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4일 수요일

[발췌: 책] 존 메이너드 케인스 (로버트 스키델스키)


출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로버트 스키텔스키). 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 2009

※ 발췌:

제1부,

5장 "케임브리지 학부 시절"

1. 킹스 칼리지

( ... ) "킹스에는 펠로우교수 모두 합해 70명이 있었는데, 시기마다 한 쪽이 느는 만큼 다른 쪽은 줄어들었다. ... 빈자리가 생기면 이튼의 장학생 하나가 적절한 시기에 킹스로 옮겨 갔고, 팰로우가 됐으며, 시험 없이 학위를 땄고, 결혼하거나 직장을 잡지 않는다면, 소득과 권위가 늘어나는 것을 흡족해하며 평생 살아갈 수 있었다."[주]1 ( ... ) 19세기 전반기만 해도 킹스는, 아름답지만 인적이 끊긴, 장엄한 주책의 인상을 풍겼을 것이다. 각별한 위용을 자랑하던 두 건물, 곧 1515년에 완공된 예배당과 1725년부터 역사가 시작된 펠로우관, 즉 깁스(Gibbs)관은 멋진 공원과 잔디밭으로 둘려싸여 있었다. ( ... ) 강의 의무가 없는 펠로우들 대부분은 비거주자이면서도 칼리지가 소유한 부동산으로부터 막대한 배당금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교수들도 열두어 명 정도를 넘어선 적이 거의 없었다.

이튼과 킹스 두 왕립재단이 오랜 무력감에서 깨어난 것은 빅토리아 개혁이라는 마법의 지팡이 때문이었다 1850년대부터 시작된 킹스의 부흥은, 의회로부터의 외적 압력과, 개혁적 성향을 가진 이튼 학교 출신 신입생들로부터의 내적 압력이 결합된 결과였다. 메이너드가 입학했을 때, 킹스의 위상은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 ... ) 케인스가 진학할 무렵의 킹스에는  펠로우가 30명, 대학원생이 30명, 그리고 130명이 넘는 학부생들이 있었는데(케임브리지 대학 전체의 학부생 숫자는 3천 명이었다), 킹스보다 훨씬 규모가 큰 트리니티와 세인트존스만이 학문적·사회적 지위[에 있어서][에서] 킹스에 견줄 만했다. ( ... ) 19세기 말 킹스의 펠로우들은 학자라기보타는, 킹스 특유의 뛰어난 교사들이었다.

( ... ... ) '오 비'[오스카 브라우닝]가 71세가 되던 1908년에  그는 대학의 직위와 주간 훈련 학교의 교장직 모두에서 물러났다.{CF. '오 비'는 71세가 되던 1908년 대학의 직위와 주간 훈련 학교의 교장직 모두에서 물러났다.} 표면적으로는 고령이 이유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의무 태만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부당한 처벌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여전히 킹스의 펠로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거처를 옮겨서 1923년까지 ( ... ) 살았다.[주]4 그 무렵{ㅡ1909년(이 독자)ㅡ}역시 킹스의 펠로우가 되어 있던 메이너드는 '오 비'와의 교류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그의 세금 문제 처리를 거들어 주었다. ( ... ... )


2. 대학 1학년

( ... ) 메이너드는 ( ... ) 대학에 오자마자 엄청나게 책을 사들였고, 대학 조정반에도 가입했다. 무엇보다 클럽과 토론 모임의 세계ㅡ이들 대부분은 킹스와 트리니티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ㅡ에 발을 들여놓았다.  ( ... ) [그런 모임들] 중에는 오스카 브라우닝의 '정치학회'와 디킨슨의 '토론회'도 있었다. '트리니티 에세이회(Trinity Essay Society)도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그는 1902년 11월 10일 리튼 스트레이치가ㅡ케인스의 표현에 따르면ㅡ"기독교에 대한 가장 눈부신 풍자"를 발표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당신 3학년 학부생이던 스트레이치를 본 것이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곧 메이너드는 토론회 네 곳의 회원이 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인 '디셈비리(Decemviri)'는 킹스와 트리니티에서서 특별히 초청된 학부생 열 명으로 구성되었다.

