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발췌] 로마의 장례조합



※ 발췌 (excerpts):

출처 1: 피의 광장: 로마 공화정을 위한 투쟁 (파멜라 마린 지음. 책우리, 2009) 구글도서

로마는 죽음과 장례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 둘 다 사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으니 철학자들은 죽음 뒤ㅢ 상황을 논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죽음에 대한 로마인의 전통적 관점은 그리스 신화적 관점과 매우 비슷했다. 로마의 신 플루토가 통치하는 지하 세계로 이어지는 삼도천을 건너려면 뱃사공 카론에게 삯을 지불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로마의 신화와 신념 체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다. 강을 건너고 나면 죽은 자는 심판을 받으러 가기 전에 머리가 세 개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지나쳐야 한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스포델로 가고, 사악한 자라면 타르타로스(이곳에서 죄과를 받는다)로 보내지고, 마지막으로 영웅이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엘리시움(낙원)으로 간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d)>에서 영웅 아이네이스는 하데스(지하 세계)로 가게 됐지만 황금가지로 그 지하 세계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이네이스 6권에서 뱃사공 카론은 '여기는 그림자와 잠과 둔한 밤의 땅'이라며 죽은 자들의 그림자가 목적 없이 떠도는 어둡고 몽롱한 아스포델을 묘사했다.

고위층의 장례식에는 주로 흐느끼는 여성과 음악가가 있고 때로는 광대와 춤꾼도 등장했다. 죽은 자와 그의 조상의 가면을 쓰고 걷는 행렬이 도시를 관통하다가 광장에 멈추면 누군가가 송덕문을 읽었다. 그러므로 44년 3월에 있었던 카이사르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그 유명한 송덕문도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장례 행렬은 매장지나 공동 묘지가 있는 도시 밖까지 이어졌다. 누구도 성벽 안에 매장될 수는 없었다. 로마 밖으로 나가는 큰길 주변에 많은 사람이 묻혔다. 그중에 가장 잘 알려진 질이 아피아 가도로, 세도가 출신의 고인들이 대거 그곳에 묻혔고 따라서 그곳에는 기념물도 즐비했다.

화려한 장례식에 들일 돈이 없는 낮은 계층 사람들은 장례 조합에 가입했다. 조합은 회원들이 기부한 돈을 공동의 기금으로 모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장례를 위한 적당한 절차를 밟아주었다. 적당한 매장지를 찾아주는 것이 장례 조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기원전 1세기 길드나 신학 모임 같은 단체 활동이 여러 번 금지되었지만, 장례 조합만큼은 계속 합법적인 단체로 남아 있었다. ( ... ... )


출처 2: http://www.handurae.org/neighborhoodstory/neighborhoodstory_02_view.asp?txtSeq=15&page=1

20세기 초, 조선이 망한 뒤 우리가 추구한 가치는 전통 농업사회의 유산은 모조리 땅 속에 묻어버리고, 철저하게 서구 근대화 산업화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사상과 문화, 전통 농업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문물은 낡고 창피하고 후진적인 것으로 여기며 폐기해 버렸다. 그 자리를 서양 문물과 문화가 대신했다. 두레나 계도 그렇게 사라졌고 그 자리에 서구의 공제조합과 협동조합이 들어오게 되었다. 공제조합은 서구 근대화, 산업화의 산물로서 서양의 ‘benefit society’, ‘mutual aid society’ 등을 번역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사회, 개인, 국가, 민족, 철학, 사상, 형이상학, 학문 등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어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과 중국보다 먼저 서구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에서 만든 한자 번역어이다. 협동조합도 공제조합도 일본이 만든 조어이다.

서구의 공제조합은 역사가 고대 로마의 콜레기아(collegia, 예컨대 우리나라의 상포계와 같은 모임으로 가난한 로마 시민들의 장례 공제조합인 콜레기아 테누이오룸collegia tenuiorum)나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도시 코뮨과 촌락 코뮨에는 자유인의 길드 조직과 함께 다양한 공제조직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인들의 연대체인 중세의 도시공동체와 촌락공동체는 근대 국가의 출현과 함께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근대 국가란 도시와 농촌의 자치공동체와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출처 3: 보험의 역사(인생설계사 신영이의 블로그, 2005.4.27)

보험이라는 사고방식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자연경제시대에도 불의의 재해로 입은 경제적 손해에 대비하여 상부상조하는 구제제도가 있었는 바, 바빌로니아왕 함무라비시대의 대상간에 사용된 규약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또 로마시대에는 장례조합 등이 있었으며 중세에 들어서는 길드가 그 직업조합의 조합원에 대한 화재, 수해, 도난등의 재해에 관련된 상호구제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000년 : 바빌로니아의 국가형성과 함께 육상모험대차가 있었다. 기원전 1600년 : 페니키야에서 해상모험대차제도가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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