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서평] England, Britain, Great Britain, United Kingdom의 차이를 아십니까?

자료: http://www.hongik.ac.kr/~mjkim/article/htm/kmj,%20review,%20the%20Isles.htm
출처: 영국연구, 5 (2001. 6.) 141-162.
서평도서:  Norman Davies, The Isles: A History (Oxford: Oxford Univ. Press, 1999)
지은이: 김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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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Isles를 출판한 뒤 약 1년 동안, 이 책에 관한 논쟁은 영국에서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주요 신문과 서평 전문 서적, 그리고 기타 언론에서 데이비스의 책은 수많은 학자들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그의 책에 대한 서평의 제목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데이비스가 그의 주장을 펴는데 핵심 논리를 제공한 콜리(Linda Colley)는 영국을 지칭하는 “잡종 개의 개집 찾기”(“Mongrels looking for a kennel,” TLS, 2000. 3. 10.)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데이비스를 영국 사학자, 아니 어쩌면 역사학자로도 간주하지 않음직한 클라크(Peter Clarke)는 매우 격하게 “잉글랜드는 존재한 적이 있는가?”(“Was there ever an England?” NYTimes book review, 2000. 5. 7.)라는 제목으로 The Isles를 혹평했다. 비교적 중립적인 콜리트(Barry Collett)는 “영국의 붕괴는 영국인에게 최선일 수 있다”("Collapse of the UK may bring back the best of the British," 2000. 7. 10; http://www.theage.com.au/books/20000710/A63727-2000Jul10.html)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했으며,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서 있는 탈보트(Ann Talbot)는 “역사의 해체” (“Deconstructing History,” 2000. 10. 25; http://www.wsws.org/articles/2000/oct2000/davi)라는 제목으로 쓸모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책 대열에 The Isles를 끼워 넣었다. 이상에 보듯이 데이비스의 책은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찬, 반의 극단적인 반향을 가져왔다.

자신의 책에 관하여 격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저자 데이비스는 그의 주장을 요약해서 “The decomposition of Britain: How Anglocentricity distorts our islands' changing story”(TLS, 2000. 10. 6.)라는 글에서 그의 견해를 분명하게 개진했다. 이 글의 요지는 The Isles에서 주장한 내용과 동일했고, 약 1년에 걸친 영국 내에서의 논쟁은 그의 생각을 전혀 바꾸지 못했음이 증명되었다. 그는 자국사를 쓰는 것을 대양을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다. 드넓은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길은 너무 여러 갈래이고, 데이비스는 그가 영국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느낀 감응 그대로 그의 항로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길은 남들이 가지 않은 미개척 항로였다.

데이비스는 고심 끝에 The Isles란 책제목을 선정했다. 그의 선택은 책 전체의 경향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그의 책에 전통적인 ‘영국사’란 제목을 부여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두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영국(Britain)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잉글랜드 역사’ 혹은 ‘영국(Britain) 역사’라는 전통적인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섬에 있는 중요한 나라 중의 하나는 아일랜드이다. 그런데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을 결코 브리튼 섬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의 역사를 ‘브리튼’ 섬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또한 두 섬 중에서 큰 섬의 북부에 살고 있는 스코틀랜드 인들도 자신의 땅을 ‘브리튼’이라고 부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데이비스는 두 개의 섬을 브리튼 섬(British Isles)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데이비스 책의 제목에서 ‘브리튼’이란 단어가 빠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일단의 영국 사람들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전통적인 ‘국가’(nation-state)로서의 ‘영국’(Britain)이란 명칭을 유지하고, 두 섬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영국사”(British history)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영국(Britain)’의 범주에서 아일랜드가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갔고, 가까운 장래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가 독자적인 길을 선택하여 영국의 테두리보다는 유럽연합(EU)의 범주 안에서 활동한다면, 영국 정부가 두 섬을 지칭하는 말로 ‘영국’이란 단어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데이비스는 의도적으로 영국사를 다루는 책에서 ‘영국’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책제목 자체가 현재 영국의 지성계를 분열시킬 소지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The Isles의 목차 또한 전통적인 영국 역사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영국에서 역사 연구를 하기 시작한 이래 사용된 전통적인 역사 용어들은 책의 목차에서 거의 모두 빠졌다. 그는 역시 의도적으로 기존의 역사 개념이 집합된 용어들을 그의 목차에서 배제했다. 실제로 아무리 영국사를 오랫동안 공부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책의 목차만으로는 시기와 내용을 유추하기 어렵다. 그의 책은 The Midnight Isles, The Painted Isles, The Frontier Isles, The Germanico-Celtic Isles, The Isles in the West, The Isles of Outremer, The Englished Isles, Two Isles: Three Kingdoms, The British Imperial Isles, The Post-Imperial Isles라는 열 개의 단원으로 선사시대부터 1999년에 이르는 두 섬과 이에 부속된 작은 섬들의 역사, 즉 기존의 표현으로는 ‘영국’의 역사를 다루었다. (...)