( ... ... )

메이너드는 지적으로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무엇에나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학기에는 역사를 전공하던 페이를 끌고 G.E. 무어의 윤리학 강의와  맥태거크의 형이상학 강의를 들으러 쫓아다녔다. 맥태거트가 다룬 주제는 시간의 형이상학적 측면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메이너드는 킹스의 또 다른 모임인 '파리지애스트(Parrhesiasts)'에서 발표할, '시간과 변화'에 관한 논문 한 편을 쓰고 있었다.  ( ... ... )


3. 사도들과 속인들

첫 학기 12월에 메이너드는 키가 큰 두 젊은이의 방문을 받았다. (...) 그들은 자신을 스트레이치와 울프라고 정중히 소개했다. (...) 그들은 메이너드가 케임브리지의 가장 배타적인 단체인 '케임브리지 대화회(Cambridge Conversazione Society)' 혹은 '사도들(Apostles)'의 회원이 되기에 적합한지 여부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이 단체는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사도가 되지 못한, 사도의 친구들의 반감을 피한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자기들만의 세계를 보호한다는 취지 때문이기도 했다. (...) 트리니티와 킹스 두 대학은 현역 사도와 은퇴한 명예 사도들로 넘쳤다. 메이너드는 이튼에서의 눈부신 명성, 탁월한 학업 성적, 그리고 네빌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 대부부에게 이미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첫 번째 학기에 '천사들(angels)', 즉 은퇴한 사도들이었던 오스카 브라우님과 로스 디킨슨은 그를 유망한 후보로 점찍고 있었다. ( ... ... )

메이너드는 243번째 사도였다. 그 숫자는 1820년 사도회를 창설한 조지 톰린슨에서 시작되어 끊이지 않고 줄곧 이어진 번호였다. (...) 학기 중에 사도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 간사의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회합을 가졌다. 천사들도 종종 합류했지만 의무 사항은 아니었다. '사회자'가 이전 회의에서 합의된 주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 추첨에 의해 결정된 순서대로 (...)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토론이 뒤따르고, 의문 사항이 발생하면 투표에 부친다. 모임의 목적과 분위기는 오래 세월을 거치면서도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시즈윅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일단의 친밀한 동료들의 절대적 헌신과 솔직함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자리였다. ( ... ... )

( ... ) 얼마 안 있어 이들은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이라는 케임브리지 사도회의 런런 지파를 창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 )

(...) 메이너드 당시 사도회에는 화이트헤드, 맥태거트, 러셀, 무어가 포진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철학자가 될 인물들이었다. (...)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수습기에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메이너드 세대를 포함한 일련의 사도들 세대가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에 관한 진지하고도 강고한 이론들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메이너드가 사도회에 선출된 지 6개월 지나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될 G.E. 무어의 <프린키피아 에티카>가 출판되었다. (...) 메이너드 시절의 사도회가 보여준 두 번째 중요한 관심사는 미학적인 것이었다. (...) 철학과 미학이라는 양대 물줄기는 메이너드 당시 사도회의 "진리를 위한 탐구"로 흘러들어갔으며, 메이너드가 사도회에서 발표한 논문들도 대체로 이 둘로 분류될 수 있다. 거기에 경제학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었고, 정치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

6장. "나의 초기 신념들"

1. G.E. 무어와 <프린키피아 에티카>

1938년 9월 9일 메이너드 케인스는 블룸즈버리의 회상록 클럽(Memoir Club)에서 "나의 초기 신념들(My Early Beliefs)"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 1949년 그의 친구 가넷이 출판했고, 그의 전집 제10권에 재수록되었다. 그 에세이는 케인스의 한평생 작업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서이다. ( ... ... ) 철학은 케인스에게 삶의 기반을 제공했다. 그에게는 경제학 이전에 철학이 있었다. 목적의 철학이 수단의 철학보다 선행했던 것이다. 케인스의 철학은 1903년과 1906년 사이, 즉 학부 마지막 2년과 대학원 시절에 형성되었다. 이는 케인스가 사도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드링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문제에 답하면서 구체화되었다. ( ... ... )

2. 케인스와 무어

3. 케인스의 철학 수습기

케인스의 초기 저작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길잡이는 그가 졸헙 시험 직후인 1905년 7월과 9월 사이에 썼던ㅡ그가 "윤리학 잡기(Miscellanea Ethica)"라고 부른ㅡ몇몇 기록에 나타나 있다. ( ... ... )


7장. 케임브리지와 런던

1. 난파

메이너드가 킹스에 온지 4년째가 되었다. 1905년 7월 16일 자 네빌의 일기에는 "우리는 아직 메이너드가 도덕과학 졸업 시험의 2부를 치러야 할지 경제학 졸업 시험을 치러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라고 적혀 있다. 메이너드는 알프레드 마셜의 주간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가 경제학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주된 지적 관심은 여전히 도덕철학에 있었다. 스트레이치가 떠나고ㅡ그는 "트리니티의 사악한 교수들이 나를 펠로우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라고 덩컨 그랜트에게 말했다ㅡ케인스가 그의 뒤를 이어 사도회 간사가 되었다. ( ... )

