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7일 수요일

Verstand...Understanding...오성?...앎

자료 1: 네이트백과

오성[ 悟性, Verstand ] (영)understanding: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서 감성, 이성과 구별되는 인식능력.

오성은 실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성과 동일하지만, 칸트는 오성과 이성을 엄격히 구분했다. 오성은 주관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형식, 즉 범주의 도움으로 감성의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그에 반해 이성은 우주·영혼·신 등 초경험적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칸트에 따르면 오성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낳지만 이성은 오류를 낳는다. 일반적으로 오성과 이성은 감성과 구별되는 인간의 정신활동이라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덧글 1: 그전에 이글을 썼을 때는, 칸트의 오성(understanding)을 지성으로 번역했었는데, 여기서는 교정을 해서 오성으로 썼습니다. 스피노자의 지성 개선론에서, understanding을 지성으로 번역한 것처럼, 지성으로 썼었는데 말이죠... 칸트의 오성에서 오자는 깨달을 오(悟)입니다. 즉 자연에 대해, 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는 다는 거죠. 십 몇 년 전에는 칸트의 오성이란 단어를 보면서, 다섯 오(五)의 오성인줄 알고, 칸트에게는 다섯 가지, 생각의 양상이 있나보다 했던 기억이 있네요... 고딩때였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덧글 2: '오성'은 대부분의 학술 개념 용어들이 그렇듯이 일본에서 통용되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쓰던 용어니 일반인들은 알아들을 도리가 없죠. 하는 짓을 지칭하는 걸로 하자면 '오성'은 엉뚱한 번역어에 속하고 차라리 '지성'이 낫습니다. 칸트 것이든 아니든 (근대) 인식론에서 인식이라는 것은 깨닫는 것하고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덧글 3: 칼도/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순수 이성 비판》이 제기하는 질문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이니, 깨달을 오가 아닌, 그냥 알 지 자의 지성이라고 쓰는게 더 타당해 보입니다. 저렇게 간단한 understanding에 대해 다른 이들이 오성이라고 쓰니, 지성으로 쓰다가 오성으로 바꿨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요. 댓글 감사했습니다.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코니스베르크, 프러시아, 1784년 9월 40일)

IMMANUEL KANT, Beantwortung der Frage : Was ist Aufklärung? (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Enlightenment?") Königsberg in Preußen, den 30. Septemb. 1784.

▣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man's emergence from his self-incurred immaturity)

▣ 미숙함이란?
자신의 오성(Vestand, understanding)을 다른 이의 지도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무능함

▣ 언제 미숙함은 스스로 초래한 것이 되는가?
그 원인이 오성의 결여가 아니라 다른 이의 지도 없이 오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결여일 때.

▷ 그래서 계몽의 모토는 ‘Sapere aude!1 즉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이다.

▣ 미숙을 조장하는 후견인 계층의 형성
많은 사람들이 평생 미숙한 채로 남아있는 것은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다른 이들이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이 되기도 쉽다. 대신 이해하고, 양심을 대신해주고, 대신 음식을 정해주고 등등. 미숙하다는 것은 매우 편리하다! 남이 대신 해주니 자신은 노력할 필요가 없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친절하게도 감독하는 일을 맡은 후견인들은 곧 인류 중 가장 많은 수가 성숙으로의 전진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극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 위험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예들은 사람들을 겁먹게 하며 더 이상 시도하지 못하도록 한다.

▣ 개인이 미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의 어려움
이렇게 개인에게 미숙함은 제2의 천성이 되어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어렵다. 개인은 심지어 미숙함을 좋아하기조차 한다. 타고난 재질을 잘못 사용하는 데 쓰이는 기계론적 도구들인 도그마들과 공식들(Satzungen und Formeln, Dogmas and formulas)은 개인의 영원한 미숙함에 채워진 차꼬이다. 이것을 벗어던지더라도 자유로운 움직임에 익숙하지 않은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게 된다. 따라서 소수만이 스스로의 정신을 계발함으로써 미숙으로부터 벗어나서 계속해서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데 성공했다.

▣ 대중의 계몽은 느릿하게만 이루어진다
대중 전체가 스스로를 계몽할 가능성이 [개인의 경우보다] 더 크다. 대중이 자유롭게 두어진다면 이는 실로 거의 필연적이다. 후견인들 중에서도 항상 스스로 사유하는 소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숙의 멍에를 일단 떨친 후에 개인의 가치에 대한 그리고 모든 이들이 가진 스스로 사유해야 하는 의무에 대한 합리적 존중의 정신을 퍼뜨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후견인들에 의해 이전에 구속된 바 있는 대중이 후견인들 중 계몽이 불가능한 일부에 의해 적절하게 선동되면 이번에는 후견인들을 구속의 상태에 남아있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입견(Vorurteile)을 퍼뜨리는 것은 이렇듯 매우 해롭다. 선입견들은 그것을 처음 장려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은 계몽을 느릿하게만 성취할 수 있다. 혁명은 개인의 전제(專制)와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억압을 끝낼 수 있지만, 사유의 방식에서 진정한 변혁을 산출하지는 못한다. 새로운 선입견들이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는 거대한 대중들을 통제하는 사슬로 기능할 것이다.