저자 데이비스가 한 강연에서 토로했듯이, 유럽과의 통합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영국 국민주의자(English nationalist)들은 그의 책을 “위험한 책”으로 분류했다. 데이비스의 책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만을 기록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현재 영국 사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인 유럽으로의 통합을 목전에 두고, 저자가 견지하고 있는 정치적인 믿음을 역사적인 사실로 표현한 매우 분파적 정치 성향이 강한 역사책이다. 유럽연합으로의 통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쓰레기와 같은 것으로 보일 것이고, 그 반대의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불후의 고전으로 남게 될 것이다. (...) 데이비스는 유럽 대륙과 영국의 역사를 분리해서 다루었던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했다. 영국 역사는 유럽 대륙에서 고립된 섬 특유의 역사를 이루지 않았다. 영국의 섬에서 소아시아 반도에 이르는 범 유럽적인 역사의 일부분으로 영국 역사는 성장했다. 영국 해협은 유럽의 문화를 막아냈던 장벽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를 흘러 들어오게 하는 통로였다.

을 헌정하는 문구 또한 인상적이다. 이 책을 헌정 받은 Richard Samson Davies는 저자의 할아버지이다.

"To the memory of
Richard Samson Davies (1863-1939)
English by birth, Welsh by conviction, Lancastrian by choice, British by chance"

이 헌정사는, 영국이 단일 국가가 아닌 여러 나라와의 상호 연관에서 성장했듯이, 자신의 정체성 또한 여러 ‘나라’에서 연유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

데이비스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용어의 암시성에 매우 민감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전통적인 역사 용어를, 심지어 고유명사를, 대거 바꾸었다. 그는 이 작업을 “영국 중심주의(Anglocentric)가 만들어낸 수세기에 걸친 연구사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으로 생각했다. The Isles라는 책제목과 목차 이름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났지만, 기존에 영국사를 전공한 많은 학자들도 데이비스가 사용한 고유명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Great Stone Circle, Great Isle, Green Isle, The Sleeve, Middle Sea, Guillaume le Conquerant, Willem van Orange는 각각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들 용어는 앞으로부터 각각 Stonehenge, Britain, Ireland, the English Channel, Irish Sea, William the Conqueror, William of Orange를 의미한다. 데이비스는 이런 작업을 했던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외국 이름의 습관적인 영어화(Englishing)는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적이 아닌 우리 [영국]의 과거를 감추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와 같은 영어화는 잉글랜드의 고유성(Englishness)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을 가장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며, 영국화(Anglocization)를 통해서 제국의 위대함을 세뇌시키려는 검은 저의도 담고 있다. 따라서 잉글랜드화, 영국화, 영어화는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간에 모두 제국주의적 사고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제국이 쇠망해 가는 요즈음에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사항들이다.

역사 용어의 영어화는 시대착오주의의 소산이기도 하다. 프랑스에 근원을 둔 Angevin왕들은 당시에는 잉글랜드 인이 아닌 프랑스 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세의 잉글랜드 인은 이들의 정체성을 잉글랜드화 하기 위해 이들의 이름을 영어화해서 사용했다. 이런 시대착오주의를 데이비스는 수정했다. 따라서 그는 Edward왕을 Edouard로, Henry는 Henri로, John왕을 Jean왕으로 바로잡아 그의 책에서 사용했다. (...)