( ... ... )

메이너드는, 정서적으로는 거의 빈사 상태였지만, 지적 도전들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마셜과의 경제학 공부에 빠져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순수 경제학', '자본', '조세, '트러스트와 철도'에 관한 네 묶음의 노트와 에세이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론 쪽으로는 제번스, 쿠르노, 에지워스뿐만 아니라 마셜의 미공개 논문 두 편(...)을 공부했다. ( ... ... )그리고 11월 23일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마셜은 전문 경제학자로 진로를 바꾸라고 끊임없이 나를 들볶아. ( ... ... )."

스트레이치는 11월 27일에 답장을 썼다. "오, 안 되지. 케임브리지 경제학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야. 런던으로 와. 재무부에 취직하고, 나와 함께 살리을 차리면 되잖아. 파티도 같이 열고... ." 메이너드는 런던에서 스트레이치와 끝없이 수다를 떨 생각에 잔뜩 마음이 동했다. ( ... ) 돌아오자마자 [케인스]는 부모에게 경제학 졸업 시험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겠다고 통보했다. 마셜은 그의 결정을 안타까워했다. ( ... ) 케인스는 생전에 경제학 학위를 받은 적이 없었다.

( ... ... ) 공무원 시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펠로우십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이미 5년 전에 그의 아버지가 작성한 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아버지와 답안 검토를 모두 마치고 나서 케인스는 상위 10등 안에는 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가 지원한 곳이 재무부와 인도청이었기 때문에 아주 좋은 성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총전 6천 점 가운데 3,498점을 얻어 2등을 했다. 수석은 3,917점을 얻은 옥스퍼드 베일리얼 출신의 고전 전공자 오토 니마이어에게 돌아갔는데, 재무부를 택한 그는 케인스가 훗날 공격했던 경제정책의 옹호자가 될 사람이었다.  ( ... )


2. 인도청

1906년 10월 16일 , 메이너드는 인도청 군무부에서 연봉 200파운드를 받는 하급 사무관으로 공무원 경력을 시작했다. 그가 맨 처음 맡은 일은 힘센 에어셔 황소 열 마리를 봄베이로 선적하는 것이었다. 인도청은 차관보들이 통솔하는 여섯 개 부서로 이루어져 있었[고,] 6명의 차관보, 8명의 상급 사무관, 10명의 하급 사무관, 그리고 76명의 말단 사무관들이 근무했다. 주요 업무는 인도로 오가는 연간 약 10만 편의 서류를 취급하는 것이었다. ( ... )

케인스가 인도청을 택했던 이유는 인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도청]이 두 개의 최상위 국내 부처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분명 영국의 지배를 보는 [케인스]의 시각은 어느 모로 보나 전통적이었다. 그는 영국 정부가 포악한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빈자를 보호했고, 정의와 물질적 진보를 가져다주었으며, 식민 국가에 건전한 금융 체제를 정착시켰다고 믿었다. 요컨대 영국 정부는 자력으로는 좋은 정부를 발전시킬 수 없는 나라에 좋은 정부를 도입시켰다는 것이다. 식민 지배를 실론의 지방 관리라는 하급 직책을 통해 볼 수 있었던 레너드 울프와는 달리, 그리고 아시아를 두루 여행했던 E.M. 포스터와 로스 디킨슨과도 다르게, 메이너드는 언제나 영국 정부의 관점에서 인도 지배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제국주의 지배의 인도주의적·도덕적 함의 혹은 영국이 인도인들을 착취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못했다. 앞으로 그는 인도 문제에 관해 광범위하게 글도 쓰고 정책 자문도 하게 되겠지만, 그가 일찍이 가 보았던 가장 동쪽의 나라는 이집트였으며, 일찍이 만났던 인도인들은 케임브리지나 런던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전부였고, 일찍이 일었던 인도에 관한 책은 오로지 금융 관련 전문서들뿐이었다. 이것은 19세기 매콜리와 밀 부자가 세운 전통이었는데, 여기서 인도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지역에 대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런던에 앉아서 건전한 공리주의 원칙을 [인도에] 잘 적용하는 문제였다.

