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자료 메모] 중세 영국의 개방 농지제(open-field system)



출처 1: 중세 영국의 개방농지제의 기원 (심재윤 지음. 동국사학, 제30권. 1996. 595~631쪽). 서지 정보.


출처 2: 중세 영국 농민의 상속관습과 개방농지제: 분할상속론 비판을 중심으로 (심재윤 지음. 서양 중세사 연구, 제10권 0호. 2003년 3월). 서지 정보; 소개 자료

※ 발췌:       중세 영국 농민 보유지의 상속 관습은 크게 비분할 상속(impartible inheritance)과 분할 상속(partible inheritance)의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비분할 상속은 토지의 분할을 방지하고 보유지를 한데 유지하기 위한 상속 관습이었다. 따라서 한 농민의 보유지는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 중에서 한 아들에게만 상속되었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맏딸에게 상속되거나, 딸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 ... ... )

상속 관습의 [유형]은 중세 영국에서 농지제의 유형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 개방 농지(open field) 지역에서는 비분할 상속이 일반적이었으며, 켄트와 이스트 앵글리아와 같은 비개방 농지(non-open field) 지역은 분할 상속이 중요한 상속 관습이었다.

예를 들면 노샘프톤셔와 같은 잉글랜드의 중부 지역은 대규모의 밀집된 촌락들로 특색을 이루고 있으며, 그러한 촌락들의 농지는 삼포 윤작(three-course rotation)을 특성으로 하는 개방 농지제(open-field system)에 의해서 경영되고 있었다. 촌락민들의 보유지는 농지 위에 스트립(strips)의 형태로 분산되었고, 그러한 보유지들은 계층 간에 동등성을 유지했다. 이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농민 보유지가 한사람의 남자에 의해 보유되었으며, 그 토지는 그의 아들 중의 한 명에게만 상속되었다.

반면에 켄트와 이스트 앵글리아는 잉글랜드 중부 지역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다. 켄트의 농촌은 개방농지촌락(open-field village)이라기보다는 작은 정주지가 그 특색을 이루고 있었다. 농민들의 보유지는 원래부터 분산된 스트립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으며, 보다 초기에는 밀집된 토지구역을 형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농민 보유지는 공동 규율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농업단위로서 경영되었으며, 여러 명의 상속인들에게 공동으로 상속되었다. ( ... ... )

농지들 사이의 스트립들의 다소 공평한 분할과 균일한 배치라는 개방농지제의 본질적인 특성이 상대적으로 후기까지 결여되었다 점을 인정한다 해도 보다 후기에 시행되었을 완전히 성숙된 개방농지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고 전반적인 보유지들의 재구성에 관한 증거가 필요하다.  ( ... ... )


출처 3: 중세의 경제 생활 (자료라기 보다는 자료의 출처 모음. 원광대학교 사학과, 마한역사교실)


출처 4: 중세 전성기 (High Middle Ages: 1050~1300)의 모든 것

※ 발췌:     수백에서 수천 에이커에 달했던 장원의 토지는 영주에게 속한 땅과 농노들에게 배당된 땅으로 구분되었다. 영주 직영지(demesne)로 불리는 전자는 보통 경작지의 1/3 내지 1/2크기였다. 그 땅은 농노들이 일정한 날에 경작했는데 대개 일주일에서 3일 정도였다. 영주 직영지는 커다란 땅덩이가 아니라 기다란 지조(地條, strips)로 이루어졌는데 이 지조는 농민 보유의 지조와 혼재되어 있었다. (교회 보유 지조가 따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지조들은 길고 좁다란 것이어서 멍에를 멘 말이나 소가 끄는 무거운 쟁기가 쉽사리 방향을 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각 지조의 경계에는 밭둑만 있을 뿐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체계를 일컬어 개방 경지제(open-field system)이라고 부른다. 농노들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도 거의 대부분 공동작업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 가축과 농기구를 공동으로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초지도 "공유지"라고 불렸다. 공동 소유의 가축들이 그곳에서 함께 풀을 뜯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작지와 목초지에다 또 농노들은 보통 보통 자신의 작은 텃밭을 더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원에는 별도의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영주의 사냥을 위한 것이지만, 돼지 먹이와 땔감 수집을 위해서도 유용한 것이었다. 농노들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경우에도 그 일 또한 공동으로 했다. 실로 장원제는 전반적으로 공동 작업과 결속을 강조하는 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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