그렇다면 잉글랜드 인은 누구였고, 현재는 누구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지역을 의미하는 잉글랜드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잉글랜드 인은 아니며,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또한 모두 잉글랜드 인은 아니다. 잉글랜드 지역 이외의 사람들, 즉 잉글랜드 이외의 세 왕국의 사람들도, 필요시에는 영국중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잉글랜드 인이 되었다. 심지어 정복왕 윌리엄과 같은 침입자도 잉글랜드 인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영제국이 황금시기를 구가할 때에는 모든 제국의 사람들이 잉글랜드 인화 되기도 했다. 이제 유럽연합으로의 통합을 앞두고, 지금까지 멋대로 잉글랜드 인으로 편입되었거나 혹은 축출되었던 각국의 주민은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현재 영국 전체 인구의 80%는 잉글랜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머지 20%의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러했듯이 잉글랜드 인에게서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인종적으로 과거에 잉글랜드에 살았던 종족은 결코 아니다. 현재 영국에는 인종적으로 볼 때 잡종들이 모여 살고 있다. 아프리카 인, 카리브해 인, 아시아 인, 아랍 인, 스코틀랜드 인, 웨일즈 인, 심지어 대륙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잉글랜드에 거주하여 영국인이 되었다. 런던 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턴적인 도시”가 되어, 300종 이상의 언어가 도시 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잉글랜드 인 혹은 영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집중적으로 언급한 데이비스의 책에 콜리는 매우 적절하게 “잡종 개의 개집 찾기”라는 서평 제목을 붙였다. 잡종 개는 영국인이고, 이들 잡종 개들이 자신의 종족에 따라서 각기 안주할 자신의 개집, 즉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을 시사하는 제목이다.

        데이비스 책의 헌정사가 예지하듯이, 이 책에서 다루는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영국(Britain)의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어떠했고, 현재 영국에서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영국의 정체성 문제는 현재 영국에서 “심각한” 사회적인 이슈이다. 무엇이 영국의 정체성인가? “British”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잉글랜드(England)”란 단어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혹은 오류나 관습에 의해서 영국(Britain)을 의미했다. 여기에서 영국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는 섬을 의미했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1970년경까지 잉글랜드 역사(English History)와 영국 역사(British History)는 혼용되었고, 런던 대학(University of London)의 경우에는 1974년에야 비로소 English History 대신에 British History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British History 연구는 위축되었고, 대신에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역사는 번성하는 분야가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영국사(British history)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어떤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 1999년에 발간된 BBC에서 사용하는 단어에 관한 설명 책자는 이런 상황이 실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자에 의하면, British와 English라는 단어는 “상호 호환성이 없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이 책자는 강조 사항 하나를 특별히 굵은 글씨로 인쇄했다. “당신이 영국(UK)을 의미할 때는 국가를 언급하지 마시오 (Don't talk about 'the nation' when you mean 'the UK [United Kingdom]).” 만일 이 BBC 책자의 논리가 맞는다면, Isles 내에는 네 개의 실제적인 국가가 존재하며, 국가로서는 “영국(British nation)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많은 원로 역사들이 BBC의 단어 설명에 동의했고, John Cannon도 1997년에 이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에 의하면 “영국 정부는 존재했었지만, ... 국가로서의 영국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Though there was a British state, ... there was never a British nation).” 더욱이 그는 영국 정부의 존재를 의미할 때 과거 시제를 사용했다. 물론 데이비스는 BBC의 가이드라인과 Cannon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따라서 그가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영국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707년까지 영국(Britain)의 법제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헌장과 같은 법률 문서는 영국의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것이었다. 또한 이때까지 영국 경제(British economy)라는 것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영국’이란 단어가 1707년에 만들어진 이후에도 영국은 영토 내에서 동일성을 진작시킬 수 있는 “연방(federal) 혹은 중앙집권적 구조”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영국은 국가 교회를 만들지 않았고, 통일된 법제도나 교육제도를 강제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통일된 문화 정책도, 역사도, 국가 체제 내에서 발전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로서의 영국(the British nation)은 ‘영국 시민'(citizens of the United Kingdom) 모두와 완전히 합치되지 않으며, 유동적인 구성원을 포함하는 조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의 존재는 더욱 알기 어렵게 된다.

