드러나는 저자의 생각 사이에는 심한 엇박자가 있다. 그 엇박자를 대비해보며 어디가 맞고 어디서 어긋나는지를 따져보는 게 책을 읽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선생을 찾아가는 이유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이고, 책을 읽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음은 그 글이다. 아직 저자의 논지가 다 드러날 정도로 읽지 못해서 옮기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연습 삼아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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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ust after the Cuban Missile Crisis, the days in 1962 when the world was on the blink of atomic war, I ran into my teacher Hannan Arendt on the street. The missile crisis had shaken her, like everyone else, but it had also confirmed her deepest convicton. In the Human Condition, she had argued a few years previously that the engineer, or any maker of material things, is not master of his own house; politics, standing above the physical labor, has to provide the guidance. She had come to this conviction by the time the Los Alamos project created the first atomic bomb in 1945, Now, during the missile crisis, Americans too young for the Second World War had also felt real fear. It was freezing cold on the New York street, but Arendt was oblivious. She wanted me to draw the right lesson; people who make things usually don't understand what they are doing.

1. 인류가 핵전쟁으로 치달을 뻔했던 쿠바 미사일위기 직후 1962년의 일이다. 그 무렵 거리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선생과 마주쳤다. 미사일위기는 그녀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평소 그녀의 뿌리 깊은 확신을 더욱 굳혀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 몇 해 전에 출간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아렌트는, 엔지니어든 누구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일터의 주인장이 아니라고 주장했었다. 즉 정치가 더 높은 위치에서 물리적 노동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녀가 이러한 확신에 도달한 것은 1945년 로스알라모스Los Alamos 프로젝트의 결과로 최초의 핵폭탄이 만들어졌을 때였다. 미사일위기 당시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미국인들은 심각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뉴욕의 거리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지만, 아렌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덤덤했다. 그녀는 내가 이 사건을 제대로 보고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 그 교훈이란,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2. Arendt's fear of self-destructive material invention traces back in Western culture to the Greek myth of Pandora. A goddess of invention, Pandora was "sent to earth by Zeus as punishment for Prometheus's transgression." Hesiod described Pandora in Works and Days as the "bitter gift of all the gods" who, when she opened her casket (or in some versions, her jar) of new wonders, "scattered pains and evils among men." In the working of Greek culture, its people came increasingly believe tha Pandora stood for an element of their own natures; culture founded on man-made things risks continual self-harm.

2. 인류가 스스로를 파멸시킬 물건을 발명할 수 있다는 아렌트의 우려는 구미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신화의 판도라Pandora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도라는 “명령을 어긴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하려고 제우스가 지상에 내려 보낸”[주1] 발명의 여신이었다. 헤시오도스Hesiodos는 《노동과 나날Works and Days》에서 판도라를 “모든 신들이 모여 만들어낸 고약한 선물”로 묘사했다. 판도라가 전에 없던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그녀의 상자(이야기에 따라서는 단지라고도 나온다)를 열자, “고통과 악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퍼졌다”고 헤시오도스는 전한다.[주2] 그리스 문화가 자기 모습을 갖춰감에 따라 판도라가 인간 ^내면^의 한 속성이라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점점 분명해졌다. 즉 인간이 만든 물건으로 구축된 문화는 항상 화를 자초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3. Someting nearly innocent in human beings can produce this risk; men and women are seduced by sheer wonder, excitement, curiosity, and so create the fiction that opening the casket is a neutral act. About the first weapon of mass destruction, Arendt could have cited a diary note made by Robert Oppenheimer, director of the Los Alamos project. Oppenhemier reassured himself by asserting, "When you see something technically sweet, you go ahead and do it and you argue about what to do about only after you have had your technical success. That is the way it was with the atomic bomb."

3. 그야말로 인간 내면의 순진한 무엇이 이런 위험을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순전히 의혹과 흥분, 호기심에 홀려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위가 아무 탈이 없는 행위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로스알라모스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가 적었던 업무일지는 아렌트가 최초의 대량살상 무기를 보면서 인용할 만한 내용이었다. 오펜하이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술회했다. “무언가 매력적인 기술이 눈에 뜨이면, 우리는 일단 달려들어 일을 벌인다. 그러고는 그 기술이 성공한 뒤에 가서야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따져본다. 원자폭탄은 바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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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s her student almost a helf-century ago, I found her philosophy largely inspiring, yet even then it seemed to me not quite adequate to deal with the material things and concrete practices contained in Pandora's casket. The good teacher imparts a satisfying explanation; the great teacher --as Arendt was--unsettles, bequeaths disquiet, invites argument. Arendt's difficulty in dealing with Pandora seemed to me, dimly then amd more clearly now, to lie in the distinction she draws[,] a distinction Animal laborans and Homo feber. (...) These are two images of people at work; they are austere images of the human condition, since the philosopher excludes pleasure, play, and culture.

