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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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린 1815년 즈음에는 자신감에 찬 영국 제조업자들이 자유무역을 위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 제조업체들은 거의 전 분야에 걸체 세계 제일의 효율성을 지니고 있었고, 예외가 있다면 벨기에, 스위스 같은 국가들만이 몇몇 분야에서 영국보다 앞서 있는 정도였다.

비록 1815년에 제정된 새로운 곡물법(영국에는 1463년부터 다양한 곡물법들이 있었다)으로 농업 보호가 강화되기는 하였지만 자유무역을 위한 압력은 높아져 갔다.{1-29} 1833년에도 일련의 관세 감소가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커다란 변화는 1846년에 [실시된] [곡물법 폐지와] 다수의 제조품들에 대한 관세 폐지였다.{1-30} 

오늘날 곡물법의 폐지는 그릇된 중상주의에 맞서 얻어낸 고전주의적 자유경제론의 최대의 승리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이 정책 변화에서 경제 이론이 담당한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당사의 역사적 배경과 더욱 친숙한 역사학자들은 이런 정책 변화가 “농업 상품 및 원자재 시장을 확장함으로써 유럽 대륙의 산업화를 저지하려는”{1-31} 의도를 담고 있는 ‘자유무역 제국주의(free trade imperialism)’{1-32}적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실제로 정치인 코브던(Richard Cobden)이나 영국 상무부의 보우링(John Bowring) 같이 곡물법 폐지에 앞장섰던 주요 인사들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그들의 주장을 펼쳐 갔는데{1-33}, 이에 대한 코브던의 입장은 다음 구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 “십중팔구 미국과 독일에서는 공장 체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 노동자들이 외국 노동자에 비해 비싼 음식을 사먹어야 함으로써 주게 되는 보조금{1-36}이 없었다면 미국,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에서도 공장 체제는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1-35}”
CF. 다음처럼 읽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영국 노동자들이 외국 노동자에 비해 비싼 음식을 사먹는 것은 곧 외국 제조업이 받는 보조금이나 마찬가지다. 이 보조금이 없었다면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에서도 공장 체제는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곡물법 폐지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자유무역으로의 전환은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발생하였다.
  • 대부분의 관세가 폐지된 것은 1850년대 글래드스톤(Gladstone) 정권이 내놓은 일련의 예산안, 특히 1860년 예산안[과] 1860년 체결된 영불 자유무역협정(일면 /Cobden-Chevalier Treaty)을 통해서였다. 
  • 그 결과 1850년대의 영국에서 발생한 무역 자유화의 영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840년 영국은 1,146가지 [품목에] 관세를 부과했다. 반면 1860년{까지는}{에 이르러서는} 48개 [품목에] 관세를 부과했는데, 그중 12개 품목”을 제외하고는 대개 사치품과 준사치품에 대한 세입 관세(revenue duties, 재정 관세)들이었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복잡했던 영국의 관세법은 이제 휘태커 연감의 반 페이지에 모두 옮겨질 정도가 되었다.”{1-36}
영국이 자유무역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화된 기술력을 지녔기 때문이며, 이런 기술력 뒤에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된 높은 관세 장벽'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1-37} 19세기 중반에 발생한 영국 경제의 전반적인 자유화(무역 자유화는 그 일부임)는 자유방임주의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감독 아래 진행된 고도의 관제 사건임에도 역시 주목해야 한다.{1-38} 또한 “매우 점진적으로 자유무역 체제를 도입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국부론> 발간에서 1860년의 글래드스톤 예산까지는 84년이 소요되었고, 워털루 전쟁에서 1846년의 승리까지는 31년이 소요되었다.”{1-39}

더욱이 영국의 자유무역 체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880년대에 이르자 어려움에 처한 몇몇 제조업자들이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 또 20세기 초에는 미국과 독일이 영국의 제조업 분야를 빠르게 잠식해 들어왔고, 그에 따라 영국의 정치권에서는 보호주의의 재도입 여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이런 정세를 입증하는 것은 당시의 저명한 정치인인 Joseph Chamberlain의 지휘 아래 1903년에 설립된 관세개혁연맹(Tariff Reform League)의 영향력이었다.{1-40} 그 결과 영국은 더 이상 제조업 분야의 최강국이 아님을 인정하고 1932년 관세를 광범위하게 재도입함으로써 영국의 자유무역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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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많은 이들은 유치산업론에 관한 체계적 논리를 수립한 최초의 인물이 리스트가 아니라 「제조업 분야에 관한 재무장관의 보고서」(1791)를 작성한 해밀턴이라고 지적한다. ( ... )
  • 해밀턴은 그의 보고서에서 만약 정부가 유치산업{1-48}들이 감수해야 하는 초기 손실을 보증해주지 않는다면 외국으로부터의 경쟁, 타성으로 말미암아 단기간에 국제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새로운 산업(유치산업)들이 미국에 설립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이 정부 지원이 수입 관세나 때로는 수입 금지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논하였는데{1-49},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동시대의 미국인들, 특히 해밀턴의 주장과 월폴이 피력한 주장 사이에 많은 유사점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또한 월폴과 해밀턴의 관점이 전후 동아시아 산업 전책의 이면에 깔려 있는 관점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 역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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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19세기 초기부터 1920년대 사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가장 강력한 보호주의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임을 베어록은 지적하고 있다.{1-78} 1846년에서 1861년 사이에 단행된 보호주의의 현저한 감소가 미국 경제에 어떤 형태로든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흥미로운 사실은 1830년에서 1910년 사이를 20년 주기로 나누었을 때 1인당 국내총생산[이] 가장 높은 성장을 이룩한 두 시기는 1870~1890년 (2.1%)과 1890~1910 (2.0%)으로, 보호주의가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된 기간이라는 점이다.{1-79}

