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4일 월요일

[발췌: 책] 존 메이너드 케인스 (로버트 스키델스키)

출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로버트 스키텔스키). 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 2009

※ 발췌:

제1권, 5부 금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 25장 저축의 수수께끼

(672p)
로버트슨은 그의 주저인 <화폐>(1922)에서, 1913년의 케인스를 따라, 투자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의 한 원천으로 은행신용을 지목했다. 신용 창출은 소비자가격을 상승시킨다. 인플레이션에 맞게 자신의 화폐소득을 증가시킬 수 없는 모든 사람ㅡ대체로 임금 소득자들이지만 채권 소지자나 "나이든 과부들"ㅡ은 불가피하게 소비를 줄임으로써, 기업과 정부의 지출 증가를 위한 "비용"을 "강제"로 떠안게 되는 것이다. 조플린과 벤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제저축(forced saving)의 개념은 이미 당시 경제학 문헌에 다시 등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정부가 전시 지출을 위한 재정을 어떻게 확보했는가에 관한 논의의 계기가 된 것이다. <화폐개혁론>에서 케인스가 "인플레이션 조세"을 다룬 장을 보면, 어떻게 인플레이션 정부로 하여금 민간의 가계들 포기해야 하는 지출을 수 있게 만드는지 [민간의 구매력을 정부로 이전시키는 인플레이션 조세]에 관한 논의를 만날 수 있다. "인플레이션 조세"를 피하기 위해 케인스는 영란은행이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자체가 투자를 위한 추가 재원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단지 공동체의 서로 다른 부문들 사이에 자원을 재분배할 뿐이었다. 반면에 로버트슨은 인플레이션이 기업가들을 위한 자금의 중요한 원천이며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자본 자산을 창출할 수 있게 만든다고 믿었다. (...)

1924년부터 1925년까지 1년간 케인스는 자신이 "데니스 알의 부화"라고 불렀던 문제에 깊이 개입했는데, 논쟁은 인플레이션이 저축의 추가적 원천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케인스는 인플레이션이 ^자동적으로^ 더 많은 저축, 혹은 로버트스의 용어를 빌면, "결핍(lacking)"을 낳으리라는 점을 부인했다. 인플레이션은 공동체 전체로 하여금 과거 화폐소득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보다 더 높은 비율의 저축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만이 새로운 "결핍"을 낳을 수 있다. 훗날 그는{케인스? 로버트슨?} 모든 "유도된 결핍(강제저축)"은 "별도의 주목을 받기에는 추가적 저축의 원천으로는 너무 불확실하다"고 결론지었다.[7] 그의 책에서 로버트슨은  "유도된 결핍"의 존재에 자신의 주의를 환기시킨 데 대해 케인스에게 고마움을 표했지만, 그것이 인플레이션이 창출한 추가적 투자 기금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점은 부인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스의 인생에서 이때 로버트슨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화폐개혁론>과 비교해 볼 때, 가격과 산출의 부침에 대한 케인스의 설명은 통화량의 변화로부터 저축-투자 관계의 교란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대목이 아직 남아 있었다. 훗날 그는 로버트슨에게 "내가 완전히 자유롭게 된 것이, 자네의 <은행 정책과 가격수준>이 출간되기 전에 우리 둘 사이에에 있었던 논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네"라고 말했다.[9] 케인스가 ^로버트슨의 "강제저축" 이론을 거부^한 것은 거부로서는 지극히 중요한 결정이었다. 1931년 그는 로버트슨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네가 <은행 정책과 가격수준>에 관한 작업을 하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우리는 모두ㅡ당시 우리의 모호했던 용어들을 그냥 사용한다면ㅡ저축과 투자의 불일치는 은행 제도{banking system?} 쪽의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행위의 결과라고만 믿었지. 나는 꽤 오랫동안 이런 기조 위에서 작업했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네. 저축과 투자에 대한 (내 생각으로는) 좀 더 명료한 정의를 얻게 되면서, 그런 불일치 현상들은 은행 제도(banking system?} 아무런 명시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았지.[10]
(674p)
2. <화폐론> 집필하기

