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5일 화요일

[참고] 면화와 영국 산업혁명

■ 자료 1: [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⑧ 면화
출처: 조선일보, 2010.02.09.
지은이: 주경철 교수

5000년 전 인도서 시작된 면직물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불씨 되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인도 직물의 수입은 영국 경제를 기적적으로 일신시키는 자극을 주었다. 엄청난 양으로 수입되어 국내 경제를 압박하는 이 직물을 국내에서 생산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인도에서처럼 헐값을 받고도 세계 최고 수준의 직물을 제조하는 인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답은 기계화에 있었다. 영국 산업혁명은 바로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인도 짓밟고 산업화 깃발 휘두른 영국

면직물업의 기계화 과정을 일별하면 방직(紡織·옷감 짜기)과 방적(紡績·실잣기) 부문에서 교대로 혁신이 일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방직이 너무 발전해서 실이 모자라게 되면 곧 방적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일어나고, 그러면 다시 방직 부문에서 돌파가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중요한 첫 발명은 1733년 존 케이의 플라잉셔틀(‘날아다니는 북’이라는 뜻, 한자어로 비사(飛梭)라고도 한다)이었다. 이로 인해 직조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면서 미처 실을 충분하게 대지 못해 병목 현상이 생겼다.

이 문제를 푼 사람은 제임스 하그리브스라는 목수 출신의 발명가였다. 그가 1765년에 개발한 제니방적기는 수동으로 조작하는 크랭크를 이용해서 여러 개의 물레 가락을 한 번에 작동시키는 기계였다. 이 기계 하나로 한 사람이 무려 30~40명에 해당하는 일을 하게 되자 일자리를 빼앗긴 여인들이 하그리브스의 작업장에 쳐들어가서 기계를 부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제는 이 기계가 아주 단순해서 누구나 쉽게 모방해서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그리브스는 특허 소송에 몰두했으나 끝내 큰 수익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이 기계를 더욱 개량하여 수력을 이용해서 크랭크를 돌림으로써 이제 손을 쓸 필요도 없는 수력방적기를 만들어냈다. 1779년 아크라이트는 2000개의 물레 가락을 갖춘 대형 방적공장을 세웠다. 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일자리를 잃은 여공들이 달려들어서 공장에 불을 지르고 기계를 파괴했고, 특허 소송에서도 토머스 하이즈라는 인물이 자신이 먼저 기계를 발명했다는 주장을 편  데 대해 반증을 제시하지 못해 패소했다. 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후 그의 발명품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방적기가 영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다시 1779년에는 새뮤얼 크럼프턴이라는 기계기술자가 제니방적기와 수력방적기의 장점을 섞은 뮬(mule·암말과 수나귀 사이에 태어난 노새를 뜻하는 말로 결국 두 종류의 기계를 합쳤다는 의미이다) 방적기를 만들었다. 이제 실은 충분히 공급되는데, 방직 부문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 돌파구를 마련한 사람은 성직자 출신인 에드먼드 카트라이트로서 그는 1784년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자동방직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직공들이 달려들어 불을 지르며 항의했지만, 기계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18세기 말에는 이런 기계들 덕택에 영국이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면직물 생산 및 수출국이 되었다. 1775년만 해도 영국에서 생산된 캘리코는 5만야드, 수입은 211만야드였는데, 1783년이 되자 생산량은 2358만야드에 달했으나 수입은 78만야드에 불과했다. 수천 년 동안 인도가 지켜온 세계 면직물 왕국의 수도 자리가 순식간에 영국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면직물 세계화의 역사는 ‘피의 역사’

그러나 산업화는 결코 당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공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은 차마 믿기 힘들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극빈자로 전락했고, 여성과 아동이 비참한 지경에서 일을 해야 했다.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교구 성당은 고작 4~5세의 아이들을 주저 없이 공장으로 보냈다. 아이들은 하루에 12시간, 심지어 16시간씩 7년 동안 일하는 조건의 견습 계약에 얽매여 있었다. 1787년 조사위원회가 밝힌 아동 노동 실태는 가히 충격적이다. 10살도 안 된 소녀가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아이를 몇 시간이고 가동 중인 기계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바디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몸을 들어올려 피하도록 만들었다.

구대륙의 산업화는 신대륙의 노예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옛 모국에 면화를 공급했다. 아직 기계화가 안 된 면화 재배와 수확 및 가공 부문에는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으로 넘어갈 때면 광활한 미국 남부 지역에는 흰 목화 꽃이 만발한다. 이 꽃이 분홍색으로 변하다가 노란색이나 붉은색으로 변한 다음 꽃잎이 떨어진다. 그러면 꼬투리같이 생긴 열매가 열리는데, 이 열매를 열면 솜털에 싸인 씨앗들이 나온다.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섬유를 얻는 것이다. 수확기가 되면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1헥타르에 약 400만개씩 열리는 이 꼬투리를 하나하나 따서 마대에 담는다.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두 일일이 손으로 까는 지겨운 일을 해야 했다. 노예 노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원료를 확보하여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직물은 전세계로 수출되었다. 그 중요한 수입국 중에는 인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년의 세계 최고 직물 수출국 인도는 이제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에 가려 항상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어두침침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도의 농촌 인력은 고작 면화 재배와 수확에 동원되었다. 영국 상품의 수출 확대를 위해 인도에서는 직조 행위가 금지됐다. 이를 위반한 방직공은 남녀 불문하고 오른손을 절단당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감옥에서 직접 물레를 돌리는 퍼포먼스를 한 것은 폭압적인 서구 산업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 예전의 단순하고 경건한 가난의 삶으로 되돌아가자는 취지였다.

