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8일 금요일

[참고] pulsion, impulsion,

출처: 류종렬의 철학 마실, http://www.masilga.co.kr/

■ 자료: http://www.masilga.co.kr/philosophy/Analysis/Analysis10.asp#1

충동(pulsion) : 충력 (ms 29/07/03)
DUROZOI Gérard et ROUSSEL André, Dictionnare de philosophie, Nathan, 1993 (1987), p. 274. (367).


충동이란 정신분석학적으로 유기체[신체]를 목적을 향하게 밀고 나가는 (어떤 추동력poussée에 의하여) 역동적인 과정(processus)을 말한다.

충력은 긴장의 어떤 상태로 한정되어 있는 신체적 자극 속에 그 근원을 갖는다. 그러므로 충동은 신체적(somatique) 기원으로부터 나온다. 이 충동의 목적은 충동 자체를 부추기는 긴장의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다[우리가 보기에 부추기는 것을 완화하는 것이다]. 제거되었다는 것[소멸되었다는 것]은 충동을 만족시켜주는 대상과 만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트(G. Freud, 1856-1938)에서, 충동의 이론은 여전히 이원론적이다. 그의 정신분석학적 작업의 시초에서부터 성적 충동을 자기 보존 충동과 대립시켰다. [일반적으로 2대 본능의 식욕과 성욕이라고 한다. 그런데 식욕을 생존 본능에 포함시키면, 생존본능과 종족보존본능이 된다. 프로이트은 여성의 트라우마티즘과 관련한 병리적 관점(히스테리와 신경증)에서 출발하여, 인간 종의 생존에서 일어나는 정신병(인간 종의 내부에 존재하는 분열증상)에로 관심이 이동하였다.]

이 이후에 이런 대립이 생명 충동(자기 보존의 리비도와 충동과 닮은 에로스 Eros)와 죽음 충동(처음에는 내부와 자기파괴로 향하고 그 다음에 외부로 향하면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으로 표출되는 타나토스 Thanatos)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충동은 긴장을 완전하게 축소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존재를 비유기적 상태(생명 없는 물질적 상태)로 이끈다.

[참조 1: 그 무엇(Ça, 뭐시기, 거시기)은 라틴어의 중성 대명사 이드(Id)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뭐시기(또는 거시기)는 프로이트 성적 에너지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리비도(Libido)와 다르다. 리비도는 성적(애정적) 에너지와 관련 있으며, 생리학적 관계에 한정되어 있다면, 그 무엇은 개인적 인격 전체에 영향을 총체적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개념에 가깝다. 가깝다는 것은 인성의 총체적 개념으로서 본성(la nature de l'homme)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이다.]

[* 어원적으로, 이 용어는 라틴어 libido 는 갈망(envie), 성적 욕망(désir amoureux), 민감(sensualité)을 의미한다.]

(...)

■ 자료: http://www.masilga.co.kr/philosophy/Analysis/Analysis18.asp#1

추동(impulsion): 추진력, 충동 (ms 31/07/03)
 

SILLAMY Norbert, Dictionnaire de la Psychologie, Larousse, 1971(1967), p. 148.(319).
의지에 의해 통제가 잘 안 되며 무의식적[비자발적]으로 행위 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 경향은 일반적으로 심층충동(배고픔, 성적 욕망, 공격성)에 해당하며, 억제할 수 없는 행위, 가끔은 위험한 행위(도둑질, 폭력)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육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개인은 자신의 충동(pulsion)을 지배할 수 있으나, 어떤 개인들은, 예를 들어 정신적 발달이 늦고, 질투가 많거나 또는 간질 질환이 있는 경우에, 스스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고, 또 자신을 이 심층 충동에 끌려가도록 내버려둔다.
참조 용어: 강박(compulsion), 간질(épilepsie),



■ 자료: http://www.masilga.co.kr/philosophy/Analysis/Freud03.asp

정신분석학의 다섯 강의(Cinq lecon sur la psychanalyse, 1909) 25/02/98
Freud, pp. 5-65, Payot: pbp 84, 1972(1909)

이 다섯 강의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의 근원에 대해, 5회에 걸쳐서 미국의 워체스터(매사츄세츠)에 있는 클라크대학에서 1904년에 행한 것이고, 1908년 출간한 것이다.

