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일 화요일

[한겨레]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49. 회사에서 제국으로

자료: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311143.html
출처: 한겨레신문, 2008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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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은 아시아에 진입하면서 특이하게도 ‘회사’라는 방식을 취했다. 아메리카에서 아스텍과 잉카 같은 제국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곧바로 자신의 지배체제를 구축한 것과 비교하면 네덜란드나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가 동인도회사를 통해 식민 지배 체제의 기반을 만들어간 것은 특기할 만하다. 사실 중국이나 인도, 혹은 아랍 지역이나 일본 등지에는 기존 질서가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이를 쉽게 무너뜨리고 지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우선 상업 거점들을 확보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교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들은 오늘날의 회사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동인도회사라는 것은 민간 자본이 주축이 되어 있되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원을 해서 거의 준국가기구의 특징을 띠고 있었다. 전쟁 선언과 평화조약 체결, 군대 유지와 요새 건설 등의 기능을 부여받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보면 자본과 국가권력의 결합체에 가까웠다. 아마도 이런 형태가 당시로서는 가장 효율적으로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에서와 달리 아시아에서는 상업거점 확보→교역 확대→식민지배라는 수순이 적용되었다. 네덜란드와 영국, 영국과 프랑스 간의 알력도 있었지만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원한 영국이 거대한 인도대륙을 통째로 삼키면서 제국으로 탄생되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약 2세기 동안 세계 최대 기업이었으며, 아시아와 유럽 간 교류와 충돌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 중 하나였다. 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보다 2년 앞선 1600년에 엘리자베스 1세에게서 특허장을 받은 영국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동인도회사라는 명예는 얻었으나 첫 출발 때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 두 회사는 서로 경쟁하는 동시에, 이미 그들보다 100년 전에 아시아에 진입해 왕실독점 형태로 아시아 교역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세력을 잠식해 들어갔다.

초기에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이 회사는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일본(데지마), 대만, 시암(아유티아), 수마트라, 믈라카(말라카), 인도(풀리카트, 수라트 등), 아라비아(모카) 등 20여 곳에 상관(商館)을 설치하고 그곳들을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아시아와 유럽 사이 수출입을 수행하는 동시에, 아시아 여러 지역 간 재화와 화폐 및 귀금속을 교환하는 소위 ‘현지무역’(country trade)을 활발하게 수행했다. 예컨대 인도의 면직물을 구매하여 동남아시아에 팔고 그 대금으로 후추를 구입한 다음 중국에 가서 후추를 팔고 다시 그 자금으로 비단을 구매하여 일본에 가서 팔고 은을 사는 식의 연쇄적인 매매를 하는 것이다. 낯선 지역에서 이런 방대하고 정교한 무역체제를 운영하자면 상업 기술만이 아니라 무력이 필수적이었다. 머나먼 이국 타향에서 경쟁자들을 눌러 이기려면 ‘칼을 움켜쥔 상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신변도 보호하고 또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 인도 코로만델 해안 지역에서 생산된 면직물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주조한 화폐 / V, O, C 자가 겹쳐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문양이 그려진 접시(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통합 동인도회사’라는 네덜란드어 약자)



영국 동인도회사는 초반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점차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두 회사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 쿤(J. P. Coen)은 영국 세력이 더 크기 전에 미리 싹을 없애려 선제공격을 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암본 학살 사건이다. 1623년, 인도네시아 말루쿠(몰루카) 제도의 주요 상업거점인 암본의 상관장(商館長)이었던 헤르만 판 스트의 명령으로 이 섬에 와 있던 영국 상인 11명과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일본인 사무라이 10명, 그리고 한 명의 포르투갈인이 참수되었다. 이 사건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아직도 명백한 결론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아시아 내의 양국 간 상업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입지가 약해진 영국인들은 할 수 없이 인도로 관심 방향을 돌렸다. 당시에는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최고 목표였으므로 여기에서 밀려난다는 것은 심각한 타격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도를 더 빨리, 더 집중해서 공략함으로써 영국이 식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정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 동인도회사인도 면직물을 유럽으로 수입하자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유럽인들은 면사를 들여와서 아마와 대마 같은 다른 재료와 섞어 혼방 직물을 생산하기는 했지만 순면 제품은 거의 모르고 지냈다. 그때까지 세계에서 면직물 없이 살았던 곳은 유럽이 유일할 정도로 이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값싸고 품질 좋은 인도의 캘리코 직물이 들어오자 일대 광풍이 몰아쳤다. 한 역사가의 표현대로 이는 “유럽인들의 겉껍데기를 홀랑 바꿔놓았다.” 그러자 모직물, 견직물, 특히 리넨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실업 위기에 몰린 직공들의 저항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국내 산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기계를 도입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영국 공산품이 인도 직물업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니 또 한 번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18세기가 되자 네덜란드는 경쟁에서 밀려나고 프랑스가 후발 주자로서 영국과 패권을 다투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은 ‘회사’들 간의 경쟁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양국은 상업 경쟁이 아니라 치열한 정치·군사 투쟁을 벌였다. 이때까지 무굴제국이 존립하긴 했으나 그것은 허울뿐이고 지방 세력이 무굴제국의 이름을 빌려 통치하고 있었다. 이런 유동적인 상황에서 유럽 회사들은 병사들을 모집하여 서로 충돌했고, 군사적 지배 다음에는 지방 권력자들을 통제해서 협력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제국을 대신하여 징세·행정권을 행사했다. 일개 외국계 회사가 거대한 영토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식민 지배를 회사 방식으로 수행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한 영국 정부는 19세기에 동인도회사를 해체하고 인도를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 아래 두었다. 산업혁명의 결과 생겨난 엄청난 경제력과 무자비한 기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제 대영제국이라는 초유의 광대한 지배체제가 탄생하였다. 유럽인들은 처음 몇 개의 점들로 시작해서 쐐기처럼 내륙으로 파고들어가 결국 대륙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맨체스터의 기계가 인도의 마을 70만 곳을 위협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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