▣ 이성(Vernunft, Reason)을 공적으로 사용할 자유
이러한 종류의 계몽에 필요한 것은 오직 자유이다. 여기서의 자유란 모든 점에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자유(von seiner Vernunft in allen Stücken öffentlichen Gebrauch zu machen)이다. 모든 곳에서 ‘따지지 마!’(Räsonniert nicht, Don't argue)의 형태로 자유에 제한이 두어지고 있다. (세상에서 오직 한 명의 지배자2만이 ‘무엇에 대해서든 따지고 싶은 만큼 따져라. 다만 복종하라!’고 말한다.) 이성의 자유로운 공적 사용만이 사람들에게 계몽을 가져온다. 이성의 사적(私的) 사용은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 있지만, 계몽의 진전에 부적절한 방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이성의 공적 사용의 의미
누가 되었든 전체 대중에게 말하는 학식있는 사람(Gelehrter, a man of learning)으로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

▣ 이성의 사적 사용의 의미
어떤 개인이 사회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특정의 직위나 자리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

▣ 이성의 두 가지 방식의 사용은 공존할 수 있다.
예컨대 성직자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리에 상응하여 회중을 가르쳐야 하지만, 학식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 교리의 잘못된 측면들에 대한 자신의 숙고한 생각들을, 그리고 개선안들을 제시할 자유와 의무가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사적’이고 ‘공적’인가?
성직자가 성직자로서 대하는 회중은 가족과도 같은 국지적인 모임이기에 그것이 아무리 크더라도 순전히 사적인 집단이다. 이에 반해서 성직자가 학식 있는 사람으로서 대하는 것은 세상 전체이다.

▣ 비(非)자유와 자유
성직자가 성직자로서 회중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경우는 성직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에게 외부(교회 체제)로부터 부과된 이미 정해진 것을 가르치는 것이기에 성직자로서의 성직자는 수동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된다. 이에 반해 세상 전체에 대하여 말하는 학식 있는 사람으로서의 성직자는 무제한의 자유를 가진다.

▣계약은 있을 수 없다
‘대중에 대한 후견집단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후견인 집단이 일단의 변경 불가능한 교리들을 서약으로써 지킬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 칸트는 ‘그것은 참으로 불가능하다’라고 답한다. 이런 종류의 계약은 인류의 앞으로의 계몽을 미리 막기 때문에 비록 최고의 권력에 의하여 비준되더라도 전적으로 무효이다. 한 시대가 힘을 합하여 서약함으로써 다음 시대를 계몽에서의 진전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을 수는 없다. 이는 계몽에서의 진전을 그 원래의 운명으로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범죄이다. 후대의 세대들은 이러한 전대(前代)의 계약을 승인되지 못한 범죄적인 것으로 기각할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어떤 법이 어떤 대중에 대해서 동의할만하냐 아니냐를 가리기 위해서는 그 대중이 그 법을 스스로에게 잘 부과할 수 있는가 아닌가를 묻기만 하면 된다.

▣ 계몽은 인간의 권리이다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자신을 계몽하는 것을 지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나 더욱더는 나중의 세대에 대해서 계몽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신성한 권리를 모독하고 짓밟는 것이다. 국민이 스스로 부과하지 않을 것은 국왕에 의해서도 국민에게 부과되어서는 안된다. 국왕의 입법권은 국민의 집단적 의지를 통일시키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시민적 질서(die bürgerliche Ordnung, civil order)와 양립 가능한 한 국민들이 자신들의 구원―이는 국왕의 일이 아니다―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중지시키는 것은 국왕의 일이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견해를 밝힌 저작들을 정부가 감시한다면 이는 국왕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또한 몇몇 폭군들의 정신적 전제주의를 지지하는 것도 그렇다.

▣ 계몽의 시대
우리의 시대3는 계몽된 시대(ein aufgeklärtes Zeitalter, an enlightened age)는 아니다. 인간 전체가 종교의 문제에서 외부의 지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당당하게 잘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아직 먼 길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길이 지금 열리고 있으며 보편적인 계몽에의 장애물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조들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계몽의 시대(ein Zeitalter der Aufklärung, an age of enlightenment), 프리드리히 대왕의 세기이다.

▣ 계몽 군주
종교적인 문제에서 국민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말하는 것이 자신의 위엄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고 보는 군주, 따라서 종교자유허용자라는 주제넘은 이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군주는 그 자신이 계몽된 군주이다. 그는 인류를 처음으로 미숙함에서 해방시킨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양심의 문제에서 자신의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한 사람으로서 칭송받을 만하다. 자유의 정신은 프러시아의 경계를 넘어서서, 자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정부들이 부과하는 외적 장애들과 싸워야 하는 곳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프러시아는 자유에는 공적 안정과 사회적 통일성에 대하여 걱정할 것이 조금도 없음을 말해주는 빛나는 사례이다.

▣ 인류의 잠재력
“인류를 야만의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인공적인 조치들을 취하지 않는 한에서는 인류는 스스로 점차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이다.”

▣ 종교를 계몽의 초점으로 제시한 이유
첫째, 지배자들은 예술과 과학의 영역에 관한 한 국민들에게 후견인의 노릇을 할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둘째, 종교적 미숙함이 가장 해롭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 계몽 군주와 공화국
그 자신이 계몽된 군주만이 ‘무엇에 대해서든 따지고 싶은 만큼 따져라. 다만 복종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공화국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더 높은 정도의 시민적 자유는 대중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더 극복하기 힘든 한계를 대중에게 부과한다. 반대로 낮은 정도의 시민적 자유는 정신에게 자신의 능력을 한껏 계발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자연이 이 딱딱한 껍질의 속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돌보는 씨앗 즉 자유로운 사유를 향하는 성향과 자유로운 사유를 할 사명을 끄집어냈을 때 이는 다시 점차적으로 대중들의 성격에도 작용하여 대중은 이를 통하여 자유를 다루는 능력이 점점 더 높아지게 되며, 마지막으로 정부의 원리에도 작용하여 정부는 이제 기계들 이상의 존재인 사람들을 그 존엄에 부합되도록 대하는 것이 정부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1. 영어로 직역하자면, ‘Dare to know!’이다. [본문으로]
2. 칸트 당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6, 프리드리히 대왕)를 말한다. [본문으로]
3. 칸트의 시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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