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9.
※ 검토 기간: 4/29~30, 5/1~4, 5/7~9 (총 9일 중 실투입 일수 7일)
- 지은이: 찰스 휠런(Charles Wheelan)
- 서명: “벌거벗은 화폐: 화폐는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를 밝힌다” (Naked Money: A Revealing Look at What It Is and Why It Matters)
※ 들어가기:
총 300쪽의 본문 중 약 280쪽 정도를 준 속독으로 읽어 보니, 검토 의견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식으로 작성하는 것이 효과적이겠습니다. 아래 총평에서 밝히듯이 ‘이 책이 좋은(혹은 나쁜) 이유’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대단히 훌륭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발주자가 전화와 메일에서 언급하셨듯이, 좋은 책이더라도 ‘정말 승부를 걸어볼 만큼 내용도 좋고 대중적으로 두루 읽힐 수 있는 책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감을 잡을 수 있도록 발췌 번역 중심의 재료를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a) 화폐라는 것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개념적(논리적)인 호기심을 사실적인 소재와 명쾌한 논리로 풀어갑니다.
b) 그뿐 아니라, 화폐와 신용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아주 현실적인─즉 시의성이 매우 높고 시사 상식 차원의 지명도가 높은─세계의 현안과 현상들을 알기 쉽게 해설합니다. 즉,
- 최근 2008년의 금융 위기 및 모기지 파생 증권 등 부동산 금융,
- 그 후의 세계적 불황 및 물가 하락(디플레이션) 기조,
- 그리스의 채무 불이행 및 구제 금융의 문제 등 유로권의 붕괴 위기와 유로화의 장래,
- 일본의 장기 불황과 아베노믹스의 성패,
- 중국과 미국의 불안하고 기형적인 경제적 의존 관계 (미국에 수출해야 먹고사는 중국 vs. 중국에 국채를 계속 팔아야 재정과 금융 시장을 지탱할 수 있는 미국), 중국의 위안화 저평가 조작 등,
- 비트코인과 디지털 암호 화폐,
-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금본위제 복귀 주장 등에 대해 다룹니다.
c) 경제에 관해 호기심은 있지만 어려워하는 일반 독자들을 기필코 유혹하고야 말겠다고 작정하고 저술한 책으로 보입니다.
- 각 장의 서두를 개념과 이론으로 시작하지 않고, 구체적인 시공의 사실적인 이야기로 시작한 뒤, 호기심을 낚는 의문을 던지고, 이어서 논리적으로 해설하는 식의 서술입니다.
- 사이사이 위트와 농담을 잘 섞어서 독자로 하여금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도록 유도합니다.
나. 서문(Introduction)의 발췌 번역: 원문 총 8쪽 중 첫 6쪽, 25개 문단의 전문 번역
1) 당신의 지갑에서 2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라. 양질의 종이다. 섬유 함량이 높아 빨래에 섞여 들어가도 멀쩡한 채로 나온다. 그래도 종이는 종이다. 종이에 새겨진 인쇄의 질이 훌륭하다. 그래도 미술품에 견줄 정도는 못 된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점은, 지폐 어디에도 소지자에게 무얼 돌려주겠다는 약속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금을 돌려준다든가, 은을 돌려준다든가 하는 문구가 전혀 없다. 지폐는 아무런 내재적 가치도 없는 그냥 종잇조각이다. 미국의 통화 발행을 주관하는 당국은 연방준비제도인데(이곳의 결정에 따라 재무부는 인쇄만 한다), 당신의 지폐를 그곳에 가져가 제시해 보라. 그곳 공무원들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에 속하는 지역별 연방준비은행(이하 ‘지역 연준’)이 여러 개 있는데, 가령 시카고 지역 연준에는 금화나 은화와 같은 근사한 물건들로 가득 찬 소형 박물관도 있다. 그곳 로비에서 당신이 20달러짜리(혹은 좀 더 묵직한 100달러짜리) 지폐를 흔들며 그처럼 값진 물건들로 바꿔 달라고 요구해 보라. 분명 당신은 이상한 시선을 받으며 건물 밖으로 끌려 나올 것이다.