1924년 11월 30일 일요일, 케인스가 케임브리지에서 리디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새 책을 쓰기 시작했다오! 오늘 말이오. 첫 페이지를 썼어요. 첫 문장을 보겠소? '나는 논리적 순서를 염두에 두지 않고, 내가 말하려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능하면 빨리 독자들 앞에 내놓기 위해 이 책을 시작한다.'" 그가 이런 의도를 고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 목차의 초고들을 보면{초고상의 책 목차를 보면}, 케인스의 의도는 적정한 금융정책의 안출이라는 실천적 목적을 위해 "신용주기"와 관련된 화폐 이론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만일 "실질 신용"의 가용 규모를 중심으로 한 은행 대출의 부침이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호황과 불황의 원인이라면, 중앙은행의 신용 안정 정책은 이 두 가지 현상을 모두 동시에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케인스가 화폐수량설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는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이 거시경제적 질환들을 설명하고 치료하는 데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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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76)
(...) 로버트슨의 귀국이 가져다준 중요한 효과는, 케인스가 통화정책의 유일한 목적이 가격수준을 안정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격 상승이 그 이전의 "이윤 감소"를 역전시키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향의 사고에 중요한 자극을 준 또 다른 사람은 레지널그 매케나였다. 1928년 11월 2일 케인스는 매케나가 미들랜드 뱅크의 회장으로서 주주들에게 했던 연례 강연 모음집을 훑어봤다.[14] 매케나의 핵심 주장은은, ^대규모의 유휴 자원이 있을 때^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신용 제한 정책을 취하는 것은 "지속적 디플레이션" 정책을 취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었다.[15] 다시 말하면, 금융정책의 올바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완전고용 상황만을 가정해서는 안 되며, 경기순환의 다양한 국면을 위한 적절한 신용 정책에 맞게 {무엇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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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p)
3. 케인스의 여러 모습

(... ...)
1927년 2월, 마침내 케인스는 대학평의회의 "무자비한 노역"에서 벗어났지만, 대학 건축 프로그램에는 어느 때 못지않게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1927년 결산보고를 위한 연례 만찬은 대학의 수석 재무관으로서 그가 가장 선호하는 이론을 시험할 기회였다. (...)

(679p)
<화폐론>이 자신만의 외로운 길을 헤매는 동안, 케임브리지 경제학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1930년대의 케임브리지 대분열이 있기 전이었다. 케인스의 역정에서 중심적 인 역할을 하게 될 일단의 젊은 경제학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 조앤 모리스 ... 오스틴 로빈슨 ... 조앤 로빈슨 .... )

(... 리처드 칸...) "맨 처음 지도를 받기 위해 대학의 케인스 연구실에 들어갈 때, 나는 말 그대로 와들와들 떨었다"고 칸은 회상했다.

(682p)
(...) 그러나 마셜실 정통으로부터의 두 개의 탈출로ㅡ하나는 스라파의 불완전 경쟁으로, 다른 하나는 케인스의 유효수요로 연결되는ㅡ가 케인스가 살아 있을 때 결코 수렴되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칸과 조앤 로빈슨 같은 대표적 케인스주의자들이 이 두 "혁명" 모두에 깊이 관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691p)
4. 관성의 경제학

(...) 1928년 7월 31일 [케인스]는 로이드조지의 이런 구상(대규모 공공사업 프로그램)을 "번영의 파도를 준비하는 길(How to Organise a Wave of Prosperity)"이라는 칼럼을 통해 <이브닝 스탠더드>에 실었다. (...) 1928년의 [이] 컬럼 자체는 이렇다 할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케인스는 실업자 수가 이전 봄에 비해 20만 명 증가하고 산업 전반이 불황에 허덕이는 상황을 지적했다. 이것은 "파운드의 교환가치를 올리고 신용 규모를 통제함으로써 가격은 위축된 데 반해 ^비용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방책이란, 국가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누적적" 상향 이동의 단초를 열어 주고, 공장을 완전 가동하여 비용을 낮추며, 비용-가격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가격을 일정하게 인상하는 것이었다. "실업자와 놀고 있는 공장이 있는 한... 이런 일들을 할 ^여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정신 나간 소리다. ^왜냐하면 이런 정책은 오히려 실업자와, 놀고 있는 공장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 전개될 케인스 혁명의 전 역사는, 이 점이야말로 경제를 불황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국가 행위의 정당한 근거가 된다는 세상에서 크게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31]