영국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정체성을 복수로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상황에서 자연스런 형태이다.” 다양한 국가의 정체성과 다양한 문화에 근원을 둔 다민족의 영국인들이 ‘영국’이라는 정체성을 잃은 것은 많은 정체성 중에서 단지 하나를 잃는 것에 불과하다. 분명히 현재의영국은 “역사상에 나타난 영국적인 (Britishness) 모든 기반이 사그라지는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섬들을 대륙으로부터 분리시켜 놓았던 모든 정치, 경제, 문화적 장벽은 신속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난 4세기 동안 고립되었던 4개국은 이제 유럽에 합류할 시기가 되었다.

 데이비스는 “영국의 죽음?” 혹은 “영국 폐지(The Abolition of Britain)”가 임박했다고 믿고 있는 소수 인사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에게는 임종을 앞둔 영국의 낙관적인 미래는 유럽연합이라는 존재에 연관되어 있다. “영국(the United Kingdom)은 제국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따라서 제국의 몰락은 영국의 존재 이유 자체를 없애버렸다.” 어차피 지금으로부터 “60년 후”에는 서유럽의 모든 국가와 동유럽의 상당수의 국가들은 영국을 포함해서 하나의 초국가적인 조직에 소속될 것이다. 유럽연합이 있는 한 영국의 분해와 몰락이 반드시 우려할 일만은 아니다.

영국과 4국과의 관계는 이미 19세기 초부터 영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결코 요즈음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문제에 관련된 주제로 근자에 출판된 책은 많이 있지만, 이들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책은 바로 데이비스의 책일 것이다. 데이비스의 The Isles는 여러 면에서 인기리에 BBC에서 방영된 스카마(Simon Schama)의 대중용 텔레비전 역사물 시리즈를 예고하였다(이 프로그램의 전반부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A History of Britain: at the edge of the world? 3000 BC - AD 1603, New York: Hyperion, 2000). 스카마의 영국사 시리즈는 우선 대중오락을 겨냥하여 만들어져서, 데이비스의 책처럼, 영국사 전문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 평자는 “스카마 같은 능력 있는 대중 설득자를 발견한 것은 영국사에 커다란 행운이었다”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학문적 배경에서 스카마가 영국사 전공자 출신이 아닌 점도 데이비스와 비슷하였다. 그리고 둘은 모두 영국사를 유럽사의 일부분으로 취급한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텔레비전 시리즈의 성공으로 이제 스카마는 영국사 권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등장했으며, 데이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한 두 학자는 모두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둘 다 모두 뛰어난 상상력으로 학계에 많은 자극을 주었으나, 정작 영국사라는 학문의 발전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한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III

필자가 볼 때 데이비스 책의 가장 큰 주제는 영제국의 흥망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제국주의에 관한 책과는 많이 다르다. 이 책은 대륙과의 연관 속에서 영제국의 성장과 쇠퇴를 다루었고, 이 과정에서 영제국을 형성했던 4개국의 상호 연관성과 상호 기여했던 역할을 중심으로 하여 제국의 역사를 다루었다.

제국의 먼 과거는 대륙과의 직접적인 상호 작용에서 시작되었다. 대륙과 관련된 민족 구성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침입, 바이킹과 노르만의 침입, 오늘날 프랑스에 그들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중세 영국의 왕들, 대륙의 기반을 회복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인위적인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만들어 이를 ‘영국’(Britain)의 정체성으로 확대 및 보급시켰던 잉글랜드의 튜더 왕들, 영제국의 정신적, 헌정적, 문화적 기반을 제공했던 종교개혁, 대륙 세력의 영국 정복으로 끝난 영국 내전 등의 배경에서 영제국은 성장하였다. 제국의 성장기에 집권했던 왕들로 데이비스의 평가를 가장 낮게 받은 왕은 “부인 연속 살해범” 헨리 8세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이며, 반면에 가장 각광을 받은 왕은 과거에는 무능했다고 알려진 제임스 1세였다. 제임스의 업적은 영제국의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 제임스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1603년에 우선 통합했고, 이 통합의 원칙이 계승되어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된 결과 United Kingdom이 성립되었다.