2) 그러면 20달러짜리 지폐의 가치는 무엇인가? 아무 가치도 없는 건 아니다. ^20달러짜리 지폐는 대충 20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다.^ 이것이 바보 같은 말은 아니다. 적어도 겉보기만큼 바보스러운 말은 아니다. 20달러짜리 지폐를 샌드위치 가게에 가져가면 2인분의 근사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식품점에 가져가면 닭 가슴살 3파운드 분량이나 피노느와 포도주를 병째로 하나 구할 수 있다. 미국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 그 바깥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20달러짜리 지폐의 값어치가 얼마나 나가는지 매우 정교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혹시 그 지폐를 길바닥에 떨어뜨리면 그들은 그걸 주우면서 아주 기뻐할 것이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숱한 종잇조각이 그런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3) 이 책은 화폐에 관한 책이다. 당신 주머니 속의 그 종잇조각들이 어떻게 그러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지, 겉보기에는 분명 쓸모없는 종잇조각을 실물 재화와 교환하는 기묘한 관행이 현대 경제에서 얼마나 근본적인가를 설명하는 책이다. 물론, 이 문제를 다루다 보면 우리가 수표를 쓰거나 휴대폰을 두드리거나 네모난 플라스틱을 건네주고서 새 가구나 사무 용품, 심지어 자동차를 사 가지고 나오는 훨씬 더 기묘한 관념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책의 목적 및 화제에 대한 첫 언급. 목차상 주로 1장에 해당하고 그 밖에도 7장, 13장에 해당]
4) ^사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돈으로 할 수 있다.^ 화폐는 단지 우리 지갑 속의 지폐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금융 시스템 전체가 단순하지만 강력한 관념, 즉 신용의 바탕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은행들과 은행처럼 기능하는 다수의 기관들은 대부자와 차입자를 조응시키는 (물론 이런 서비스로 보수를 챙기는) 중개 기관들이다. 이러한 대부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바로 금융 기관들이 신용을 창조함에 따라 통화량(혹은 통화 공급량)이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사례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1. 나는 1만 달러를 가지고 있고, 당신은 아무 돈도 없다.
2. 나는 이 1만 달러를 은행에 예치하고, 그 은행은 당신에게 9천 달러를 빌려 준다.
3. 나는 은행에 예치해 놓은 1만 달러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이 예금을 바탕으로 수표도 쓸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9천 달러를 가지고 있다.
4. 통화량, 즉 지금 당장 물건과 서비스를 사는 데 쓸 수 있는 돈의 양은 1만 달러에서 이제 1만 9천 달러로 늘어났다.
5) 와! 이것이 신용의 위력이다. 물론, 엄밀하게 보면 내가 소유하는 돈을 당신이 쓴다는 사실은 경제적으로 강점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불안정의 원인이기도 하다. 신용 덕분에 일어나는 좋은 소식을 보자. 학생들이 대학에 다닐 수 있고, 수많은 가정이 집을 살 수 있으며, 기업가들이 신규 사업을 개시할 수 있다. 은행 부문은 우리가 남의 자본을 생산적인 용도에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6) 나쁜 소식도 있다. 신용이 (2008년 금융 위기 때처럼) 잘못되면, 경제 전체가 파괴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내가 갑자기 돈이 필요한데, 당신이 가령 그 돈을 집이나 자동차를 사거나 레스토랑을 사는 데 써 버려서 빌린 돈을 갚을 수 없는 처지라면 문제가 생긴다.
7) ^금융의 역사는 금융 공황(혹은 패닉)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부자들이 돈을 돌려받으려고 하는데 차입자들이 당장 그 돈을 마련할 수 없다면, 대부 거래를 중개한 기관이 파산할 수 있다. 그런데 금융 기관들이 파산할 위험에 처하면, 더 많은 대부자들이 자기 돈을 찾으려고 금융 기관에 몰려든다. 일단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파산을 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2008년에 우리는 사람들이 불안해하자 아주 멋진 명칭으로 불리던 금융 부문의 요소들(가령 환매 조건부 채권 시장이라든가 기업어음 시장 등)이 대공황 때의 은행들과 똑같이 인출 쇄도에 무력해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8) 시스템이 잘 돌아갈 때는 화폐와 신용이 시스템에 윤활유를 쳐 주고 인간의 창의성에 힘을 실어 준다. 하지만 2008년처럼 시스템이 고장 날 때는 거대한 금융의 구조물이 와르르 무너지고 사람들은 혹독한 희생을 치른다. 이 책은 이러한 금융 위기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4장과 9장에 해당]
9) 미국의 연준이나 영국의 잉글랜드은행, EU의 유럽중앙은행 같은 중앙은행은 이러한 모든 문제를 관리하는 주된 책임을 가진 기관이다. 중앙은행들은 통화의 가치를 유지하고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보호할 책임을 진다. (미국의 연준은 이에 더하여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여 완전 고용을 촉진해야 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이러한 기관들은 대단한 권능을 부여받는다. 새 돈을 찍어 내는 배타적 권한이 그중 하나다.