1880-1882년 브로이어 박사가 만난 환자(Anna O)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프로이트는 이 히스테리환자로부터 초발전조(Traumatisme)를 주목하게 되었고, 치료로서 사용한 최면방식은 병발생원인(pathogene) 상태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그 방식은 치료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경험적 자료의 추적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히스테리에 관하여,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출현(Moi 큰 자아)에 대해, 의식(moi 작은 자아)이 억제하며, 큰자아 출현에 작은자아가 저항하는 것으로 보았다. 작은 자아(moi)의 금지 조치 즉 방어는 사회적 가정적 규율일 것이다. Moi와 moi 사이의 알력(충돌 complexe)에서 환자는 Moi의 욕망을 추방시키고 moi가 만든 대체물 즉 증후(symptome)을 드러낸다. 정신분석이란 이 증후 밑에서 신음하며 나오려고 노력하는 Moi의 욕망을 실현 또는 드러나게(표명) 하는 것이다. 치료장면에서 한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의사는 근원적 치료보다 ?딸랑이?로 달래는 격이다. [일차적 연쇄 저항이 신체적 습관 사회적 습관에 지배받고 있다면, 2차적 연쇄 저항은 사회적 자아(soi)가 큰타자(Autre, 신(격화))에 대해 제한하는 것인데, 의사는 환자에게 - 미신의 연속을 해결하기 위하여 pallus가 아니라 요술방망이를 주려한다. - 실재의 대타자를 제시하지 못하여 물신신앙(Fetichisme)에 빠지게 할 수 있다.]

Moi의 욕망 실현 방식은 항상 moi의 허술한 틈을 노리고 있다. [큰 자아(la Conscience)의 실현 방식은 Bergson이 말하는 자연이 무심코 내 뱉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튀어나오려는 것은 정상인에게도 있다. 즉 재담에서, 꿈에서, 착오행위에서, 실언에서, 돌발적 행위[계획하지 않았지만 무심코 튀어나온]에서. 이러한 현상은 삶의 연륜만큼 다양한 동기에서 나온다.

환자란 발현현상이 억제되어 병적이 되는 경우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성적인 원인에 있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신경증이 성욕에 관련 있다는 것으로부터, 대부분의 성도착자가 유아기 성관심(sexualite)에서 골치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유아들도 자기애욕과 성관심(성욕)이 분명하게 있다고 보면서 외디푸스 신화를 끌어낸다.

환자가 무의식의 발현을 겁내어[진지하게 대처하지 못해] (정신)병 속으로 은신한다(fuir). 또한 환자는 치료장면에서 대체물에 대한 솔직한 의미전달을 회피하여 [환자자신도 모르고 있기도 하다] 의사에게 전이(transfert)한다. [이 전이는 환자가 요구하는 것인데, 의사는 환자에게 딸랑이를 주는 경우는 치료가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 전이가 있기에 정신분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정신분석이란 환자의 욕망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3가지 방식이 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함으로써, 본능을 승화시킴으로써, 타문화와 접촉함으로써이다.

여기서 나의 주제와 관련하여 설명한다면, [베르그송의] 심리적 자아를 Moi로, [베르그송의] 인식적 자아의 두 질서를 moi와 soi로, [베르그송의] 인류적 자아를 Soi로 구분해 보고 싶다. Moi의 발현억제인 moi는 신경증(nevrose)에 속하고 Soi에 대해 soi의 방어는 정신병(분열증 psychose)일 것이라 본다.

* (21/04/00) 욕망실현에 대한 정상인의 시도는 꿈에서 이루어진다 - 이것은 "꿈의 해석(1900)"의 주제이다.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경증이나 정신병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다. 왜냐하면 Moi는 언제나 moi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 Moi의 자기실현을 욕망충족, 소원완수, 소망성취, 자아실현, 신의 현현, 부처환생, 등으로 표현하든 간에 현실에서 대상화 실현화 표명화 의미화 작업이 어렵다. 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누가 감히 자신의 삶의 내부를 까발리고자 하겠는가? ?인간들이 서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기득권자의 삶은 허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실의 은폐는 우선 종교적 순종을 가져다준다. 너의 운명이니까, 또는 혹은 전생의 업보이니까, 또는 유전적 인자를 그렇게 타고났으니까, 라는 말속에 이미 종교적 순종과 사회적 관례를 따른 것이다. 이에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차별이 있다는 인간 불평들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이런 인간불평등의 기원이 재산과 제도에 있다는 견해를 인정한다. 다른 한편 인간들의 불평등의 기원은 진정한 자유를 느끼지 못하도록 언어(운명), 상식(업보), 과학(유전자)과 더불어 유용성(화폐)이 짜맞추기 한 결과일 것이다. 이 짜맞추기 의 결과 이전의 원인을 제대로 보자는 것이 베르그송의 ?사물 내부로(심층의식)?이며, 프로이트의 무의식(Id, pulsion)의 탐구이다. 두 학자 모두 물체적(신체적), 생리적 경험을 다루었으나 그 경험은 인간(익명의, 언어의, 상식의)의 경험인데 반하여, 무의식적(심적, 기억적)경험은 어떤 한 인간(구체적, singulier)의 고유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경험이 999중의 하나(1)로서 보편성도 일반성도 확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중요한 실증 경험이다는 것을 강조한다. 보편적 원리도 이 하나 때문에 그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하듯이, 일반적 법칙도 한 예외 때문에 법칙성을 상실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경험(구체적 실증적 경험)에서이다.

인간에 대한 실증은 만의 하나에도 인간의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언어 상식 과학 상징의 학문에는 사랑 즉 맛과 향기가 없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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