‘잉글랜드’의 제국주의는 중세부터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제국의 근본 골격이 만들어졌는데, 엘리자베스의 아일랜드 정복과 스코틀랜드와의 통합 시도는 잉글랜드 제국주의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 결과 “내부제국”(inner empire)이 성립되었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재정복과 항해법은 영국의 경제가 영제국 내의 폐쇄된 영역 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으며,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적인 역량이 쇠퇴한 틈을 타서 영국은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최초의 영제국은 United Kingdom의 설립으로 완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데이비스에게 1707년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다. “1707년부터 두 섬은 영국적(British)이면서 동시에 제국이었다.” 이 해에 제국이 공식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해에 성립된 United Kingdom(UK)은 단순하게 구 잉글랜드 왕국의 새로운 이름이 아니었다. 구 잉글랜드 왕국은 구 스코틀랜드 왕국과 마찬가지로 근대 국민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UK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UK는 단지 복합 왕조 국가(composite dynastic state)에 불과했다.

18-19세기에 왕들은 정치적인 실권은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유럽 대륙 출신으로서 반(反) 영국적인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대표했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공은 독일어로 부부 사이에 의사를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빅토리아 당시가 그러했듯이, 이 당시의 비영국적인 왕들 밑에서 영제국은 영광의 시대를 구가했다. 이 시기에 영국을 형성했던 4개국 국민들은 ‘모두’ 제국의 번성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영국 의회, 법, 해군, 경제, 이들이 사용했던 언어인 영어, 그리고 제국의 문화가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데이비스는 제국의 쇠퇴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했고, 이 서술이 그의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일 것이다. 그는 필요한 경우에 매우 적절하게 각종 통계 자료를 동원해서 그의 논지를 설득력 있게 설파했다. 그는 제국의 힘의 근원을 이루었던 영국 군사력의 퇴조를 영국 해군력과 타국의 해군력을 비교해서 설명했다. 이미 제1차세계대전 당시에 영국의 해군력은 2류에 불과했다. 데이비스가 언급했듯이, 이 당시에 미국과 일본 모두 영국보다 더 많은 전함을 건조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르러 아시아는 일본이,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미국이 해상권을 장악했다. 영제국의 위상은 미국의 공군력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실추되었다. 전통적으로 해군력에 기반을 두었던 제국의 힘은 20세기 초에 여지없이 붕괴되었다. 영제국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붕괴되고 있었다.

        1900년대 후반에 영제국이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각종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영국의 공무원 수는 군인 수보다 월등히 많았다. 1891년에 영국의 공무원 수는 79,000명이었으나, 1979년에는 730,000명으로 무려 9.2배가 증가하였다. 또한 새롭게 공무원 사회에 대거 진출한 사람들은 사회 계층적으로 볼 때, 전통적으로 공무원 직위를 맡았던 계층 출신이 아니라, 비교적 교육을 잘 받은 브리튼 4국의 중산층 출신들이었다. 반면에 영국군의 수는 현격하게 감소하였다. 1918년에 8,500,000명이었으나, 1999년에는 119,000명이 되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영제국의 성격은 분명해졌다. 영국은 무력을 앞세운 제국이라고 하기보다는 공무원의 행정력에 근간을 둔 국가였다.

        신교가 전통적으로 제국에서 차지했던 위상도 급격하게 추락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정치 세력으로써 종교가 약화됨과 동시에, 신교는 영국 정체성에서 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영국 중심의 역사적 해석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종파는 카톨릭이었다. 카톨릭은 영국 역사 전반에 걸쳐서는 물론이고 특히 잉글랜드의 역사에서 반영국적인 요소의 대명사였다. 이런 카톨릭이 요즈음에 신교 일색의 전통적인 역사 해석을 많이 수정했다. 종교개혁, 영국혁명, 명예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은 어쩌면 카톨릭적인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린다 콜리가 말한 바와 같이 카톨릭적인 해석은 이미 학교의 교과서에도 그 요지가 실렸다. 이제 교과서에는 엘리자베스도 많은 카톨릭 교도를 처형하는 등 심각한 폭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영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영국인의 ‘명예’로 인식되었던 ‘명예혁명’의 3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지 ‘않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이유는 카톨릭에 대한 편견에 입각해서 ‘명예’가 수립되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종교와 관련된 영국 정체성의 문제는 이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로 보이겠지만, 제국 시대에 한 때 커다란 종교적인 영향력을 구사했던 감리교도 수는 1994년 현재 이슬람교도와 같은 전체 국민의 2%에 불과했다. 현재 영국이 과연 기독교 국가인가에도 의문점이 남는다.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종교적인 믿음 그 자체가 몰락한 것이다.” 1994년에 영국에서는 아무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전체의 24%를 차지해서, 그 어떤 종파의 신도 수보다 월등히 많았다. 영국이 신교 국가라는 말도 지난날의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다. 한 때 제국의 종교로 대접을 받았던 국교도(4%)보다는 카톨릭 교도(9%)의 수가 더 많아서, 다수 종파로 국가의 대표적인 종교를 결정한다면 영국은 구교 국가로 분류될 수도 있다.