10) 그렇다. 미국의 연준은 새 돈을 바로 찍어낼 수 있다. 그리고 돈을 찍어내는 권한은 엄청난 재량권을 요구하는 권한이다. 2008년 이래로 중앙은행 당국자들은 굉장히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최근에 연준 이사회 의장(옐렌, 버냉키, 그린스펀, 볼커)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미국인들이 아마도 대법원장(로버츠, 렌키스트, 버거, 워런)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사람보다 많을 것이다.
11) 미국에 금융 위기가 터지고 나면 연준이 경제 회복을 지원하는 일을 너무 적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너무 많이 아는 것이냐를 놓고 항상 정치적 싸움이 벌어졌다. 낮은 금리는 더 많은 실직자가 일자리를 얻고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이 더 높은 임금을 받도록 도움을 준다. 반면에 낮은 금리는 저축자를 처벌하고, 금리가 너무 오랫동안 너무 낮은 수준에 머물면 물가 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후보 릭 페리는 연준 의장 벤 버냉키의 공격적인 금융 위기 대응을 반역적이라고까지 묘사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건 부당하고 부적절한 발언이지만, 정치에 대한 감을 느낄 수 있는 발언이다.)
12) 그런데 뭐, 이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역사 과목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1896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그가 했던 유명한 “크로스 오브 골드” 연설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는 아직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되기 전이었지만, 브라이언은 고금리가 빚을 지고 사는 미국 농민들을 처벌하고 있으며, 해결책은 돈의 양을 늘리는 것(구체적으로는, 금에 더하여 은을 본위 화폐로 삼는 통화 발행)이라고 주장했다.
13) 그러니까 2012년에 릭 페리는 새로 찍어 내는 돈을 줄이기를 원했다. 반면에 1896년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더 많이 찍어내기를 원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을 리가 없다. 큰 맥락에서 보면 이 책은 연준이 무슨 일을 하고, 그 일을 어떻게 하며, 그 일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5장, 8장, 9장, 14장에 해당]
14) 이런 문제들이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쓰는 작은 종잇조각들이 있다. 그러한 나라들에서도 화폐는 정치적 싸움을 초래한다. 대서양 건너 독일인과 그리스인들은 사랑이 식어 버린 70세 부부처럼 여러 해 동안 티격태격 충돌했다. 독일과 그리스는 EU의 나머지 17개국과 함께 (그리고 EU 밖의 소수 나라들을 포함해) 공동 통화, 유로를 도입했다. 단일 통화 유로가 근 이십 년 전에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유럽 대륙 나라들을 통합할 거라는 높은 기대와 함께 출범했다. 그사이 이 웅장한 실험의 매력은 시들해졌다. 유로를 도입한 뒤로 생산성이 제일 떨어지는 대륙의 경제─그리스뿐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는 힘겨운 상황에 처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나라들은 가장 중요한 거시경제적 도구 몇 가지를 상실했다. 그들이 상실한 도구는 독일 같은 경제 강국과 동일한 통화를 쓰지 않고 그들 자신의 통화를 가져야만 쓸 수 있는 것들이다(일례로 금리를 정하고 통화의 가치를 관리하는 것이다). 유로의 미래는 여전히 의문이다.