( ... ... ) 처음에 플로렌스는 메이너드가 펠로우십 논문을 쓸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미결 서류함을 비우는 케인스의 일 처리 속도는 항상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업무 시간에 논문도 쓰고 개인 편지도 썼지만, 시간은 언제나 남아돌았다. ( ... )

그는 2년 계약으로 연간 집세가 90파운드인 하숙집을 었었는데 {인도 얘기 이후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의 장소는 아마도 런던 같은데, 장면과 시기가 바뀌는 도입부가 전혀 없다.} (...) 주말마다 메이너드는 런던을 벗어나서 보통은 부모와 함께 케임브리지에 머물렀고, 사도회 모임에도 참석했다. ( ... ) 1907년 3월, 휴가의 계절이 찾아왔다. 메이너드, 제임스 스트레이치, 노튼은 덩컨 그랜드와 함께 긴 주말을 보내기 위해 파리로 건너갔다. ( ... )

(...) 인도청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 ... ... ) 메이너드는 1907년 10월 12일 토요일이 돼서야, 3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

( ... ) 인도청으로부터 빨리 놓여나고 싶은 그의 바람은 킹스에서 우등 펠로우십을 따는 데 달려 있었다. 이제 그는 전적으로 확률론에 매달렸다. ( ... ) 1907년 12월 12일에 마침내 논문을 제출했다. 시험관은 W.E. 존슨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였다.

1908년 2월 3일, 네빌은 존슨에게 메이너드의 합격 가능성에 대해 물어 보았다."대체로 [존슨]의 평가가 화이트헤드의 [평가]보다는 호의적인 것 같아." 네빌은 인도청을 떠나려는 메이너드의 간절한 마음에 결코 공감할 수 없었다. 우등 펠로우십의 지속 기간은 6년뿐이었다. 경력상으로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인도청 근무를 하면서 유지할 수 있었다. ( ... ... )

다음 날 메이너드는 투표단 가운데 한 사람인 아서 피구에게, 만약 선발된다면 대학 내로 주거를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결정은 3월 17일에 있었다. 두 자리를 놓고 네 명의 후보자가 경합했다. 열다섯 차례의 투표를 거친 후에야 메이너드가 두 자리 중에서 어느 쪽도 채우지 못하게 될 것임이 분명해졌다. 두 명의 새 펠로우는 페이지와 돕스가 뽑혔다. 네빌의 일기이다. "우리는 무척 실망했고 실의에 빠졌다. 나는 메이너드가 인도청을 포기한 것에 대해 이미 마음을 추스른 상태였다. 케임브리지와 학생 생활로 복귀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확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메이너드는 실망했다기보다는 분노[했다]. 특히 불쾌했던 것은 그에게는 내년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게 거부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이었다. ( ... )

케인스의 논문은 기본적으로 1904년 1월 사도회에서 발표했던 생각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의 관심은 "모호한 논거와 불확실한 결론들"ㅡ이것들은 물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다ㅡ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논리"를 창안하는 데 있었다.[주]16

( ... 논문 1장의 케인스 인용  구절 ... )

( ... )

1908년 킹스 펠로우 선발에 실패한 것은 메이너드가 겪은 최악의 학문적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연기되었을 뿐이다. 그가 학생 신분을 다시 찾을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펠로우십 '참사'가 있은 지 두 주 만에, 메이너드는 마셜로부터 은밀한 연락을 받았다. 마셜은 그동안 자신의 봉급에서 연간 1백 파운드를 들여 경제학 강좌 하나를 후원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후원금의 수혜자가 막 리즈 대학에 자리를 얻었다. 마셜은 그 돈이 케인스에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왔다. 그의 신중함은 이해할 만했다. 마셜은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었고, 그 일로 자신의 후계자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가장 선호하는 후보인 피구가 자신의 뒤를 잇는다면, 피구도 케인스에 대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마셜로 하여금 메이너드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피구 자신이었다.