        현재 영국은 과거에 제국을 응집시킬 수 있었던 종교라는 영적인 지주를 상실했다. 영제국의 정신적인 지주를 이루었던 종교는 이미 붕괴되었다. 혹시 영제국의 이름이 아직까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영국은 기독교도 국가라고 하기도 어렵고, 신교 국가라고 하기도 어려우며, 영국 국교가 영국의 정신적 지주라고 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영제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영국은 영국 국교도 숫자가 가장 많게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런 종교적 성향을 표시하지 않은 영국인들은 공식 통계에서 “영국 국교회에 나가지 않는 국교도”(non-practicing Anglicans)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종교개혁을 이룬 후에도 영국(Britain) 국교는 국가의 종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강력한 에라스투스주의적인 전통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프러시아와는 달리 신교를 국가의 종교로 강제한 적이 역사상에 한 번도 없었다. 영국에서는 “1707년부터 지금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 교회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웨스트민스터에 소재한 영국 의회는 20세기 초에 영국의 모든 섬들과 식민지에서 “독점적인 입법권을 행사”했던 기구였다. 그러나 1973년에 유럽공동체(Economic Community)에 정식으로 회원이 된 이후 이 독점적인 위치는 여지없이 손상되었다. 더욱이 유럽연합의 성장은 영국 의회가 전에 가지고 있던 활기와 지위를 위협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1999년 여름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독자적인 의회가 발족되어, 영국 의회는 과거에 제국에서 차지했던 막강한 위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통적인 영국의 귀족도 제국과 함께 시들어 가고 있다. 1958년부터 혈통이 아니라 공적에 의하여 귀족의 작위가 부여되었다. 이후 40년 동안 당사자의 일생 동안만 귀족의 지위가 유지되는 이런 부류의 귀족이 증가하여,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귀족의 명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가장 많이 바뀐 귀족 중의 귀족은 왕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최근에 유럽연합의 시민 대열에 합세하였다. 독일 출신으로 대륙적인 감각을 키워왔던 영국 왕실 사람들이 유럽 정체성을 다시 찾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영국은 1914년에 유럽의 일원으로 흡수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하여 몸부림 쳤다. 1945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은 20세기 말에도 또 한번 유럽으로의 흡수를 주저하였다. 이번에는 미국이 변수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영국은 유럽으로의 통합의 길을 걷고 있다. 1965년에 전통적인 제국의 화폐 단위에 10진법이 도입되었다. 1980년 이전에 “제국의 자존심”이었던 파운드화 경제권은 붕괴되었다. 유럽 연합과의 경제적인 통합을 앞두고 제국의 표준을 부여했던 영국의 전통적인 도량형은 유럽 쪽으로 통일되었다. 이리하여 1995년부터 도량형에서 미터법은 영국의 “유일한 법적 기준”으로 들어섰다. The Isles에 거주하고 있는 6,400만 명 가량의 인구(1999년)는 3억7,500만 명의 유럽 연합 앞에서는 난쟁이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에서 영제국 표준을 포기하고 유럽 표준을 따른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진행방향일 것이다.