15) 그래서, 이 책은 이런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책이기도 하다. [6장, 7장, 11장에 해당]
16) 태평양 건너 중국 정부는 자신의 통화, 위안화를 관리해 왔다. 중국은 통화 이외의 나머지 경제 요소들을 관리하는 방식과 똑같이 통화를 관리한다. 즉 정부가 무지막지하게 감독하는 방식이다. 십 년이 넘도록 미국의 의원들을 비롯해 국제통화기금의 책임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찰자들이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낮추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악하다고까지 욕을 들어먹는 중국 정부의 이러한 행동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팔리는 중국 상품들의 가격을 낮추어서 중국의 수출을 촉진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함으로써 중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2015년 여름, 중국 주식 시장의 폭락에 대응하고자 중국 정부가 위안화 가치를 2% 떨어뜨리자 미국 정치인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중국의 조치를 불공정한 무역 관행이며 “중국의 통화 정책을 신뢰할 수 없는 추가적 증거”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17) 이런 사태는 몇 가지 점에서 이상한 일이다. 첫째, 미국의 의원들은 중국이 우리에게 공정한 수준보다 더 값싸게 물건을 판다고 비난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불평이다. 둘째, 이 이야기와 앞서 소개한 유로화 이야기는 알다가도 모를 수수께끼 같다.
18) 즉, 여러 나라가 (유로의 경우처럼) 통화를 공유하면, 통화에 얽힌 마찰이 일어난다.
19) 그런데 여러 나라들이 (달러와 위안의 경우처럼) 독자적 통화를 가지게 되면, 그때도 통화에 얽힌 마찰이 일어난다.
20) 이 책은 통화와 환율, 그리고 여러 나라들이 서로 다른 지폐를 통화로 사용할 때 일어나는 마찰에 대해서 다루는 책이고, 동시에 여러 나라들이 통화를 공유할 때 발생하는 전혀 다른 난점들에 대해서도 다루는 책이다. [6장, 7장, 11장, 12장에 해당]
21) 그런데 일본의 사정은 더욱 이상하다. 아베 신조가 총선에 승리해 총리로 선출됐고 다시 재선에 승리했는데, 그가 내건 약속은 물가를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잘못 읽은 게 아니라, 분명히 물가를 높이겠다고 했다. 일본은 20년이 넘도록 물가 하락(디플레이션)을 겪었고, 일본의 지도자는 경제를 건강한 상태로 회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물가 하락을 끝장내겠다고 다짐했다. 1970년대 미국의 물가 상승을 겪었거나 그 시기에 대해 읽어 본 독자라면, 책임 있는 정부가 물가를 올리겠다고 약속한다(나아가 물가를 올리지 못해 혹독하게 심판까지 받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물가 상승(인플레이션)과 물가 하락(디플레이션), 그리고 20년 동안 일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를 다루는 책이다. [2장, 10장에 해당]
22) 다시 미국 이야기를 하자면, 미국 의원들이 너무 값싸게 물건을 판다고 중국을 비판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사이 그들은 2008년 금융 위기에 대응하느라 은행을 비롯한 금융 기관들을 규제할 새로운 장치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금융 위기에 대한 대응을 한마디로 집약하는 말을 꼽자면 구제 자금이다.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은행을 구제해 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저런 개입을 하면서 수도 없이 돈을 찍어낸 바 있지만, 그것은 유권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세부 사항들이다. 그들은 무모한 대부자들과 차입자들이 저지른 잘못을 해결해 주느라 세금을 쓰는 사태에 분노하고 있으며, 마땅히 분노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도무지 가시지 않는 문제는 규제 당국이 좀 더 안전한 금융 시스템을 만들어 온 것이냐, 아니면 그저 다음번에 또 다른 종류의 금융 공황이 터질 길을 닦아 온 것이냐 하는 점이다. 다수의 예리한 사람들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인 것 같다고 우려하고 있다.