이 같은 보호주의 수위와 전반적인 성장률 사이의 상관관계를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따른다. 실제로 오루크O'Rourke는 '자유주의의 황금 시대'(1875~1914년) 동안의 미국을 포함한 10개 선진국들의 자료를 이용하여 (관세율로 계수화된) 보호주의와 경제 성장률 사이에 양의 연관성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상당한 통계적 증거를 제시했다.{1-8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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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잡기 기간 동안 보호 관세가 아무리 중요한 정책 수단이었다 할지라도 그것만이 경제 개발을 위해 미국 정부가 사용했던 유일한 정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미 1830년대부터 미국 정부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농업 연구들을 지원하였다. ( ... 공적이 교육 투자 ... 식자율 향상 ...)  (... 철도 회사에 대한 토지와 지원금의 제공 ...)

미국 정부는 2차 대전 이후에도 막대한 파급 효과를 가진 방대한 양의 군수물품 조달과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서도 산업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1-84}
  • 미국 연방정부는 1930년 전체 연구개발 투자의 16%를 부담했고,{1-85} 2차 대전 이후에는 2분의 1에서 3분의 2 사이를 부담했다.{1-86}.
  • 미국이 전반적인 기술력 우위를 빼앗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컴퓨터, 항공, 인터넷 분야의 기술력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연방정부가 국방 관련 연구개발 기금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87}
  • 또 현재 미국이 제약 업쳬에서 선두를 지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정부기관인 국립보거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이 제약 및 생명공학 분야의 연구개발{에 대해}[을] 강력히 지원[하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의약품 공업연합회 자료에 의하면 제약 회사들의 연구개발 투자 중 단 43%만이 자체적으로 조달되는 반면 29%는 국립보건원에 의해 조달되고 있다.{1-88}
CF. The Entrepreneurial State: debunking private vs. public sector myths 저자 Mariana Mazzucato의 논지와 비교. 일맥상통.
19세기의 미국은 보호주의 정책의 철옹성일 뿐 아니라 보호주의의 사상적 고형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학자들은 미국 학자들은 "새로운 국가는 구세계 즉 유럽에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정치 제도 및 경제 조건을 가정하고 세워진, 새로운 경제학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1-89} 몇몇 학자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유럽의 대기업들이 공격적 덤핑으로 미국 기업을 몰락시키고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국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라고 보호 관세를 통해 정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0}

19세기 말까지도 대다수의 미국 경제학자들이 유치산업 보호론을 지지하였다.
  • 유치산업 보호론을 지지한 레이몬드와 메튜 케리Mathew Carey는 19세기 초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들이었고, 케리의 아들 헨리 케리Henry Carey는 19세기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50년대 초기에 헨리 케리를 가리켜 '미국의 유일하 중요 경제학자'라고 일컬었는데{1-91}, 그는 링컨 정부에서 (다소 좌절감에 빠진)경제 고문을 담당하기도 해싸.{1-92}
  • 불행히도 이 경제학자들 중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당시 미국 경제학을 이끌었던 이들은 (그 당시 영국 경제학자들이 이류로 여긴) 미국의 고전주의학파 경제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었다.
당시 상황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따라집기 기간' 동안의 미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영국 고전주의학파가 주장한 자유무역 이론이 미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라이너트는 제퍼슨이 리카도의 저서인 <원론>의 미국판 출간을 금지하려는 (헛된) 시도를 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우려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1-93}
  • 라이너트는 또 리스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어느 미 의회 의원이 앴던 말을 리스트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 의원에 따르면 영국의 무역 이론은 “대부분의 영국 제조품과 마찬가지로 수출을 겨냥해 만든 것이지, 국내 소비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1-94}
앞서 이야기했듯 19세기 초기 보호주의를 지지한 저명한 정치인이자 링컨의 존경을 받았던 헨리 클레이는 자신의 경제 정책 강령을 '영국식' 자유무역 체제에서 상반되는 '미국식 체제'라고 일컬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헨리 케리는 자유무역이란 미국을 영원히 1차 산업품 수출국으로 묶어 두려는 영국 제국주의 체제의 일부라고 주장하였고,{1-95} 그가 주요 지식 창구의 역할을 담당했던 1860년의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는 보호주의를 지지하는 주 출신의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원들을 가리켜 "남부-친영국-반관세-반연방주의적 정당"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일이 벌어졌다.{1-96} _ p.69


