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일 금요일

[발췌: 로버트 프로스트] 진흙 철의 두 뜨내기


※ 발췌:

출처 1: "그치지 않는 지상의 사랑노래; Robert Frost 시 연구" (이지아, 국민대 영문학과 3학년. 북악문화상 학술상/인문과학(문학). 2009.11.0.

( ... ... ) 또한 프로스트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지상에서의 일상에 충실한 삶인 동시 "Two Tramps in Mud Time"에서 강조하듯이 '생업'과 '도락'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진흙길로부터 두 이방인이 다가와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나를 보고는
그 중 하나가 내게 “세게 치쇼!” 라고
외쳐서
내가 장작을 빗나가게 치도록 만들었다.
나는 왜 그가 뒤에 처지고
딴 사람을 먼저 가게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삯을 받고 나의 일을 하길 원했다.

Out of the mud two strangers came
And caught me splitting wood
- in the yard,
And one of them put me off my aim
By hailing cheerily 'Hit them hard!'
I knew pretty well why
- he dropped behind
And let the others go on a way.
I knew pretty well what he had in mind:
He wanted to take my job for pay.

이 시에서 화자는 장작을 패고 있는데, 뜨내기 일꾼이 다가와 더욱 세게 치라고 외친다. 이에 화자는 그의 생각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는 화자 대신 작업을 해서 품삯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잇듯이 '진흙 시간(Mud Time)'이라는 것은 이른 봄철에 언 땅이 녹아서 길이 진흙탕이 된 시기를 뜻한다. 따라서 봄철에는 시골에 일거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일꾼은 화자의 작업을 대신해서 조금이라도 품삯을 받으려 한 것이다. 화자는 그 속마음을 짐작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장작을 팬다.

양편에 아무 말도 오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다릴 만큼 기다리면 자연히
그들의 논리가 내 머릿속을 채우리라
믿었다.
돈벌이가 되는 다른 사람의 일을
내가 장남 삼아 할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의 권리는'사랑'이지만 그들의
권리는 '필요'였다.
이 둘이 함께 존재할 경우
그들의 것이 보다 나은 권리였다
- 인정한다.

Nothing on either side was said.
They knew they had but to say
- their stay
And all their logic would fill my head:
As that I had no right to play
With what was another man's work
- for gain.
My right might be love but
- theirs was need.
And where the two exist in twain
Theirs was the better right
- agreed.

뜨내기 일꾼의 생각을 이미 알아차린 화자는 이제 그들과 대치하여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장작만 패고 있다. 반면 일꾼들은 화자를 조금만 더 기다리기만 하면 그 작업이 곧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 믿으며 기다린다. 화자는 장작 패는 일을 그저 놀이 삼아 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생계와 바로 직결되는 돈벌이 수단으로써 그 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 상황을 통해 사물과 일의 양면성, 즉 '즐거움'을 위한 권리와 '필요'를 위한 권리에 대하여 사색을 하게 되고, 놀이 삼아 일하는 것과 먹고 살기 위하여 일하는 것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우선권을 줘야 한다면 그것은 후자가 되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화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되 이 둘을 절대적인 가치로 분리하기보다는 서로 공존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는 두 가지 가치의 합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양자의 분리를 인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 삶의 목표는
내 두 눈이 합쳐져
하나의 시력을 이루듯이
도락과 생업을 결합시키는 일이다.
'사랑'과 '필요'가 하나가 될 때만,
일이 심각한 목적을 위한 놀이일 때만,
그 행위는 천국을 위하여,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진정으로 행해진다.

But yield who will to their separation,
My object in living is to unite
My avocation and my vocation
As my two eyes make one in sight.
Only when love and need are one,
And the work is play for mortal stakes,
Is deed ever really done
For Heaven and the future's sakes.

화자는 이 양자의 결합을 인간의 두 눈에 비유한다. 두 눈이 모여 하나의 시력을 이루듯이, 행위가 '심각한 목적'을 위한 '놀이'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은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스트는 이 시를 통해 행위의 즐거움과 필요가 일치를 이룰 때 삶이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함으로써, 도락과 생업을 일치시키는 인생이야말로 천국과 미래를 위한 바람직한 삶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즉 지상에서 인생을 보다 뜻 깊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와 더불어 즐거움이 함께 동반하는 행위로 삶을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미 있는 지상에서의 삶을 위해 시인이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즐거움과 필요, 이 둘 중 하나에 치우친 삶을 산다면 그 삶은 무의미해진다.  ( ... ... )


출처 2: 로버트 프로스트의 두눈보기 (우상균, 현대영어영문학, 55권 3호. 2011. 여름  89-114.

( ... ... ) 프로스트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하고 고전주의자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것들 간의 조화나 균형은 그의 작품 속에서 대부분 매우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간과하기 쉽다. 그거슨 하나의 입체적 영상이 그렇듯 두 개로 보이지는 않지만 각기 다른 두 눈으로 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진창철의 두 뜨내기>는 도락과 생업이라는 대조적인 것들의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태도를 주제로 하는 작품이고, 그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결론적 진술을 하고 있다.

누가 양자의 분리를 용납하든
나의 삶의 목표는
눈이 둘이지만 보이는 것은 하나로 만들 듯
도락과 생업을 통일시키는 것.
오직 취미와 필요가 합일되고
일이 생사가 달린 놀이일 때,
행위는 진정 이루어진다,
천구과 미래 그 자체를 위해.

But yield who will to their separation,
My object in living is to unite
My avaocation and my vocation
As my two eyes make one in sight.
Only where love and need are one,
And the work is play for mortal stakes,
Is the deed ever really done
For Heaven and the future's sakes.

이 논문은 프로스트의 다른 중요 작품들의 분석을 통해 이런 ‘두눈보기’가 특정 작품의 주제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시학의 근간임을 확인함으로써 그의 시를 이해하는 지평을 넓이고, 그에 대한 일부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으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프로스트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그것이 시적 은유에 대한 그의 생각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 다음, 거기에 기초하여 그의 중요작품들 중 ‘돌아오기’를 주제로 하는 작품들과 ‘선택’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을 분석하려고 한다.

( ... ... )


출처 3: On "Two Tramps in Mudtime" (Modern American Poetry)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