5월 30일, 피구가 애슐리, 캐넌 폭스웰을 누르고 마셜의 후계자로 선택되었을 때, 메이너드가 케임브리지로 복귀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 충족되었다. 6월 30일, 네빌이 주관하는 경제학과 및 정치학과 이사회는 경제학 강사직 둘을 인가했는데, 하나는 메이너드에게, 다른 하나는 막 트리니티를 졸업한 월터 레이턴에게 돌아갔다. 계약에 따르면, 그들은 피구로부터 연간 1백 파우드를 받게 될 것이었다.{계약에는 그들 두 사람이 피구로부터 연간 1백 파운드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즉각 네빌은 메이너드에게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별도로 1백 파운드를 보조하겠다고 제안했다. 1908년 6월 5일, 메이너드는 25번째 생일에 인도청을 사직했다. ( ... )

( ... ... ) 케인스가 "경제문제를 행정가의 관점에서 보는 법"을 인도청에서 배웠다고 오스틴 로빈슨이 말했을 때, 그는 옳았다. ( ... )

* * *

252p: (...) 1909년 3월 16일, 메이너드는 자신이 킹스의 펠로우십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제2부 벼랑에서

제9장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적 관심

1. 경제학에 대한 태도

257p: (...) 경제 저널리스트로서의 그의 경력은 케임브리지 복귀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 전문 경제학자로서 첫선을 보인 것은 1909년 3월자 <이코노믹 저널>에 실린 "인도에서의 최근 동향"이라는 논문을 통해서엿는데, 거기에서 그는 인도의 가격 동향을 금의 유출입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

케인스가 이 주제에 관해 본격적으로 학문적 탐구를 하게 된 계기는 1911년 10월ㅡ그의 아버지가 20년 전에 거절한 바 있던ㅡ<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 직을 수락하면서부터였다. (...) 28세라는 나이가 편집장으로서는 너무 적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편집 자문 위원회라는 것이 구성되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해 나갔다. (...)

(...) 케인스이 아버지가 1911년 10월 8일에 쓴 일기에는 , "많은 점에서 메이너드는 정치경제학 교수로서 피구의 일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

(...) 1909년 1월 19일 화요일 케인스는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ㅡ내 생각으로는 적어도 15명은 되었다ㅡ청중 앞에서" 화폐, 신용, 가격에 대한 주 2회 강의를 시작했다.[주]9  (...)

메이너드는 자기 학생들을 끝까지 챙겼다. 1914년 킹스 펠로우십 선발을 위해 제출된, 지방세제에 대한 제럴드 셔브의 논문에 대해 피구와 에드워드 캐넌이 퇴짜를 놓는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메이너드는 펠로우십 선발 위원회에 이의서를 회람시켰고, 그것은 클래펌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사자의 판단에 대해 적의를 드러낸 것이었다.


10장 사생활
11장 인더언 서머

( ... 1910년 11월 24일 덩컨에게 쓴 편지 ... ) 메이너드는 1910년 12월 경제학부의 5년 계약 거들러 강사직(Girdler's Lectureship)에 임명되었다. (...)

메이너드의 펠루우십은 그 다음 해 6월 그가 경제학부의 대학 강사로 임명되었을 때 사실상 영구적이 되었다. 그러나 학장이 제안한 대학의 재무행정 일은 메이너드가 이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영역이었다. 재무행정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1909년에 대학 회계 업무의 검열관으로 임명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미 그것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한 상태였다. 1911년에는 부동산 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 메이너드는 딜윈 녹스를 포함한 젊은 펠로우들을 동원해 1912년 5월 11일에 열린 대학의 연례 교직원 총회에서 재무위원들의 정책을 폐기하는 데 성공했다. 성공한 반란자가 된 그는 자연스럽게 재무 위원회에도 선임되었다. 그가 재무위원장으로 올라가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다. 1912년에는 펠로우십 선발자가 되었는데, 이는 매년 그가 어떤 주제와 관련된 것이든 간에 여러 편의 방대한 논문들을 읽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 )


제4부  전쟁의 경제적 귀결

17장 1920년대의 케인스

4. 재산불리기

대부분의 블룸즈버리 친구들과는 달리 케인스에게는 상속받은 자산이 없었다. 따라서 교류 범위가 넓어진 생활 방식을 지탱하려면, 어떻게 하든 돈을 벌어야 했다. 이미 그는 대학 봉급을 보충하기 위해 전쟁 전에 투자를 시작한 바 있었다. 1915년 총 연간 소득은 1천 파운드를 약간 상회했는데, 이 가운데 30%는 투자 소득이었다. 1919~1920년 과 1928~1929년의 기간 동안 그의 평균 연간 소득은 5,068파운드에 달했다. 이 가운데 "지적 소득(academic income)"은 연간 2,372파운드 혹은 절반을 약간 밑도는 수치다. 그러나 "지적 소득"에는 "강의, 펠로우십, 시험 출제, 왕립경제학회, 책과 논문 그리고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재무관으로서 그의 지위"로부터 오는 소득이 포함되어 있었다.[주]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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