(I-1) 3. 독일의 선진국 따라잡기 저략

오늘날 독일은 사상 및 정책적인 측면 모두에서 유치산업 보호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독일의 보호 관세가 경제 개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영국이나 미국의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1834년 관세동맹 체결 이전에 프로이센의 산업에 제공된 보호 관세나 그 후 독일의 산업들에 보편적으로 제공된 보호 관세는 낮은 편이었다.
  • 당시 독일의 산업화 연구의 권위자인 트레빌콕은 그와 관련 “관세동맹의 관세가 유치산업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철업자들의 경우 심지어 1844년까지 아무런 보호 관세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관세동맹을 능가하는 강력한 보호가 필요했다.”고 분명히 말할 정도이다.{1-97}
  • 프로이센 정부는 보다 고율의 관세를 원하는 관세동맹 회원들의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1844년과 1846년에 {각각}[두 차례에 걸쳐] 철강[과] 면실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기는 했지만 그 인상폭도 비교적 낮은 수준이었다. 
  • 이후에도 프랑스와 체결한 1862년의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 및 1870년의 철강에 대한 관세 [인하] 조치로 관세동맹의 관세는 1870년대 후기까지 [하락] 추세를 보였다.{1-98}
  • 1879년 당시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가 지주들Junkers과 중공업자들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매우 높은 폭의 관세 인상을 발표했다. (이 동맹은 '철과 호밀의 결혼'이라 일컬어진다.{1-99} 그러나 그 후로는 농업이나 철강업과 같은 주요 중공업 분야에서만 상당히 높은 폭의 추가적 관세 인상이 이루어졌을 뿐 전반적인 산업 보호의 수위는 낮은 편이었다.{1-100}
  • <표 1.1>에 나타나듯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독일 제조업의 보호 수위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장 낮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독일이 다른 국가들보다 비교적 낮은 관세율을 부과했다고 해서 독일이 자유방임주의에 기초한 경제 발전 방식을 선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1713~1740년)와 프리드리히 대왕 (1740~1786) 시기의 프로이센은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추구했는데, 그 방법으로는 [,]
  • (이미 언급되었듯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보호 관세와 독점권 인정, 왕립 공장을 통한 저렴한 원료 공급 등의 전통적인 것들도 물론 사용되었지만, 
  • 더욱 중요한 방법은 주요 산업에 정부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었다.{1-101} [:]
  •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했을 당시만 해도 프로이센의 주요 수출품은 원자재였고, 수출용 제조품은 양모와 아마포로 만들어진 의류 정도였다. 아버지의 중상주의 정책을 계승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독점권 부여, 무역 보호, 수출 보조금 지급, 자금 투자, 숙련된 외국 인력의 제공 등의 방법들을 사용함으로써 다양한 산업(특히 섬유, 금속, 무기, 자기류, 비단 산업, 제당 등)을 육성하였고,{1-102} 특히 금속식기 제조업cutlery, 제당, 금속, 군수 물자 등과 같은 새로운 산업의 발전을 위해 오늘날의 경영자문기관 역할을 하도록 일부 유수 기업들business houses 장기 계약을 맺었다.
  • 이들 ‘시범 공장들model factories’은 마치 온실 속의 식물과 같아 시장 경쟁에 완전히 노출될 경우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희박했으나 새로운 기술을 소개하고 ‘전시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1-103}
  • ( ... ) 프리드리히 대왕은 특히 철강 산업과 린넨 산업을 장려하여 독일 최초의 용광로를 실레지아에 설치하고, 베틀 기계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방법으로 외국의 직조공들을 영입하기까지 했다. 실레지아를 ‘독일의 병기고’로 [키우려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계획은 그의 사후에도 다수의 열성적인 관료와 기업인들에 의해 계속해서 지행되었다.{1-104}
  • (... 기술 유치 사례, 기술 인력 육성,  ...)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한 해외여행을 지원했으며, 회국에서 생산된 기계를 수집하여 복제품을 생산하고, 특히 기계, 증기기관 및 기관차 산업 등에서 창업을 지원했다.{1-105}
1842년까지 실레지아는 영국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기술려글 보유하게 되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이 되었다. 무론 애초에 계획된 바와 같이 실레지아에서의 성공은 좁은 범위의 방위 관련 산업들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다른 지역들로 쉽게 확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레지아의 사례는 따라잡기 경제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부족하기만 한 기업가적 재능을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보완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라 할 수 있다.{1-106}

