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3일 수요일

[용어 생각] 물가상승인가 인플레이션인가, 물가상승률인가 인플레이션율인가


어느 역서의 옮긴이 주를 준비하며 적어본다. 기본적으로 경제학 교과서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개념 없이 등장하는 신문 잡지류의 용례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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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언어권의 ‘inflation’은 기본적으로 ‘물가상승’을 뜻하며, 그 이상의 의미는 거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맥에서 ‘inflation’을 ‘물가상승’으로, ‘inflation rate’을 ‘물가상승률’로 옮긴다. 

‘인플레이션’이란 낱말이 등장하는 용례들을 보면, 이 말의 의미가 ‘물가상승’과 아주 다른 것처럼 줄기차게 ‘인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율’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용례들을 보면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상품 가격의 상승과 달리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상품 가격의 상승을 ‘인플레이션’의 의미로 보는 듯하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품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는 것인 만큼 단순히 물가가 오르는 사태보다 특수한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인플레이션’을 외래어로 쓸 이유가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보인다(그렇다고 ‘인플레이션’이란 용어가 ‘단순한’ 물가상승과 어떻게 다르다든가, 아니면 같다든가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상품 가격의 상승이라는 의미는 ‘물가상승’으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 첫째, 물가(物價)라는 우리말 자체에 이미 ‘부분적인 상품 가격’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품 가격’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일상적 언어생활에서도 “물가가 올랐다”고 누가 말했다면 전반적인 상품 가격이 올랐다고 알아듣는다. 간혹 ‘전반적 물가’라거나 ‘일반적 물가’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뜻을 분명이 전달하기 위한 반복과 강조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부 상품군만의 가격이 오르는 사태를 정확히 표현하려면 ‘무슨 물가가 올랐다’라고 말하지, 그냥 ‘물가가 올랐다’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물가란 말에 일반적 상품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언어 생활자들이 인정하는 것이고, 이미 내포된 일반적 의미를 제한(수식)하고자 ‘무슨 물가(가령, 식료품 물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인플레이션’을 두고 ‘지속적인 가격 상승’이라고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격이 오르는 기간이 얼마나 길어야 지속적인 것이냐 하는 점에서 객관적 기준을 그을 수 없다. 그 객관적 기준이 없기에 ‘인플레이션’이란 외래어와 ‘물가상승’이란 우리말의 의미를 구분할 근거 또한 객관적일 수 없다. 가격 상승의 기간이 길다는 사태를 꼭 표현해야 할 문맥이라면 영어에서도 ‘inflation’에다 기간을 가리키는 수식어를 붙여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말의 문맥에서도 ‘물가상승’에다 기간을 가리키는 수식어를 붙이면 된다. 요컨대 대부분의 문맥에서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상품 가격의 상승이라는 의미를 ‘물가상승’과 ‘물가상승률’이라는 우리말을 운용하여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의미를 충분히 담을 우리말이 존재한다면─기본적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문맥에서─외래어를 쓸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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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고 1: 말과 말뜻, 말의 활용과 용어의 선택: 물가 vs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 비고 2:

1. 통화주의적 해석에 따른 의미 구분은 생략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inflate는 무언가를 '뻥 튀기는' 사태를 뜻하고, 그렇게 '뻥 튀긴' 결과로 물가가 오르는 것이라는 주장이 영미권에서 일부 보인다. 그러한 문헌에서 지적하는 '뻥 튀겨지는' 대상은 바로 '통화량'이다. 즉, 이러한 논지를 펼치는 글의 주장은 '인플레이션'은 '통화량의 팽창'만을 뜻하며, 그 결과로 물가가 오르는 현상은 엄연히 결과요, 그 원인과는 다르다는 식의 주장이다. 이러한 논지는 그들이 주장하는 맥락(즉,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설정의 틀) 내에서는 하나의 주장일 수 있지만, 'inflation'이란 말이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례에서는 거의 수용되고 있지 못하다.

2. 가령 수도 없이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식의 영문 표현 속에 '단순한' 물가상승과는 크게 다른 '물가와 관련된 무언가의 심오한 질적 사태'가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는가?
Macroeconomic policy has increasingly emphasized low and stable inflation as a key goal.
미 연준과 유럽중앙은행을 비롯해 다양한 교과서와 신문의 논설 등에 이르기까지 위 예문처럼 실로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용례에서 ‘inflation’의 의미가 '단순한' 물가상승과 크게 다른 <물가와 관련된 무언가 심오한 질적 사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과연 ‘low and stable inflation’이 뜻하는 바가 <물가와 관련된 무언가 심오한 사태를 낮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 거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단순한' 물가상승 이외에 <낮고 안정적으로 유지할> <물가와 관련된 무언가 심오한 사태>란 무엇을 뜻한다고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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