4. 근 50 년 전에 아렌트 선생과 공부할 때, 그녀의 철학은 많은 영감으로 번득였지만, 판도라의 상자 안을 들여다보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만드는 물건들과 구체적인 행위를 다루는 데까지는 파고들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항상 만족스럽게 답해주는 좋은 선생은 아닐지 몰라도, 균형을 깨고 혼란을 유발하며 논증을 유도하는 그 이상의 훌륭한 선생이었다. 아렌트가 판도라를 다룰 때 부딪쳤던 난관은 (그때는 희미했고 지금은 좀 더 분명해졌지만) 그녀가 ^아니말 라보란스^와 ^호모 파베르^를 구분했던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이 두 가지는 일하는 인간의 이미지다. 그녀는 이 두 가지를 쾌락과 놀이, 문화가 배제된 인간의 조건으로 보았던 만큼 인간에게는 가혹한 개념이었다.

5. Animal laborans is, as the name implies, the human being akin to a beast of burden, a drudge condemned to rountine. Arendt enriched this image by imagining him or her absorbed in a task that shuts out the world, a state well exemplified by Oppenheimer's feeling that the atomic bomb was a "sweet" problem, or Eichmann's obsession with the gas chambers efficient. In the act of making it work, nothing else matters; Animal laborans takes the work as an end in itself.

5.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borans는 굴레를 짊어진 짐승처럼 매일 고된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인간, 즉 ‘일하는 동물’이다. 아렌트는 세상과 차단된 채 일에 몰입해 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일하는 동물’의 이미지를 더 확장했다. 원자폭탄을 “매력적”인 문제로 느꼈던 오펜하이머의 상태나, 아주 효율적인 가스실을 만들려고 절치부심했던 아이히만의 상태는 다름 아닌 일하는 동물인 것이다. 그 일이 되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다. ^아니말 라보란스^에게는 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6. By contrast, Homo faber is her image of men and women doing another kind of work, making a life in common. Again Arendt enriched an inherited idea. The Latin tag Homon faber means simply "man as maker." The phrase crops up in Renaissance writings on philosophy and in the arts. Henri Bergson had, two generations befor Arendt, applied it to psychology; she applied it to politics, and in a special way. Homo faber is the judge of material labor and practice, not Animal laborans's colleague but his superior. Thus, in her view, we human beings live in two dimensions. In one we make things; in this condition we are amoral, absorbed in a task. We also harbor another, higher way of life in which we stop producing and start discussing and judging together. Whereas Animal laborans is fixated in the question "How?" Homo faber asks "Why?"

6. 반면 아렌트가 말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다른 종류의 일, 즉 공동의 삶을 만드는 인간의 이미지다. 여기서도 그녀는 예로부터 이어져온 이 관념을 더욱 확장했다. 라틴어 ^호모 파베르^는 “제작자man as maker”를 뜻하는 단순한 말이다. 이 표현은 르네상스 시기 철학과 예술에 갑자기 등장한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아렌트보다 두 세대 전에 이 용어를 심리학에 적용했는데, 그녀는 특수한 방식으로 정치철학에 적용했다. ^호모 파베르^는 물질적인 노동과 행위를 판단하는 존재다. ^아니말 라보란스^의 동료가 아니라, 그 위에 선 상위자다. 즉 그녀는 우리 인간이 두 가지 차원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우리가 물건을 만들며 사는 차원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는 그저 일에 함몰된 채로 도덕이나 윤리를 모른다. 동시에 우리는 이보다 높은 다른 차원에서도 살고 있다. 이 차원에서 우리는 만드는 일을 멈추고, 서로 어울려 토론과 판단을 시도한다. ^아니말 라보란스^는 “어떻게?”라는 질문밖에 하지 않는다. ^호모 파베르^는 “왜?”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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