(... 프로이센 사례: 교육 ...) 19세기 초반에는 은행업의 발전에 대한 반대{1-109}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센 정부의 개입주의에 따른 성장 저해 효과들이 다소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이후 계속하여 산업화를 도모하는 국가들에게는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영국 또는 프랑스의 경우를 이상화하고 종종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를 모델로 단순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일 정부가 19세기 초기에 취한 태도가 현실에 더욱 부합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밀워드Milward와 사울Saul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1-110}

1840년대 이후 민간 부문의 성장과 함께 산업 개발에 대한 독일 정부의 개입은 덜해졌다. 하지만 이것은 정부 개입의 철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개입에서 길잡이로의 전환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정책 사례들로는 장래가 촉망되는 혁신적 사고를 지닌 인물들에 대한 장학금 수여, 유능한 기업가에 대한 보조금 지급, 새로운 기술 및 산업 공정을 전시하는 박람회 조직등을 들 수 있다. {1-111}

제2제국 기간 (1870~1914년) 동안에는 민간 부문의 발전과 더불어 더 이상의 산업 발전에 저항하는 관료 사회 내의 지주 세력이 강화되면서 정부의 자율성 및 역량이 손상되었다.{1-112} 트레빌콕의 주장에 의하면 산업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이 기간 동안의 독일 정부의 역할은 전반적으로 관세 운영과 (비공식적으로는 1890년대 후기부터 그리고 좀 더 공식적으로는 1920년대부터) 카르텔의 관리에 한정되어 있었다.{1-113}

( ... p. 74 ... )


4. 프랑스의 선진국 따라잡기 전략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오랜 통설들이 존재한다. 대부분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유포된 이런 시각은 프랑스를ㅡ영국의 자유방임주의 대조되는ㅡ정부 주도의 경제로 바라보는 견해이다. 이런 시각은 산업혁명 이전 및 2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에는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시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시민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경제 정책은 루이 14세 시기의 유명한 재무장관이었던 콜베르의 이름을 딴 이른바 콜베르주의Colbertism이라 알려진, 강력한 개입주의적 정책이었다.
  • 예를 들어 18세기 초기의 프랑스의 경우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낮았끼 때문에 다수의 숙련된 노동 인력을 영국으로부터 영입하는 일에 정부가 직접 앞장서서 나섰다. {1-115}
  • ( ... 산업 스파이 지원 ... ) 프랑스가 영국과의 기술력 차이를 극복하고 시민혁명 시기까지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프랑스 정의 이 같은 노력도 한몫을 했다.{1-116}
시민혁명은 프랑스의 이런 방향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밀워드와 사울은 이 시민혁명이 프랑스 정부의 경제 정책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절대왕정의 붕괴는 혁명가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더욱 자유방임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 보였기”{1-117} 때문이었다.
  • [그러나?] 시민혁명 직후의 정부들, 특히 나폴레옹 정부는 산업 발전, 그 중에서도 기술 발전을 촉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산업 박람회의 조직, 특정 기계의 개발을 위한 공개 경쟁[공개 입찰?] 그리고 정부와의 협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기업협회의 설립 등.{1-118}
자유방임주의 정책은 나폴레옹 정권의 붕괴 이후 프랑스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이래 이후 2차 대전까지 존속[했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자유방임주의 체제의 한계가 19세기에 나타난 프랑스 산업의 상대적 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1-119}
  • 이와 같은 상황은 무역 정책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설명될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보호주의에 대항해 영국이 자유무역을 주창했다는 토념에 도전하기 위해 나이Nye는 자세한 경험적 자료들을 조사하고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리고 심지어 (영국이 본격적으로 자유무역을 실시했다고 간주되는) 1840~1860년 동안 프랑스의 무역 체제가 영국보다 자유로웠다."는 결론을 내린다.{1-120} 
  • <표 1.2>는 나이의 자료에서 인용된 것으로, 순수관세소득을 순수입가치net import value에 대한 퍼센트로 나타낸 것이다. (이 방식은 특히 역사학자들이 보호주의를 계수화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1-121} 표에서 보듯 1821~1875년 사이, 그리고 특히 1860년대까지 프랑스는 영국보다 언제나 보호주의적인 색채가 덜했다. 또 두 국가에서 사용된 보호주의 수위는 19세기 초기에 특히 많은 차이를 나타내지만, 영국이 곡물법을 폐지한 뒤 자유무역으로 전환한 1846년 이후에도 여전히 큰 차이 (25.3% 대 17.2%)를 나타내고 있다.{1-122} 
1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프랑스 자유주의 시기 동안 프랑스 경제의 역동성이 동기간의 부분적 예외인 나폴레옹의 시기(1848~1870)에서만 나타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 ... p.76 ... )