        21세기의 문턱에서 대부분의 영국인은 제국주의적인 심리 상태를 극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인은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영국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세계를 도와주거나 지배하려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의 미래에 관한 논의는 현재 영국에서 정치적인 이슈 중에서 가장 불화를 조장하는 주제이다. 이 시점에서 영국인들이 생각해야 할 점은 영국 해협은 대서양보다 훨씬 더 좁다는 사실이다.

IV

이제 이 서평의 제목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할 차례가 되었다.
  • EnglandBritish Isles에 속한 Great Britain 섬에 있는 가장 큰 정치적 구역이며, British Empire의 핵심을 지칭한다. 그러나 복잡한 문제는 “British Empire의 핵심”이란 구절에 있다. 지금까지 많은 경우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England는 Britain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History of England란 책이 Britain의 역사도 포함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더구나 England를 형용사로 사용하면 이 단어에는 각자의 가치관을 개입되어, 경우에 따라서 지역을 의미하는 England의 형용사가 되기도 하고, 혹은 영제국의 문화적인 가치관을 투영하는 확대된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England 혹은 English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 Britain은, 영어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에 의하면,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는 섬과 이 섬에 부속된 도서 전체에 붙여진 이름이다. 좀더 완전한 이름으로는 Great Britain으로 불린다. 지금은 British state나 제국 전체에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Britain은 원래 지역적으로 아일랜드나 북아일랜드를 포함하지 않았다. 만일 제국 전체를 의미하려고 Britain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이 단어는 시기에 따라서 아일랜드를 포함하기도 하고 포함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1707년 이전의 상황에서는 Britain이란 단어가 British state나 제국을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데이비스에 의하면 “‘Britain’은 1707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United Kingdom의 보편적인 줄임말이다. 따라서 Britain에서는 잉글랜드와 비 잉글랜드의 전통들이 혼합되어 발전되었다.”
이와 같은 데이비스의 개념을 따른다면, Bede는 잉글랜드에 관하여 언급했을 뿐, Britain에 관하여는 서술하지 않았다. 웰링턴 장군의 승리는 잉글랜드의 승리가 될 수 없었다. 웰링턴의 근원은 잉글랜드가 아닌 아일랜드였기 때문이다. Britain이란 단어는 지금까지 매우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왔다. 경우에 따라서 잉글랜드, the United Kingdom, Great Britain, Britain의 섬 등을 의미했다. 어쩌면 Britain이란 단어는 이 단어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에게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형용사 British는 명사 Britain보다 더더욱 다양한 의미를 필자와 독자에게 제공할 것이다. Britain과 British 역시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운 단어들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Great Britain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Great Britain은 “British Isles 중에서 가장 크고 또한 유럽에서 가장 큰 섬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 명칭은 Act of Union(1707)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즈가 통합된 후에 부여되었다. 북아일랜드와 함께, 이들 [세 국가]는 United Kingdom을 구성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일랜드 모두를 포함하였다.” Great Britain에 관해서는 다음 문단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이 단어는, Britain과 마찬가지로, 1707년 이전의 상황에는 적용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United Kingdom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용어 뒤에 어떤 단어들이 붙는가에 따라서 의미가 각기 달라진다. 소문자로 각기 시작되는 united kingdom은 1707년에 성립된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을 줄여 쓴 표현이다. 그러면 대문자로 각기 시작되는 United Kingdom[UK]은 어떤 의미인가? 이 용어는 다음의 매우 ‘상이한’ 세 가지 경우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UK가 무엇을 정확하게 의미하는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첫째, The United Kingdom of England and Scotland는 1707년에 공식적으로 형성되었다. 유의할 점은 이 명칭이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명칭에는 1536년에 잉글랜드에 편입된 웨일즈가 빠져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왕국은 “Great Britain”이란 “명칭 하”에 통합할 것을 결정하였다. 즉, Great Britain이란 명칭은 아일랜드나 북아일랜드를 포함하지 않으며, 공식 명칭도 아니었다.

둘째,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는 1801년의 Act of Union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Great Britain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1707년에는 Great Britain이란 용어가 공식적인 명칭으로는 채택되지 않았다). 이 용어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포함하는 정치적인 조직의 이름이다. 따라서 Great Britain은 18세기의 개념과 19세기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18세기에는 Great Britain의 의미에서 아일랜드가 제외되었고 통합 조직의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었지만, 19세기에는 아일랜드가 포함되고 통합된 조직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대신 스코틀랜드는 명칭에서 탈락했다). 1922년에 아일랜드가 독립하여 영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뒤에도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란 명칭은 한동안 사용되었다.

