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시민교육과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조명: 공공선택론적 관점을 중심으로
지은이: 박효종(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
※ 검색어: competitive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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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전략...)‘투표의 역설’을 보다 일반화한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는 공정한 민주절차와 관련하여 최소한의 요구사항인 다섯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집단 선택의 방식이 안출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조건이라면 집단 합리성(collective rationality)과 파레토 조건(Pareto condition), 시민주권(citizen sovereignty), 비독재성(nondictatorship) 그리고 비관련 대안으로부터의 독립성(independence of irrelevant alternatives)을 들 수 있겠는데, 과반수의 순환현상(cycles of majorities)은 이 다섯 가지 조건이 동시에 공존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전형적 현상이다. 결국 애로우의 정리는 상기와 같은 유권자들의 선호분포 상황에서 과반수결을 사용하는 집단선택에서 순환현상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선호결집절차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로 애로우의 정리에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심각한 결과는 집단선택을 위하여 통용되는 집단선택에서 전략적 투표(strategic voting)를 방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략적 투표는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실제선호(real preferences)와는 달리 현시선호(revealed preferences)를 표출하는 경우로서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투표함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기발드(A. Gibbard 1973)는 게임의 원리를 원용하여 하나의 정리를 양립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전략적 투표의 총체적 의미는 유권자들의 실제선호와는 상이한 현시선호에 의거 전략적 투표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집단 합리성과 공존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즉 특정 대안 x 가 유권자의 ‘외현상’ 과반수의 지지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해도 유권자의 과반수가 ‘내심으로’ 지지하는 y와 다르다면, 이것은 ‘실제의 대통령’과 ‘정신적 대통령’의 괴리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본 논의에서는 일단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가 결집 민주주의의 기본 결정규칙인 과반수결의 공정성과 적실성에 중대한 도전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뿐만 아니라 애로우의 역설은 절차 민주주의의 공정성을 무력화시킨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특정대안 x가 과반수의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또 다른 특정대안 y가 ‘내면적으로’ 과반수의 선호라면 집단선택에서의 합리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이들 현상은 민주선거의 결과, 즉 ‘국민의 뜻’이 임의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국민의 뜻’이 임의적이라면, ‘국민의 뜻(popular will)’에 의한 통치, 즉 ‘국민의 통치(popular rule)’는 무의미하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불가능성 정리로부터 ‘국민의사’에 의한 민주주의 불가능성으로 비약하려는 시도는 온당치 않다. 애로우의 역설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권자들의 모든 선호에 대하여 성립하는 것일 뿐, 항상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즉 실제의 상황에서 다수유권자들의 선호가 비교적 동질적인 선호를 표출하거나, 혹은 블랙(D. Black 1958)이 말하는 단봉선호(single-peaked preferences)를 표출할 경우 다수의 순환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애로우 역설의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현실세계가 다원주의사회라면, 단봉선호의 세계보다 양봉선호의 세계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유권자들의 선호가 단봉선호라고 해도 민주선거에서의 쟁점이 일차원적 쟁점(one-dimensional issue)이 아니라 다차원적 쟁점(multi-dimensional issue)일 경우가 허다한데, 애로우의 문제에서 해방된 ‘국민의사’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쟁점별로 분리해 각 쟁점에 대해서 각기 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겠는데, 아무리 민주제도가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방식을 원용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이 경우 의미있는 중위유권자(median voter)의 출현은 기대할 수 없는 셈이다.
물론 애로우의 역설만이 엄정한 ‘국민의 의사’추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사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선거절차는 이 점에 있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과반수결제(majority rule)와 상이한 상대적 다수결제(plurality rule)이다. 예를 들어 x: 38% y: 32% z: 30% 득표한 상황에서 x가 승리한다면, 절대적 다수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지지에 의한 대표가 출현한다는 의미로서 국민주권에 반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는 상대적 다수결제로 실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인 1표1가의 표의 등가성(等價性)을 위반하는 선거절차의 요소들도 관심사항이다. 최대선거구와 최소선거구사이의 격차, 선거구획정과정에서의 게리맨더링, 혹은 득표율과 의석 점유율사이의 격차현상등이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민주선거제도에서 후보자들에 대한 서수적 선호(ordinal preferences)의 표출만을 허용할 뿐, 기수적 선호(cardinal preferences)의 표출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보자. 유권자들이 특정정책이나 후보자에 대하여 기수적 선호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른바 ‘선호의 강도(preference intensities)’를 표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후보자 x, y, z가운데 y보다 x를 얼마나 더 좋아하는지 표출할 수 없고 다만 y 보다 x를 선호한다는 정보에 의하여 선호를 결집할 수밖에 없다면, 그러한 결집방식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 ‘국민의 의사’추출에 부합하는 방식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실상 일상생활에서도 집단선택의 경우 선호강도에 의하여 결정을 하는 경우가 적지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녀가 하나인 집에서 외식을 하려고 할 때 자녀 A가 피자집을 고집하면, 애초에 중국집을 주장하던 부모로서도 뜻을 굽히고 피자집으로 가게마련이다. 이처럼 단순한 선호서열보다 선호의 강도가 일상생활의 집단선택에서 존중되는 사례가 허다하다는 것은 선호강도의 존중이 진정한 선호결집의 방법임을 반증하는 셈인데, 정작 ‘국민의 의사’를 추출하려는 민주선거에서 선호의 강도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호결집기제로서의 원천적인 한계를 들어내는 셈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지적할 수 있는 민주선거의 문제점은 유권자의 선호를 결집하는 과정에서 ‘자기본위적 선호(self-regarding preferences)’보다 ‘타인본위적 선호(other-regarding preferences)’를 표출하더라도 이를 구분해 낼 방안이 없다는 사실이다. 자기본위적 선호란 개인이 자기자신의 관점에서 표출하는 선호이며, 타인본위적 선호란 타인의 관점에서 표출하게 되는 선호이다. 두말할 나위없이 ‘타인본위적 선호’보다는 ‘자기본위적 선호’가 결집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유권자의 의사’가 구체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강한 지역주의 정서를 갖고있는 유권자 A가 단순히 후보자 x의 출신지역이 자신의 고향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x의 당선을 자신의 일처럼 바란다면, 타인본위적 선호가 아닐 수 없다. 만일 x의 출신지역을 몰랐다면 x의 의정능력이나 혹은 표방하는 정책을 자기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한 다음 자신의 선호를 결정했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절도 모르고 시주하는” 상황과 유의미하게 비교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관점에서 자율적 선호를 표출하는 행위와 다르다. 결국 타인본위적 선호를 결집하여 국민의 의사를 추출한다면, ‘집단합리성’을 충족시키지 못할 공산이 크다.
