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http://blog.daum.net/amesmichelle/1288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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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이 설교와 구별되는 것은, 강론이 전례와 더욱 긴밀하게 연관되었고, 또 봉독된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에서 선포되는 본문과 표지 안에서 신앙에 감도된 신앙행위들이 삶에서 풍성히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그 고유한 의미에서, 강론과 다르게, 선교(missio)적인 설교로, 또한 가끔 전례와 연관을 가지기는 하지만, 주로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설교하는 것이다.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도 강론과 설교는 서로 구별된다고 할 것이다.14)
거룩한 본문에 대한 설명인 강론(homilia)은, 말씀전례에서 가장 오래된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유스티누스가 호교론을 집필한 2세기부터 강론은 전례의 한 부분이었다.15) 교부들의 시대는 또한 위대한 강론의 시기여서 교황과 주교들의 강론집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원래 강론은 주교의 특별한 권한이었다. 그 후 주교의 주례 하에서 강론은 가끔 사제들에게 맡겨졌고, 4세기에 이르러서야 사제들의 자율적인 강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강론은 또한 드물게 부제들에게도 맡겨졌지만, 평신도에게 강론을 맡기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이러한 경우는 동방교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16)
서방교회에서 똑같은 요구가 발생하였을 때, 주교들은 봉사자가 교부들의 강론을 읽도록 하였다. 카롤링 왕조 이후 시대에 교부들의 강론은 지방어로 번역되어 큰 소리로 혹은 조금 자유롭게 읽혀졌다. 좀 더 자유롭게 선포되고 또 전달되는 말씀의 봉사의 새로운 개화기가 중세초기 탁발수도회(프란치스꼬회, 도미니꼬회, 아우구스티노회 등) 설교가들의 활동으로 마련되었지만, 이것은 사실 강론이 아니라 교의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라고 할 것이다. 라틴어가 아닌 지방어에 의한 독서와 복음의 반복, 설명, 공지사항, 기도와 노래 등으로 구성된 이 부분이 확대될수록, 이 부분은 미사전례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었다. 또한 중세 중엽이후 성당 중간부분에 조금 높은 단을 쌓고 설교단(pulpito)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강론과 희생제사가 분리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17)
강론이 미사 거행과 별개의 것으로 여겨진 또 다른 이유는 강론형식의 지나친 자유로움이다. 트렌토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에 의해 재정립된 전례는 기도의 법이 믿음의 법이라는 원칙에 따라, 전례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지만, 강론은 본당신부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강론은 뭔가 특별한 것으로 여겨져, 여기에서 강론을 성찬례와는 점점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오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18)
몇몇 시기에 강론을 중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하는 강론은 전례 자체의 한 부분으로서 크게 권장된다. 더더군다나 주일과 의무 축일에 백성과 함께 거행하는 미사에서는 중대한 이유 없이 강론이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전례헌장 52항)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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