23) 이 책은 1929년과 2008년의 시장 붕괴를 포함하여 금융 위기를 다루는 책이다. (스포일러로 공개하자면, 나는 이번 위기 때는 또 다른 대공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많은 일을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4장, 9장에 해당]
24)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사이, 인터넷에서는 화폐에 관한 일임에도 미국의 의회나 어느 나라 정부도 감독할 방도가 거의 없는 아주 절묘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 통화’가 생겨난 것이다. 정부가 찍어내는 아무런 내재적 가치도 없는 종잇조각이 화폐로 쓰이는 것만큼 기묘한 일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제는 ^종이마저 없고 정부도 개입할 수 없는^ 화폐가 등장했다! 컴퓨터 사용자들이 복잡한 알고리즘을 풀어내면 비트코인이란 것이 ‘채굴'되고’,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놀랍게도 이 비트코인이 실물 재화와 서비스를 사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더욱 이상하게도 비트코인이 작동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낸 사람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면 가명을 쓰는 프로그래머 집단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사람이다. 여태 아무도 자신이 그 프로그램을 짰다고 나서지 않았다. 이 책은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있는 한에서 비트코인에 대해 설명한다. [13장에 해당]
25)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현상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화폐다. 혹은 더 폭넓게 보면 화폐와, 은행이 하는 일, 그리고 중앙은행이 하는 일이다. 서로 얽혀서 현대 경제의 핵을 이루는 제도가 바로 이 세 가지다. 화폐는 우리가 거래를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로마 시대의 소금 포대도 화폐였고, 교도소 안의 고등어 자루도 화폐였다. 인터넷에서 불법적인 마약과 무기를 살 때 쓰이는 비트코인도 역시 화폐다. 그리고 물론, 그 밖의 합법적인 물건과 서비스를 살 때 쓰이는 달러와 유로와 엔 등 각국 정부의 통화도 화폐다.
[이하 2쪽 생략]
다. 차례
a) 책의 1부는 화폐의 본질을 다루는 ‘이론편’이라고 볼 수 있고, 2부는 화폐(와 신용)의 문제가 세계 경제의 현장에서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풀이하는 ‘응용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b) 이론편이라고 해서 이론적 내용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응용편이라고 해서 이론적 화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앞에 배치해 독자들에게 먼저 얘기해 두는 게 더 효과적인 기초적 화제들이 1부에 있고, 1부의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동원해서 얘기하는 게 더 편한 좀 더 복잡한 화제들이 2부에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c) 모든 장이 하나같이 총평 (c)와 같은─즉, 사실적 이야기→호기심 던지기→논리적 해설+위트/유머─스타일로 거의 똑같이 저술되어 있습니다.
서문
제1부 화폐란 무엇인가
- 1장. 화폐란 무엇인가? (3)
- 2장. 물가는 왜 오르내리나?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19)
- 3장. 물가를 둘러싼 과학, 기술, 정치, 심리학 (40)
- 4장. 신용과 (신용의) 붕괴 (60)
- 5장. 중앙은행의 임무 (80)
- 6장. 환율과 글로벌 금융 시스템 (105)
- 7장. 금 (135)
- 8장. 미국의 화폐 역사에 대한 개관 (155)
- 9장. 1929년과 2008년 (181)
- 10장. 일본 (210)
- 11장. 유로화 (227)
- 12장. 미국과 중국 (246)
- 13장. 화폐의 미래 (263)
- 14장. 더 나은 중앙은행을 향하여 (282) ... 주석 (307) ... 색인 (331)
다. 1장, “화폐란 무엇인가” 발췌 번역: 총 16쪽 중 첫 4쪽, 9개 문단 전문 번역(서두 인용문 생략)
1) 2009년 북한은 이 나라 자체의 표준에서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은 일을 단행했다. 이 나라 모든 지폐에 표시된 금액 숫자에서 0을 두 자리 떼어 버리는 새로운 통화를 발행한 것이다. 즉, 새 통화 1원이 구 통화 100원과 동등하다고 포고되었다. 이런 통화 개혁이 그다지 새로운 수법은 아니다. 과거에도 여러 나라가 물가 상승에 대처하는 방편으로 금액 표시의 자리 수를 줄이는 새 통화를 발행했다. 브라질도 1994년에 물가 상승에 찌든 크루제이루 헤알화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통화 헤알화를 발행했다. 브라질 정부는 새 통화 1헤알이 2750 크루제이루 헤알과 동등하다고 포고했다.