마지막으로 유권자로서는 선거에 참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공공재(public goods)의 문제에 직면할 뿐 아니라, 후보자의 인물이나 그의 정책을 평가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일에 있어서도 공공재의 문제에 봉착한다. “할 일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후보자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 일반유권자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가 되어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전략을 원용하거나 혹은 사이먼(H. Simon 1955)의 통찰대로 “처삼촌묘 벌초하는” 상황을 방불케 하듯 적당히 아무 후보자나 선택하는 ‘만족화의 전략(satisficing)’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그 결과 선거를 통하여 구체화되는 ‘국민의 의사’가 부실할 가능성은 실제적이다.
결국 상기에서 논의된 일련의 사항들은 선거에 의해서 진정한 ‘민심(民心)’이나 ‘민의(民意)’가 추출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진정한 민의 추출가능성이 희박하다면, 국민주권이나 ‘국민에 의한 통치’는 실현되기 쉽지 않은 목표이다. ‘유권자의 의사’가 선호강도의 경시나 타인본위적 선호의 결집 혹은 ‘합리적 무지’나 ‘만족화’ 전략등의 요소에 의하여 부실한 범주로 전락하거나, 애로우의 역설에 의하여 분명치 않거나 임의적인 ‘국민의사’가 추출되고 혹은 단순다수결등, 많은 사표를 발생시키는 선거제도에 의하여 ‘다수의 의사’보다 ‘소수의 의사’가 민의에 반영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소수대표자들이 입법자가 되어 국회에서 법을 만든다면, 어떻게 유의미한 ‘국민에 의한 통치’가 가능할 것인가!
III. 책임민주주의
1. 경쟁민주주의
유권자들의 선호가 단봉선호에 국한된다면, 애로우의 역설문제가 방지될 수 있다는 상기의 지적을 상기해보자. 이 경우 특히 양당체제에서 정당들간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다운즈(A. Downs)가 말하는 ‘중위유권자(median voter)’가 출현할 가능성은 실제적이다. 그러나 단봉선호의 민주사회에서 경쟁민주주의(competitive democracy)가 활성화 된다고 해도, 또한 그 결과 ‘국민의 의사’가 중위유권자의 선호로 구현된다고 해도 ‘국민의사’의 질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 ‘국민의 의사’가 진정한 공공의 이익을 왜곡할 공산이 적지 않은 이유는 시민들의 이익과 관련하여 ‘공동체구성원’으로서의 이익보다 ‘이익집단구성원’으로서의 이익을 반영할 공산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선거에 의해 집권한 민주정부가 ‘집단이익(group interest)’의 범주를 넘어서는 ‘공공이익(public interest)’을 대변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은 실제적이다.
일반적으로 정당들은 불특정 다수시민들의 선호에 대하여 정확하게 접근하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조직된 집단, 즉 소수의 이익집단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불특정다수시민들의 선호는 왜곡되고 이익집단의 구미에 맞는 선호로 대체될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전략적 위치에 있는 이익집단은 공동체전체에는 손실을 끼치는 반면, 배타적으로 자신의 조직에 유리한 정책들을 위하여 로비활동을 벌이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다수결로 운영되는 선거에서 정당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반드시 유권자과반수의 득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보자. 이 경우 과반수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보다 상대적 의미에서 최소한의 승자연합, 혹은 고정된 조직표를 극대화하려는 노력만을 경주할 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슘페터(J. Schumpeter)의 유비적 표현을 원용하면, 정치시장(political market)이란 ‘정치적 기업가(political entrepreneurs)’인 정당과 ‘정치적 소비자(political consumers)’인 유권자로 구성되어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치적 기업가들은 공동체전체의 구성원으로서보다는 사적 이익집단구성원으로서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정책프로그램에 매료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정당들에 관한 한, 공동체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책들을 제시할 인센티브는 별로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 즉 공익(公益)이란 시민전체에 걸쳐 널리 분산되어 현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효과에 있어서도 장기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소수의 사적 이익집단에 ‘분리가능한 혜택’을 공여하는 정책들은 눈에 띄고 또한 그 효과에 있어서도 직접적이다. 예를 들면 사회전체적으로 볼 때 공정한 과세제도를 구축하는 방안은 공익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과세특례제도나 간이과세제도를 운영함으로 특정집단, 즉 자영업자들에게 분리가능한 이득을 공여하는 데 정당들이 집착하는 이유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특혜는 직접적이어서 득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과세의 형평성을 기하기보다는 과세에 불만이 많은 봉급생활자들에게 근로소득세를 감면해주는 방안도 정당의 득표활동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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