프랑스 정부, 특히 제3공화국 정부는 당시 영국의 자유방임주의 정부처럼 거의 모든 경제 문제에 대해 자유방임주의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 ... ... )

프랑스 엘리트들이 자국 산업의 상대적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를 재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그 당시, 특히 1960년대 후기까지 프랑스 정부는 보다 선진화된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투자 유도 계획indicative plan, 공기업, 그리고 근래에 (다소 어폐가 있는) '동아시아 식'으로 불는 산업 정책을 사용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매우 성공적인 경제 구조 개편을 이루어 냈고, 결국 생산 및 (대부분의 분야의) 기술에서 영국을 앞서게 되었다. {1-129}


5. 스웨덴의 선진국 따라잡기 전략

스웨덴은 2차 대전 이후 '작은 개방 경제'로 잘 알려졌지만 근대 시대를 자유무역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웨덴 정부는 매우 보호주의적인 관세법(1816년)을 도입했고, 몇몇 상품들에 대한 수출입을 금지했다. 높은 관세율, 면 완제품에 대한 노골적 수입 금지, 그리고 원면에 대한 관세를 고의적으로 낮게 책정한 결과 스웨덴의 면직물 생산은 크게 증가했다.{1-130}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스웨덴의 관세 제도가 18세기 영국의 관세 제도뿐만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한국과 타이완의 관세 제도와도 흡사하다는 점이다.
  • 그러나 스웨덴의 보호주의는 18세기부터 서서히 감소했는데,{1-131} 특히 식료품, 원자재, 기계에 대한 관세가 폐지된 1857년 이후부터 19세기 후기까지는 매우 낮은 관세가 유지되었다.{1-132} <표 1.1>에 나타나듯 1875년경의 스웨덴은 매우 낮은 관세유을 지녔던 국가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 그러나 이 이 자유무역 시기는 곧 끝나고 말았다. 1880년경부터 스웨덴은 새로이 부상한 미국과의 경쟁에서 농업 부문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웨덴 정부는 1892년 이후 (이전까지는 각종 국제무역 협정으로 인해 이런 일들이 자유롭지 않았다)부터 산업 부문, 특히 새로운 공학 부분에 보호 관세와 보조금을 제공했다.{1-133} ( ... )
보호주의로 전환한 결과 스웨덴 경제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한 계산에 의하면 스웨덴은 1890~1900년 사이에 16개 주요 산업국 중 핀란드 다음으로 가장 빠른 설장을 기록했고 (성장률은 국내총생산 / 노동시간으로 측정됨), 1900~1913년 사이에는 가장 빠른 성장을 기록했다.{1-135}
  • 19세기 후기 스웨덴의 보호 관세가 특히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새로운 기술 도입을 장려하기 위한 연구개발 지원과 산업 지원금이 보호 관세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경제사학자드은 당시 스웨덴 정부가 보여 준 산업 장려 노력이 몇몇 유치산업들의 발전에 힘을 실어 주었다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한다. 
  • 그러나 이 노력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소규모 공장들이 급증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1-136}
물론 스웨덴 정부가 산업 발전을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이 보호 관세와 보조금에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의 경우 19세기 후기 동안 친밀한 관민 합작의 전통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 수준이 (관민 합작의 오랜 전통을 지닌 독일을 포함한) 어느 국가도 필적할 수 없는 정도라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 (농업의 관개/배수...) 철도 건설에서는 정부가 본선을 만들고(1870년까지 완공), 정부의 허가를 받은 민간 기업들이 지선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 ) 1913년 국가가 소유한 철도회사가 스웨덴 전체 철도의 33%, 물품 운송의 60%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 결과였다.{1-137}
  • 1880년대의 전보와 전화 그리고 1890년대의 수력 발전과 같은 다른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민 합작 방식이 적용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공기업과 기술적 협력을 통해 에릭슨, ASEA (현재 ABB의 자회사) 같은 회사들이 세계 이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주 지적되는 사항이다.{1-138}
....