2) 구 통화가 새 통화와 아무런 제한 없이 교환될 수만 있다면 이런 조치가 소비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가령 지금 미국에 달러화는 없고 모든 물건 값이 달러의 1/100인 페니화로만 표시된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다 정부가 어느 날 페니는 이제 법정 통화가 아니라고 포고한다. 이제부터 100페니를 새 통화 1달러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모든 가격도 달러로 표시된다. 그때까지 200으로 표시되던 물건은 이제 2로 표시된다. 구매력 면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페니를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달러를 많이 가지게 될 뿐이다. 은행 계좌를 새 통화에 맞게 바꾸는 일은 더 간단하다. 모든 계좌에서 숫자를 두 자리 수만큼 줄이면 그만이다. 물가도 낮아 보일 것이다(따라서 숫자 단위를 줄이는 것이 물가 상승과 싸우는 방편이 된다). 그래도 사람들마다 모아둔 재산을 보면 변하는 건 없다. 부유한 사람은 여전히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다. 단지 부유하고 가난한 것의 차이가 페니로 표시되다가 달러로 표시될 뿐이다.
3) 여섯 살만 넘으면 누구라도 5달러가 500페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여섯 살 아이라도 둘이 다르다고 속는 것은 한두 번뿐이다.) 사람들이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할 동전의 수가 줄어들 것이다. 상점에서는 이제 페니를 받지 않는다. 어쩌다 혹시 소파 방석 밑에서 수백 페니가 나왔더라도 은행에 가져가면 달러로 바꿀 수 있다. 브라질 사람들은 구 화폐를 신 화폐로 바꾸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독일 같은 일부 유럽 나라들은 구 화폐(독일 마르크화)의 동전과 지폐를 영구적으로 유로화로 바꿔 주겠다고 했다. 독일이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유로화를 도입한 것은 15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4) 하지만 북한은 다른 나라들 같지 않다. 북한 정부는 통화 개혁을 추진할 때 제한된 금액의 구 통화만을 신 통화로 바꿔주겠다고 포고했다. 그 제한된 금액을 공식 환율로 환산하면 대략 690달러(암시장 환율로 치면, 단지 35달러)에 불과했다.[각주]* 그렇다면 구 통화로 많은 금액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모아둔 재산의 큰 부분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바로 이것이 통화 개혁의 핵심이었다. 북한 정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배급제 방식의 공식적인 경제 바깥에서 일어나는 암시장 활동을 참아줄 수 없었다. 암시장 거래자들은 큰 금액의 현찰을 깔고 앉아 장사를 해 왔다. 그러니 정부의 펜대 하나로(혹은 북한의 위대한 영도자가 새 법을 포고하는 수단이 무엇이든 간에) 북한 정부는 불법적으로 축적된 재산의 대부분을 몰수한 것이다.
5) 암시장 거래자들 말고 다수의 평범한 북한 사람들은 겨울과 봄 사이 배를 곯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들 역시 현찰을 상당 정도 모아두기는 마찬가지였다. 통화 개혁 포고가 나오자 북한에서 아주 드물게 흘러나오는 뉴스에 따르면, 저축자들이 구 통화를 새 통화로 바꾸려고 집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시장과 정거장이 난리 통이었다”고 한다.[주]3 왜냐하면 북한 사람들이 금액의 상한이 정해진 구 통화를 새 통화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이 딱 24시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뉴요커> 지의 필자 바바라 데미크에게 한 탈북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가지고 있던 돈이 하루 만에 전부 날아간 겁니다. 그 충격에 사람들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주]4
6) 북한 정부는 가치가 있던 화폐를 빼앗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참 신기한 권능이다.
