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30일 토요일

“natural superiors”

작년에 번역하던 책에서 만났던 표현이다. 칼 맑스의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 제1장에서 인용된 한 소절에서 나온다. 인용문을 옮겨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The bourgeoisie, wherever it has got the upper hand, has put an end to all feudal, patriarchal, idyllic relations. It has pitilessly torn asunder the motley feudal ties that bound man to his “natural superiors”, and has left remaining no other nexus between man and man than naked self-interest, than callous “cash payment”. It has drowned the most heavenly ecstasies of religious fervour, of chivalrous enthusiasm, of philistine sentimentalism, in the icy water of egotistical calculation.

“natural superiors”라고 따옴표까지 친 것을 보면, 맑스가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걸어주고 싶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어로 번역된 원문이 흐르는 문맥은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제 사회관계들이 존재하고 있을 때 새로 출현한 부르주아지가 그 관계들을 해체하는 과정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

"natural"의 의미를 우리말로 옮기기 어렵다. "자연스러운 상관/높은 분"(??)이라고 읽으면 영 문맥에 맞질 않는다. 봉건적 사회질서 하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정치/경제를 포함해 생사여탈권에 가까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상위계급을 지칭하는 말이고, 그들과 그들이 의존하는 사회관계가 해체됨을 묘사하는 문맥이니, 더욱 그렇다. 또 맑스가 "자연의", "자연스러운"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로 쓰고자 했다면 따옴표를 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natural"의 의미도 강하게 살리고, 그 앞에 나오는 "봉건적feudal"이 주는 어감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우리말 표현이 떠올랐다.
바로 "하늘같은 상전"이다.

상전(上典 )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종(노비)과 대비하여 그 주인을 일컫던 말이다. "하늘같은"이라고 하면 그 상전의 권력이 어마어마하고 아주 예전부터 이어진 것이어서 "하늘처럼 당연하다(as natural as the sky)"라는 뜻을 실어줄 수 있다. 다음은 내가 옮긴 번역문이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우위를 장악한 곳마다 온갖 형태의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종식시켰다. 그들은 인간을 "하늘같은 상전"에게 묶어둔 각양각색의 봉건적 유대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노골적인 자기 잇속과 냉정한 "현금 지불" 이외에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그 어느 연결고리도 남겨두지 않았다. 종교적 열정과 기사도적인 정열로 표출되거나 혹은 속물적인 감상주의에서나마 엿보이던 인간의 가장 강렬한 정감들이 모조리 이기적인 계산의 차가운 바다 속에 잠겨버렸다

누구나 잘못 읽을 수 있고 누구나 오역을 범할 수 있으니, 이 번역문 역시 틀렸거나 효과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혹시 번역비평을 해주실 분이 나타나신다면, 감사히 경청하고 싶다. 왠지 번역문 문장 세 개 중의 마지막 문장을 수동형으로 옮긴 것이 마음에 걸린다. 영어 원문에는 줄기차게 부르주아지를 주어로 삼아서 그 "능동형"의 행위와 작용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작년 이렇게 옮길 때는 이미 이 주어가 두 문장에서 반복되었으니, 영어 원문 상의 목적어(종교적 열정과 기사도적인 정열로 표출되거나 혹은 속물적인 감상주의에서나마 엿보이던 인간의 가장 강렬한 정감들: the most heavenly ecstasies of religious fervour, of chivalrous enthusiasm, of philistine sentimentalism)를 주어로 빼돌려서 앞의 두 문장에서 능동으로 표현된 주어가 작용한 결과로 표현하는 것도 괜찮은 전달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또 궁금해진다.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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