스웨덴의 경제 정책은 1932년 사회당의 선거 승리(이후 사회당은 10년 가량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줄곧 집권하고 있다.)와 1936년에 체결된 노조와 경영자협회 사이의 '역사적 협정(살츠요바덴 협정)' 이후 중대한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1936년의 협정 이후 수립되 정책의 초점은 초기에는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 완화에 상응하는 대가로 고용주들이 적절한 노동 복지와 높은 투자를 제공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1-142}

2차 대전 이후 스웨덴은 이러한 새로운 정책 체제를 산업발전을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다. <1950~60년대에 중앙 조직화된 생산직 노동조합이 일명 랜-마이드너Rehn-Meidner Plan을 채택한 것이다.>{1-143}
  • 이 계획으로 소위 ‘연대임금 정책’{다른 기업에서 일하더라도 동일한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평등하게 지급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 이 임금 정책은 저임금 부문의 자본가들에게 자본 설비를 업그레이드하거나 또는 노동력을 감축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고임금 부문의 자본가드레게는 추가[적] 이윤을 제공함으로써 더 빠르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 산업 발전 과정에서 해직된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는 재훈련 및 재배치와 같은 지원을 제공하는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으로 보와되었는데, 2차 대전 직후 스웨덴의 성공적인 산업 발전에 이 같은 정책이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1-144}.
'연대임금 협상'과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에 기바을 둔 2차 대전 이후의 스웨덴의 산업 개발 방식은 지금까지 언급되었던 다른 국가들의 방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가 실물 경제에 대한 비슷한 이해 위에 수립되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

  • 양자 모두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 국가의 번영을 이룩하는 데 중요하다는 점에서,
  • 그리고 만약 이 전환을 시장에 맡겨 둔다면 그것이 사회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속도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6. 그 밖의 소규모 유럽 국가들의 선진국 따라잡기 전략

6-1 벨기에

저지대 지방이 15세기 모직업을 석권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이후 벨기에가 된 이 지역들에 집중되어 있던 모직업은 정부 보호 속에 경쟁력을 키워 온 영국의 생산업자들 때문에 15세기 이후 상대적으로 쇠퇴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벨기에는 자국의 산업력을 유지하였고, 영국 다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국가가 되었다.

벨기에는 ( ...) 19세기 초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들 중 하나였다. 당시 벨기에는 몇몇 산업 분야, 특히 모직업에서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국가였다. 19세기 중반에 ㅇ르자 비록 몇몇 분야에서 선진 기술 국가로서의 위치를 경쟁국들에게 빼앗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섬유, 철제, 비철금속, 화학 산업들에 집중한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그리고 부유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1-145}

다른 무엇보다 이런 기술적 우위 때문에 벨기에는 19세기와 20세기 초기에 걸쳐 비교적 보호주의를 적게 사용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표 1.1> 참고). 헨스Hens와 솔라Solar의 주장에 의하면 벨기에는 특히 1860년대와 1차 대전 사이에 '적극적인 자유무역 국가'였다.{1-146}

그러나 이 시기 이전에 벨기에는 네덜란드 또는 스위스보다 강력한 보호주의 국가였다.

  • 18세기 초기부터 약 1775년까지 지금 벨기에가 된 지역을 통치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지역을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사용하였고, 이 지역의 산업 기반 시설에 투자했다.{1-147}
  • 벨기에는 또 19세기 초기(1815~1830)  동안의 네덜란드 통합 왕국 시저레는 윌리엄 1세가 실시한 적극적 산업/무역/기술(ITT) 정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게다가 1850년대까지 일부 산업은 강력한 보호를 받았는데, 면, 모직, 린넨 실의 관세율은 30~60%, 철강 관세율은 85%에 이를 정도였다. 또 벨기에의 곡물법은 1850년에야 폐지되었다.{1-148}


6-2.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17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원을 갖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로 알려진 이 시기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압도했다. 네덜란드의 해군력 및 상권은 18세기의 소위 '가발 시기Pruikentijd'에 현저한 쇠퇴를 보이게 되었는데, 특히 1780년 영국과의 네 번째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네덜란드의 패권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1-149}

네덜란드가 그 막강한 해군력과 상권을 어째서 강력한 산업력과 경제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으로 네덜란드는 이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홍콩과 같은 세계 수준의 상업 기반을 가졌을 때 산업화에 대해 공연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러나 네덜란드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영국은 (영국에 수출입되는 상품은 영국 상선을 이용해야 한다고 규정한 항해조례의 제정에서 볼 수 있듯이) 산업화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 그렇다면 네덜란드는 왜 영국처럼 하지 않았던 것일까? 네덜란드가 강력한 국제 상권을 구축하려던 16세기에서 17세기 초 네덜란드 정부는 항해, 어업, 국제 무역에 대해 강력한 '중상주의적' 규제를 적용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네덜란드가 영국처럼 행동하지 않은 점은 특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1-150}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 [즉,]