수천 년의 전통도 기계의 힘을 앞세운 세계화의 대세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미래는 과거를 짓밟고 전진하는 법이다.

■ 자료 2: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54>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⑤ㅡ면직산업과 원료ㆍ시장ㆍ통상로 보호의 문제
출처: 프레시안 2008-08-01
지은이: 강철구 교수


■ 자료 3: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들 (1)
출처: 강철구의 세상 보기
지은이: 강철구 교수

외부적, 내부적 요인
 
산업혁명이 이렇게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원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특히 그것이 가장 먼저 시작된 영국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인에 대해 온갖 주장들이 제기된다.
 
섬나라라서 외침을 받지 않은 영국의 지리적 이점, 석탄이나 철 등 풍부한 부존자원, 기술적 창조성이나 교육 같은 사회제도, 또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정치질서, 풍부한 노동력과 자본 조달의 용이성, 해외무역 등 수없이 많다.

물론 이런 여러 요소들이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겠으나 문제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 문제에서는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어떤 비중을 두느냐가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거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이다. 그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을 써서 대중적으로 매우 유명한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의 삼촌으로 1884년부터 '산업혁명강의'를 시작했다. 그도 19세기 말에는 영국에서 꽤 유명한 경제사학자였다.
 
그는 산업혁명의 내, 외부적 요인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외부적인 요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농업혁명을 이야기하고는 있으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과연 산업혁명이 기초가 되었을지는 의심스럽다.
 
반면 해외무역의 급증에는 큰 관심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1760년에 수출의 1/3을 차지한 식민지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1770년에 맨체스터에서 생산한 공산품의 3/4이 아메리카로 갔다고 말하는 데에서도 새로운 산업이 해외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윌리엄 커닝햄도 산업혁명의 주된 원인은 해외무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발전에 있어 발명과 기술 혁신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해외시장의 성장과, 자본을 원활하게 공급한 금융의 발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에 들어온 이후 산업혁명에 관한 최초의 권위 있는 연구자인 뽈 망뚜도 해외무역을 중심에 놓았다. 그는 산업과 무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무역이 없었으면 산업의 주된 변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미국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향은 194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18세기말에 아담 스미스도 무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해외부문의 중요성은 18세기부터 영국인이 계속 인식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해방과 내부적 요인의 강조
 
그런데 1950년대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졌다. 외부적인 요인보다 내부적인 요인이 더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50년대 이후 식민지 해방운동이 본격화되며 제3세계로부터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학자들이 유럽의 부는 유럽인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식민지를 착취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경제발전을 일찍 이룬 유럽의 중요한 국가들이 거의 식민지들을 갖고 있었으니 그 개연성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서양 역사가들은 산업혁명이 식민지 착취의 결과가 아니라 유럽 내부적인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내요인에 의한 자본의 축적, 낮은 이자율, 농업생산성의 증가, 인구의 급증, 산업발전에 유리한 사회경제적ㆍ정치적 구조 변화, 교육과 과학지식의 발전, 기술혁신, 풍부한 지하자원 등의 온갖 요인들을 열거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수요의 증가이다. 국내의 경제발전이 수요를 팽창시키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나는 공급을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도 산업혁명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으므로 농업부문의 변화에 중점이 두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680-1750년 사이 잉글랜드에서의 농업생산성 증대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국내 시장을 팽창시킴으로써 산업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들은 농업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보았다. 영국 농업은 근대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그것이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1912년에 <16세기의 농업문제>라는 유명한 책을 쓴 R.H.토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토지의 보다 집약적인 이용, 농업생산성의 지속적인 증가, 이에 따른 농산물가의 하락, 실질임금의 증가가 대중적인 수요를 확대했고 특히 중산층 소득의 일반적인 증가가 소비재 수요를 확대시켰다고 주장되었다.
 
농업의 중요성을 가장 대중적으로 설파한 사람들은 필리스 딘과 W.A.콜이다. 이들은 1962년의 <영국경제성장 1688-1959>에서 이런 논의를 일반화했다. 해외무역도 18세기에 국내시장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기는 했으나 국내 수요가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며 논리를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학과[과학?] 기술의 자율적인 발전도 내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설명에서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데이비드 랜디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이들은 기술적 혁신이 산업혁명을 만든 모든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즉 잉글랜드의 산업혁명은 18세기 말의 우연적인 기술발전의 산물로 나타난다. 기술발전으로 생산비용이 절감되며 해외시장을 하나하나 장악하게 되었고 이것은 마침내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외 수출의 확대는 기술혁신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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