재무부 ^그리고^ 케인스가 자신들의 분석 도구를 정교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기존의 경제적 합의에 대한 정치적 도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금본위 복귀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환율은 {이미?} 고정되었고 실업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이 금본위를 고수하는 한 이자율을 낮추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이 보기에 문제 해결의 관건은 기존의 이자율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투자를 확보할{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있었다. 케인스에 의해 고무된 로이드조지는 정부가 돈을 빌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의 문제를 첨예하게 부각시켰다. 만일 정부가 민간저축을 빌린다면, 이는 분명 민간투자를 "몰아낼(crowd out)"할 것이다. 과거에 케인스는 "해외로 빠져나가는" 저축을 동원할 것을 주창했지만, 왜 이것이 고용 증가로 연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었다. [고용 증가로 연결되는 논리가 뭐냐는 이전 문장의 화제가 바로 다음 문장의 화제와 연결되지 않는다. 즉 사용하지 않는 저축이 숨어있는지 여부와 새 돈을 찍는 게 고용 증가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나?]사용하지 않는 저축이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 하든가, 은행이 '새' 돈을 찍어내든가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는 듯 보였으며, 당시 후자의 방식은 인플레이션을 낳을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유당의 제안{자유당의 어떤 제안을 말하나? 로이드조지의 공공사업을 말하나?}에 대한 재무부의 대응은 이런 맥락에서 발전된 것이었다. 케인스의 칼럼{아마도 1928년 "번영의 파도를 준비하는 길"을 가리킬 듯} 이 발표된 뒤, 처칠은 리처드 홉킨스, 프레더릭 리스-로스, 랠프 호트리에게 평가를 부탁했다. 리처드 홉킨스 경은 오토니마이어가 영란은행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 뒤를 이어 막 재무 감사관이 되었고, 리스-로스(..)는 그의 부관이었다. 그러나 케인스 주장의 취약점을 파고든 사람은 재무조사의 총책임자이자 재무부에서 유일한 직업 경제학자였던 호트리였다. 그는 1925년 <이코노미카>에 실린 자신의 논문을 토대로, 통화 공급이 고정된 상태에서 공공사업을 위해 정부가 공채를 발행한다면 기존 "소비지출"이 희생될 뿐이라는 단순한 주장을 폈다.[주] 추가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정부 지출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이미 진행되는 것을 희생해야 가능하다는 재무부 입장의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32] 리스-로스는 "물론 케인스가 추구하는 것은 명확히 신용의 인플레이션{아마도 원문은 credit inflation}이다"라고 논평했다. 호트리의 난해한 처방은 볼드윈의 연설을 위해 이렇게 단순화되었다. "우리는 기존의 돈을 취하던가, ^아니면^ 새 돈을 만들어내야 한다."[33] 물론 "새 돈"이란 공포의 인플레이션을 의미했다.

재무부 견해는 모든 저축은 투자로 이어진다는 것, 즉 새로운 자본 시설을 사들이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로버트슨은 "퇴장되는(hoarded, 즉 놀고 있는)" 저축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케인스는 두 가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저축은 기존의 자산을 사들이는 데 사용될 수도 있으며, 이때 그것은 주식시장의 거품에서 보듯이, 그저 자산 가격을 다투어 올릴 뿐이다.[34] 또한 외국으로 수출된 저축은, 만일 그로 인해 자본 대여 국가의 금이 유출되고 국내 이자율이 오른다면, 자를 증가시키지 않을 것이다.[35] 이 세 경우 모두 한 나라의 저축은 현재의 투자보다 "앞서 간다"고(즉, 현재 투자를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주]

(... ... ...)