  • 무거운 소비세로 인한 높은 임금, 부족한 석탄 및 철 매장량, 기업가 정신의 쇠퇴와 금리 생활자의 증가, 과시적 소비 등.
  • 또 몇몇 역사학자들은 인접국 벨기에의 탄탄한 산업력이 네덜란드 산업 발전의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1-151}
  • 그런 이야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네덜란드의 쇠퇴가 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공공 정책과 제도를 갖추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리스트의 주장이다. 
  • 또 라이트Wright는 낮은 관세율이 네덜란드 산업의 발전을 저해앴다고 주장하고 있다.{1-152}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네덜란드는 경쟁국이었던 영국, 독일 그리고 벨기에와 같은 수준의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가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강력한 상업망 때문이었다.{1-153}

(17세기 후기와 20세기 초 사이 .... )

그러나 네덜란드는 1840년대 후기부터 자유방임주의 체제로 선회했고, 이 체제는 1차 대전까지 지속됐다. (어느 면에서는 2차 대전까지도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 첫째, <표 1.1>에 나타나듯 19세기 후기의 영국과 관세 자율권을 회복학 이전의 일본을 제외한 현 선진국들 중에서 네덜란드는 보호주의를 가장 적게 사용한 국가가 되었다.
  • 둘째, 네덜란드의 경우 1817년에 제정된 특허법을 인위적 독저권을 만든다는 이유로 1869년에 폐지했다.  ( ... 이후 국제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1912년까지 특허법의 재도입을 거부했다.{1-156}
  • 셋째, 한때 정부가 조직하고 자금을 조달했던 국영 철도의 경영에서 두 민간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민간 기업을 설립했는데,{1-157} 당시에는 이런 방식이 생소한 것으로, 엄밀하게는 자유방임주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최근 많이 쓰이고 있는 경쟁 촉진을 통한 적극적 산업 정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 시기에 네덜란드의 전반적인 경제는 침체되었고, 산업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 100년 동안의 부진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1820년의 네덜란드는 여전히 영국 다음으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1913년에는 호주, 뉴지랜드, 미국, 캐나다, 스위스, 벨기에가 네덜란드보다 부유한 국가가 되었고, 독일은 네덜란드를 거의 따라잡게 되었다. 1820년 독일의 1인당 소득은 네덜란드의 60%에 그쳤지만, 1913년까지는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 2차 대전 이후 더욱 강력한 개입주의 정책들이 등장한 것은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 ... )

6-3. 스위스

( ... ... ) 가장 산업화된 영국과의 기술 격차가 매우 적었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스위스의 경우 유치산업 보호[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스위스의 경제 규모가 작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치산업 보호에 소요되는 비용은 규모가 큰 국가들보다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대단히 분산된 정치적 구조와 작은 경제 규모를 감안한다면 중앙 정부 주도의 유치산업 보호를 펼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1-163}

...


I-2장. 선진국의 앞서가기 전략과 신흥 산업국가들의 대응

...

I-3장. 경제 개발 정책에 대한 몇 가지 통념과 실제

이번 장에서는 현 선진국들(..), 그리고 신흥공업국가들(..)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에 사용했던 산업/무역/기술 정책의 역사를 고찰한다. 이 역사적 고찰을 통해 드러나는 내용은 신자유주의 논객들, 심지어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많은 사람들조차 믿고 있는 자본주의의 正史와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 ... ... )

1. 초창기 경제 개발 정책에 대한 역사적 통념과 사실들

1.1 따라잡기에는 유치산업 보호와 적극적 ITT 정책이 사용되었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따라잡기' 시기에 어떤 형태로건 유치산업 촉진 전략을 채택. 대부분의 국가들이 보호 관세를 유치산업 보호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유치산업 보호에서 유일한 또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보호 관세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국가들이 바로 자유무역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영국과 미국이었다는 점이다. ( ... )

이 같은 역사적 패턴의 명백한 예외를 들자면 스위스, 네덜란드 그리고 정도는 좀 약했지만 벨기에이다. 그러나 이 예외 국가들에도 몇 가지 단서가 붙어야 한다. ( ... ) 사정이 이렇더라도 이들 세 국가들, 아니 적어도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경우 자유주의적 ITT 정책 아래 발전한 국가들로 묘사하는 것은 여전히 합당한 것 같다.
이 세 국가들이 유치산업 보호를 사용하지 않은 더 타당한 이유는 이들이 스웨덴과 다르게 19세기 초기에 이미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산업혁명 기간에 최첨단 기술 국가로서의 위치를 유지했고 따라서 이들에게는 유치산업 보호가 그리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주장과 달리 선진국들의 경우 적극적인 ITT 정책의 채택 여부와 상관없이 산업화를 이룩할 능력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 ) 그러나 18세기 영국부터 20세기 한국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의 정설에 의하면 매우 해로운) 적극적인 ITT 정책을 사용한 국가 중 많은 나라가 경제 발전에 성공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는 없다.

1.2 영국은 자유무역과 자유방임 경제 국가였는가?