셋째,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란 또 하나의 새로운 명칭이 1927년부터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아일랜드가 영제국에서 빠져나갔음을 뒤늦게 공식화한 명칭이다. 그런데 이 명칭에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가 제외되었다.

이 정도의 설명이면 England, Britain, Great Britain, United Kingdom이란 용어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Great Britain은 GB라는 약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 GB라는 스티커를 붙인 차량은 영국(UK) 차량이다. 왜 정식 명칭인 UK로 쓰지 않고 GB로 쓰는가? GB는 18, 19, 20, 21 세기의 의미가 각기 다른데 이 중에서 어떤 시기를 의미하는가? 1707년 이후에는 영국이 ‘제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GB를 쓰는가? 섬의 이름을 강조하여 GB 속에서 북아일랜드를 제거하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적 성향을 무시하려는 의도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United Kingdom과 Great Britain이 동의어가 아님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국과 미국의 도서관 사서들도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한다. 프랑스 역사를 도서관에서 주제별로 찾으려면 [..]로 찾아야 하고, 이탈리아 역사는 [..]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볼 때, 영국사를 찾으려면 [..]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류로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로만 영국사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유럽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두 개의 큰 섬에서 이루어진 역사 전체를 무엇으로 호칭할 것인가? History of Britain? 그러나 Britain이 섬의 이름을 의미할 때에는 둘 중에서 큰 섬만을 의미할 수 있고, 아일랜드 섬을 포함하면 제국이 되어 1707년부터 1922년 사이의 역사에만 해당되는 이름이다. 적절하지 않다. History of England? 이런 이름으로 지금까지 두 섬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이름은 잉글랜드의 역사를 의미하지 제국의 역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시 적절하지 않다. History of Great Britain? 이 경우에는 큰 섬 하나만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아니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United Kingdom과 Great Britain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서 18세기 이후의 UK 역사에 이름을 잘 못 붙인 책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 제목도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History of the United Kingdom? 이 경우는 17세기까지 전개되었던 4개국의 역사를 포함하지 않는다. 역시 부적절하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데이비스의 선택은 그저 The Isles였다.

그러면 The Isles는 적절한 제목인가?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영국 사람들이야 the Isles하면 대서양 연안의 자신들의 섬들이라고 당연히 인식할 것이다. 데이비스도 본성적으로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the’가 문제이다. “그 섬들(The Isles)”이 왜 하필이면 영국의 섬들을 가리켜야만 하는가? ‘그 섬들’은 일본을 의미할 수 있고, 인도네시아도 의미할 수 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데이비스에게는 두 말할 것 없이 바로 그 것, 즉 영국이다. 이런 단어는, 데이비스가 그토록 배척하려고 했던, 영국 중심주의적인 사고의 소산이고, 나아가서는 유럽 중심주의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 명칭도 글로벌 역사를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중립적인 단어가 아니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한글로는 어떤 제목을 붙이는 것이 적절한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브리튼 역사>>, <<잉글랜드 역사>>, <<그레이트 브리튼 역사>>, <<유나이티드 킹덤 역사>>, <<그 섬들의 역사>>, 모두가 적절하지 않다. 어쩌면 전통적인 책제목인 <<영국사>>가 가장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섬들의 역사’보다는 훨씬 더 적절하다. 우리에게 ‘영국’이란 England, Britain, Great Britain, United Kingdom 모두를 의미한다. ‘영국’이란 단어는 앞의 네 개의 단어에서 특정 단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제국이 되기 전의 튜더 시대도 ‘영국’이고, 제국으로서의 영국도 ‘영국’이며, 현재의 영국도 ‘영국’이다. 만일 영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책 이름을 붙이는데 진정으로 중립적인 영어 명칭이 필요하다면, 영국이나 유럽이 아닌 제3국인 한국에서 객관적으로 ‘그 섬들의 역사’를 지칭하는 Youngkuksa라는 외래어 영어단어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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