(696p)
5. <화폐론>

(...)
사실 <화폐론>에 담긴 사상은 지극히 간단하다. 이자율은 통화 방어의 필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올라야 하고, 이윤을 회복하기 위해 임금을 강제로 낮출 수 없는 나라는 십중팔구 저고용의 덫에 빠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 "영국 문제"에 대한 케인스식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 뒤에는 현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론이 자리하고 있다.

케인스의 핵심 명제느 ^신용화폐 경제에서는^ 저축과 투자를 일치시키는 자동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은행이 돈을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이미 본 대로, 케인스의 생각은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인스가 비크셀Wicksell을 따라 "자연"율이라 불렀던) 자본에 대한 이윤율이 있고, 대출에 대한 이자율, 곧 "시장"률이 있다. 그러나 은행의 신용 정책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률은 "자연율"보다 높거나 낮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신용 주기"란 자연율을 중심으로 시장이자율이 요동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실체적 중요성은 신용화폐 경제의 유일한 단기적 조정자는 금융^정책^이라는 점에 있다. 금본위로 복귀하면서, 영란은행은 은행 금리를 투자 수준이 공동체의 저축 수준과 같아질 정도로 충분히 낮게 책정할 수 없게 되었다. 대량 실업은 그래서 발생한다. 이 논증에서 중요한 것은 케인스의 ^강조점이 화폐의 저량에서 지출의 유량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가격수준이 떨어지고 ^또한^ 사람들을 실업 상태에 빠뜨리는 원인은 저축률에 비해 투자 지출이 상대적으로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 ... ...)

26장. 불황

(748p)
1930년 겨울과 1931년 봄, 대체로 혹독한 날씨가 계속됐지만 메이너드는 전력을 다해 일에 매달렸다. 집필, 방송, 편지 쓰기, 강의, 재무 업무, 위원회 일, 금융권 업무, 발레 관련 일, 맥밀런 보고서 작성, 그리고 호트리, 로버트슨, 칸, "서커스(28장 참조)"와의 "화폐론에 관핸 논쟁을 마무리하는 일" 외에도 (...)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


제2권, 6부: 구원자로 나선 경제학자

28장. 쓸모 있는 몽상가

(... ...)

52p,

1930년에 있었던 경제학자들 사이의 격렬한 다툼은 그[케인스]에게는 충격이었는데, 그가 훗날 <일반이론>의 서문에 기록했듯이, 그것은 "경제 이론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거의 파멸시켰다." 1930년 10월에 <화폐론>이 출간되었을 때, 그는 그것이 미학적으로 실패작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지적인 실패작이라는 사실은 즉각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은 그 책이 착상된 이후 전체 상황이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부정적 논평들 때문이었다. 아마 그 두 가지 실패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리라. 장기 불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고, <화폐론>의 형식적 도구들은 그것을 제공할 수 없었다.

(56p)

3. <화폐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새로운 케인스 모델의 탄생은 옛 것의 해체와 함께 시작되었다. <화폐론>의 기본 방정식은 정태적 가격수준 방정식들인데, 케인스는 기업의 이윤과 손실에 대한 조건을 추가함으로써 그것을(이 방정식들을) 동태화시키려 했다. (...)

<화폐론>이 출간되기도 전에 이미 재무부의 랠프 호트리는 케인스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한 바 있었다. 1930년 여름 호트리는 케인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어떤 일이 일어나서 상품의 수요에 영향을 미친다면, 첫 번째 결과는 ^기존^ 가격에서 판매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이네. ... 가격이 조정되기까지는 늘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하는데. 때로 그 기간이 상당히 길어지기도 하지." 더욱이 "가격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따라서 예상하지 못한 이익이나 손실의 존재와 상관 없이, 혹은 투자와 저축 간의 불균형과는 무관하게, 균형에 교란이 오기도 한다네... . 그러므로 그런 교란이 일어날 때 가격 변화 그 자체가 균형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적절한 척도가 되지는 못할 걸세."[31] 11월 28일 케인스는 "미래에는 아마도 화폐 이론과 단기 공급 이론이 결합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인정했다.[32] 케인스의 마음속에서, 상품 소비의 저하가 가져오는 직접적 효과가, 그것이 비용과 가격에 미치는 효과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