( ... ) 우리가 동아시아 국가들이 창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많은 정책들, 가령 수출 보조금 및 수출용 상품의 제조를 위해 수입된 원자재에 대한 관세 환급 등이 당시 영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이 자국의 산업을 촉진시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 .. p.119 ..)

1.3 '근대 보호주의의 아버지'이자 철옹성, 미국

( ... ) 미국 정부는 한 세기를 넘는 기간 (1816~1945년) 동안 그 어느 국가보다도 열심히 이 논리[유치산업 보호론]를 실행에 옮겼다. 이 기간 동안 수입 제조품에 대한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 ) 미국의 산업은 ( ... ) 적어도 1870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호를 받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 )

( ... ) 사회 하부구조 발전 및 연구개발 지원을 위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미국 정부의 역할 역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1.4 통제 경제 체제의 대표 주자, 프랑스에 관한 진실

( ... ) 프랑스는 전통적 통제 경제 체제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19세기 대부분의 기간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영국, 특히 미국보다 여러 면에서 더 자유방임주의적 정책들을 시행했다. 가령 1820년대와 1860년대 사이 프랑스가 영국보다 낮은 수위의 보호주의를 실행했음은 명백하다. ( ... )

1.8 도둑에서 파수꾼으로--경제 발전에 따른 정책의 변화


2. 관세만으로는 안 된다ㅡ유치산업 보호의 다양한 모델

( .... ) 그런 만큼 자유무역 및 자유방임주의적 ITT 정책이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믿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은 왜 이런 역사적 패턴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제3부).

( ... ) 실제로 현 선진국들은 그들의 목적과 처한 상황에 따라 정책 조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 ... ) 따라서 몇 가지 매우 뚜렷한 역사적 패턴에도 불구하고, 각 국가들이 산업 진흥을 위해 사용한 정책 수단의 조합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방식에서 상당한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산업 발전을 추구하는 '모든 국가들에게 딱 들어맞는 하나의 모델'은 존재하지 않았다ㅡ오직 습득해야 할 광범위한 진도 원리들과 다양한 사례들이 존재할 뿐이었다.

3. 현 개발도상국의 경제 정책은 과연 바람직하지 못한가?

( ...pp.127-8... )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이 같은 주장은 상당히 오도된 부분이 있다. 그것은 현재의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생산성 차이가 과거 선진화의 수준에 차이가 있는 현 선진국들 사이에 아타났던 생산성 차이보다 매우 크다는 점이다. ( ... )

  • 가장 가난했던 현 선진국들(핀란드, 일본)과 가장 부유했던 현 선진국들(네덜란드, 영국) 사이의 1인당 PPP 소득 비율은 19세기 내내 약 2 (또는 4) 대 1이었다. 
  • 이것은 현재의 개발도상국들과 선진국들 사이의 소득 비율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수치이다. ( ... ) 최빈국들과 최부국 사이의 1인당 PPP 소득 비율은 약 50 (또는 60) 대 1에 이른다. 개발도상국 중간 그룹의 경우는 약 10 (또는 15) 대 1이다. 심지어 상당히 발전한 개발도상국도 약 5 대 1에 이른다.
( ... ) 생산성 차이를 감안할 때 1980년대까지 개발도상국들 사이에 보편화됐던 비교적 높은 수위의 보호주의도 현 선진국들의 보호주의 역사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그렇게 지나친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년 동안의 광범위한 무역 자유화 이후 개발도상국들에서는 대체로 낮은 관세율이 보편화되었다. 이 사실를 감안하면 현 개발도상국들이 초창기의 선진국들보다 실제로 덜 보호주의적이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II-2-3. 현 개발도상국의 제도는 과연 바람직하지 못한가?

이제까지 우리는 현 선진국들의 제도 발전이 장기간에 걸치 우여곡절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보았다. 또한 동등한 발전 단계에서 비교할 경우 일반적으로 당시의 현 선진국들이 제도적 측면에서 현 개발도상국들보다 상당히 뒤쳐저 있었다는 사실의 타당함 역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 예를 들어 1820년의 영국은 현재의 인도보다 다소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인도에 존재하는 보통선거권(...), 중앙은행, 소득세, 법제화된 유한 책임 제도, '근대적' 파산법, 전문 관료 제도 또는 실효성 있는 유가증권법 등 가장 '기본적인' 제도를 대부분 갖추지 못했다. ( ... ) 아동 근로에 대한 규제를 제외한다면, 1820년의 영국은 최저 수준의 노동 법규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 ... ) 이런 예들에 비추어 볼 때 ( ... ) 경제 발전 초창기에 있던 현 선진국들과 현 개발도상국들을 유사한 발전 단계에서 비교할 경우 당시의 선진국들은 매우 낮은 수준의 제도적 기반만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선진국들의 제도 수준은 현 개발도상국들에 강요되고 있는 '국제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것들이었음은 따라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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