7) 정확히 바로 그 순간, 미국에서 벌어지던 일과 대조해 보면 더욱 신기하다. 2008년의 금융 위기에 대처하느라 연준은 금융 시스템에 공격적으로 ‘유동성을 주입’하고 있었다. 유동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책의 뒷부분에서 더 상세하게 살펴볼 터인데, 지금의 주된 포인트는 이것이다. 즉, 당시의 연준은 부동산 시세가 붕괴된 뒤 어려운 처지에 몰린 은행과 기업과 소비자 들이 좀 더 용이하게 신용을 받을 수 있도록 금리를 낮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권능을 동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북한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아주 이상한 점이 있다. 금리를 낮추려고 연준이 했던 일이 뭐냐 하면, 바로 새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냥 새 돈을 찍어내는 것이다. 뉴욕 지역 연준에는 창문 없이 폐쇄된 방이 있는데, 그곳에서 연준 소속 트레이더들은 문자 그대로 컴퓨터상으로 새 화폐를 창조했고, 창조된 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금융 자산을 매입했다. 2008년 1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연준은 이런 식으로 대략 3조 달러의 새 화폐를 미국 경제에 들이부었다.[주]5
8) 그러니까 뉴욕 지역 연준의 그 방에서 방금 1분 전만 해도 그 돈은 없었다. 그럼에도 연준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트레이더는 순식간에 민간의 금융 기관들이 소유하던 채권을 매입했다. 어떻게? 없던 돈을 그냥 컴퓨터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 트레이더는 새로 창조된 그 돈을 금융 기관들의 계좌로 이체해 채권 값을 치렀다. 새 돈은 이렇게 창조된다. 바로 몇 초 전에도 없던 돈이 새로 생긴다. ^클릭.^ 뉴욕 지역 연준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10억 달러를 창조하는 소리다. 그는 이 새 돈으로 시티뱅크가 소유하던 자산을 매입한다. ^클릭. 클릭.^ 20억 달러가 더 창조되는 소리다.
9)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가치 있는 화폐를 몰수해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사이에 연준은 그와 반대로 허공에서 새 돈을 만들어냈다. 북한의 원화도 미국의 달러화도 내재적 가치는 전혀 없다. 그러니 북한 돈이든 미국 돈이든, 돈을 발행한 정부에 그 돈을 가져가서 금이나 쌀이라든가 식용유 같은 유형적 물건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물론, 그런 요구를 했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미국에서는 강제 수용소로 압송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돈을 없애 버릴 수 있고, 미국은 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두 나라의 돈은 그냥 종이일 뿐이거나, 심지어 갈수록 더 컴퓨터 화면상의 몇 바이트짜리 데이터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a) ‘대학생 일반교양 수준’의 화폐 경제 분야 대중서로 승부를 걸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글이 쉽고, 내용도 이해하기 좋게 저술되어 있다고 판단합니다. 일부 장의 서너 쪽과 마지막 장(딱히 결론이라고 볼 수 없는 마지막 장)의 십여 쪽만을 읽어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입니다. 그 밖의 부분들은 사전을 찾으면서 꼼꼼히 읽지는 않았어도 다 읽어보았는데, 장마다 내용이 알차고 서술 스타일도 거의 똑같습니다.
b) 경제학 전공자인 제가 보기에는 경제적 내용의 논리 전개에서 알아듣기 힘들 만큼 무리가 있는 부분은 별로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자가 경제학자 교수인 만큼 ‘다들 이 정도는 알 것이다’하고 전제하고 넘어간 부분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은 정밀하게 여러 번 검토해서 본문 안팎의 역주로 보완해 주면 될 듯합니다.
물론, 환율과 금리, 구매력 평가, 실질 환율과 실질 금리, 가격과 실질 가격, 성장률 등의 기초적인 사례를 들면서 계산하는 곳들도 꽤 있는데, 아무리 단순하더라도 경제적 추론의 경험이 없는 번역자가 번역하다 보면 혹시 엉뚱하게 짐작해서 내용 전달의 논리적 순서를 망칠 위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무슨 일화나 사례를 들으면 금방 ‘아! 그렇구나’ 하면서 흥미와 동시에 ‘삘(감)’이 팍팍 오도록 저술한 태도가 역력합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도 있지만) 주로 미국의 영화, 일화, 실제 대화, 상표, 일상적 우스갯소리나 유머, 회화적(구어적) 표현 등등 이문화적 소재가 아주 대단히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한국 독자에게는 오히려 전달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동원된 각각의 사례에서 본래의 실제 상황과 맥락을 잘 파악해서 본문의 한국어적 문맥에 맞게 잘 다듬어 넣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c) 일반 독자가 읽기 좋도록 문장을 짧게 끊어 쓰고, 화제를 던지고 소재를 끌어들이는 글의 전개 방식이 매끄러울뿐더러 기발한 곳이 많습니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소재에서 진지한 화젯거리를 찾아내는 곳이 꽤 많아서 기발하다고 느낍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난이도가 높은 부분은 전혀 없었고 아주 평이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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