케임브리지 서커스는 기본 방정식들이 고정되 산출을 가정한다는 점, 이른바 '과부의 항아리(widow's cruse)' 오류를 발견해냈다.[역주][33] 오스틴 로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이윤을 손에 쥔 기업가가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구두를 닦기로 결정했다면, 그 효과는 닦은 구두의 수에 영향을 미치기볻는 구두 닦는 가격을 올릴 뿐인가?[34] 케인스는 마음이 상했다. 그는 1932년 4월 14일 조앤 로빈슨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내가 일정한 산출을 가정한 것에 대해 자네들이 내게 좀 심했다고 생각하네. ... 분명 우리는 논증의 특정 단계에서 이런 종류의 단순화된 가정을 허용해야 할 걸세." 그러나 자신의 이론이 "산출의 변화가 가져오는 결과들을 철저히 규명하지 않았다고..."고 인정했다.[35]
[역주] 이유의 소비지출은 그 지출액만큼 이윤을 증가시켜서 이윤은 아무리 방탕하게 써도 탕진되지 않는 과부의 항아리와 같다는 의미[옮긴이].
'서커스' 토론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케인스에게 산출 방정식을 고안해 보라고 했던 호트리의 재촉이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고정된 산출을 가정한 모델은 무엇이 현재와 같은 산출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없었다.

데니스 로버트슨은 1931년 9월 호  <이코노믹 저널>에 실린 <화폐론> 서평에서, '저축'과 '소득'에 대한 비조작적 정의들을 비판했다.[역주] 케인스는 "투자를 넘어서는 저축의 초과분"이 "기업의 손실"과 같다고 정의했다. 이것은 기업가들이 계속해서 손실을 입는 한, 저축은 항상 투자를 "앞서 나간다"는, 즉 어떤 균형 지점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버트슨은 이렇게 물었다. "투자보다 저축이 많기 때문에 불항이 발생하다고 외치는 사람들 가운데 ... 불황 기간에 통탄할 정도로 풍부한 저축이 주로 기업가들의 소비되지 않은 소득[이는 곧 투자로 연결된다]으로 이루어진 것ㅡ일해서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ㅡ이라는 점을 몇 명이나 알고 있는가?"[36] 기업 이윤이나 손실이 소득의 추가분이나 감소분으로 계산된다면 저축과 투자 간의 불균등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예컨대, 기업 이윤이 소득으로 계사되면추가 투자가 이루어져 초과 저축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 혹은 균형 소득수준이라는 개념 전체를 폐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공동체의 소득(혹은 산출) 수준이 '정상' 소득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변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이론>의 출발점이었다.

(... 하이에크...) 그 핵심에는 한계효용 이론을 자본 형성에 적용한 간(間)시간적 가치론이 있었다. 한편에는, 소비재와 자본재 사이에서처럼 '시간 선호'(수요)를 지닌 소비자들이 있다. 이런 시간 선호는, 소득 가운데 얼마를 소비에 지출하고, 얼마를 저축할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결정을 지배한다. 다른 한편으로 두 종류의 재화에 대한 (변화하는) 수요에 비추어 자신의 생산 계획을 조정하는 생산자들이 있다. 사람들이 더 많이 저축하기로 결정한다면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떨어질 것이지만, 이것은 자본재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킴으로써 상쇄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오스트리아 이론은 친저축이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학파 사람들은 케인스와 달리, 국부가 개인의 저축으로부터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간시간적 계획을 조정하는 가격이 이자율이다. 그러나 이자율은 화폐가 '중립적'일 때에만ㅡ즉, 통화 당국에 의한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없을 때에만ㅡ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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