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일 월요일

[서평] 지금 우리에게 진보란 무엇인가?

자료: http://www.pncc.kr/bbs/37/37-3-1.pdf ,
출처: 한국민족문화 (지은이: 안철현, 경성대학교 정치외교학)


서평 도서:
[1] 김창호,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 동녘, 2009
[2] 강수돌 외, 《리얼 진보》, 레디앙, 2009.

※ 발췌 메모:

[1]
(...) 우선 저자는 급속히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진보도 변하고 있고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과거와 같이 계급과 남북관계, 한미관계로만 이념을 가르는 시대는 지나갔”으며 이제는 “부동산, 교육, 환경, 여성, 외국인 인권, 지역 균형발전 등의 생활세계적 영역이 더 중요한 비중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다양한 의제의 진보는 세계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생활정치 영역의 확장 등에 의한 것으로 계급적 진보의 위기에 대응하여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냉전시대의 진영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좌파로부터 진보가 결별했음을 의미”하며 “현재의 진보는 하나의 역사적 형태일 뿐”이고 새로운 진보의 이념과 운동형태는 “세계적 수준에서도 아직 추상적”이라고 본다. (...)

(...) 이에 대해 저자는 자본권력과 언론권력을 포함한 보수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 성장과 고용 등 기존의 진보진영이 다루어 보지 못한 정책현안들을 과거의 정책들과 혁명적 차별성을 갖게 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진보든 보수든 제도의 범위 내에서는 그 선택의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선택에 책임 있는 진보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성과와 질서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를 취한 진보적 경향이 이 문제(양극화와 비정규직화)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고 들은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개방과 자주,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만으로는 양극화나 고용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세계화 시대에 개방하면서도 자주적이고, 성장담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복지를 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진보’는, ‘전통적 진보’와 같이 민주화의 확장(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을 목표로 하면서도, 동시에 반공적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진보적 자유주의, 즉 시장(자유주의)과 공존하는 진보의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든스의 제3의 길 을 위한 정책프로그램과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 (경제성장과 개인의 부, 독립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비되는 지속가능한 개발과 삶의 질, 상호의존관계에 초점을 맞춘 유러피언 드림)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

(...) 우선 이들의 진보 개념이 갖는 기본적인 취약성이 있다. 저자는 새로운 진보의 의미를 시장과 국가, 성장과 분배, 개발과 환경 등에서 중도 포괄적인 입장을 취하는 제3의 길과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동안 제3의 길에 가해졌던 진보진영의 숱한 비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3의 길과 같은 정책 프로그램이 보수의 입장, 즉 자본권력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복지 혹은 환경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과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다. 즉 사실상 제3의 길은 진보가 아니라 온건한 보수일 뿐이며 그것은 자본의 힘이 강할 때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자본의 힘이 약화되면 언제라도 걷어버릴 수 있는 취약한 진보적 외피일 뿐이라는 것이다. (...)

[2] ‘19개의 진보 프레임으로 보는 진짜 세상’이라는 부제를 지닌 《리얼》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지지세력이 ‘민주주의와 진보’를 자처하고 있으나 그것은 진보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왜곡이자 기만이라고 본다. 따라서 진짜 진보의 뼈대를 다시 세우기 위해 “진보에 대한 자아비판이자 구체적인 수준의 상상이며 희망 만들기 작업”을 한 결과물로 이 책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 이렇게 자본주의를 중심에 놓고 볼 때 진보는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전망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점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 이어서 나오는 김상봉과 박노자의 글이다. 이들은 진보란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려는 의지라고 본다. 자본주의 질서를 긍정하고 들어가는 것은 개혁은 될 수 있어도 진보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보는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밖에 없다. 사회주의는 집권을 위한 정당운동 차원이 아니며 모든 것이 상품화 된 세상에서 인간을 회복하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며 따라서 이는 현실성과 실현가능성을 넘어서는 ‘거대한 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은 당연히 진보라고 할 수가 없다. 두 정부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복지와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를 이렇게 정의하고 그런 관점에서 두 정부를 진보가 아니라고 비판하면 아마도 《생각》을 포함한 친노진영은 더 이상의 논란을 접을지 모른다. 사회주의가 현실 가능한 목표인가라는 비판이 가능하지만 이미 현실성을 넘어서는 꿈이라고 선언하는 마당에 더 이상의 시비는 실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 이대근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추구하다 집권 후반 개혁을 포기함으로써 시장주의를 급속히 확장시킨 김대중 정부와, 재벌개혁을 주장했으나 삼성과 유착했고 한미FTA라는 사회적 합의 없는 돌발적 개방정책을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는 모두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종’한 정권이라고 본다.

이 점에서는 《생각》을 포함한 친노진영이 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펴야 하는 정부의 입장에서, 그래도 금산 분리 등으로 재벌을 견제하고, 기초생활 보장 등 복지정책을 시작했으며, 영세자영업자 대책이나 중소기업 특히 벤처기업 활성화 등의 일자리 대책을 추진했던 정책들은 모두 배제하고, 경제정책에 섞여 있는 신자유주의적 내용들만을 선별적으로 지적하거나, 세계화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FTA를 공격하면서 신자유주의라는 뭉뚱그린 주술로 비판하는 것은 수용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은, 그렇다면 그 진보는 세계화(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장) 속에서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양극화와, 기술발전
에 따른 고용 없는 성장 등에 대해 어떤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는가 묻고 있다. (...)


* * *


※ 발췌 메모:

(...) 나는 내 책 《대한민국, 위험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위험도와 사회체계의 정비도라는 두가지 기준을 써서 위험사회의 유형화를 시도했다. (...) 한국은 ‘고도의 과학기술과 저급한 사회체계가 결합되어 있는 가장 위험한 위험사회’에 속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황당한 사고, ‘황우석 사태’와 같은 과학사기가 전혀 드물지 않게 일어나며, 양극화가 크게 악화되고 불안과 불신과 부패가 만연하기 십상이다. 나는 한국과 같은 위험사회를 아예 ‘사고사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위험사회로 가는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고사회’에서 살고 있다. 문제는 이 참담한 ‘사고사회’의 문제를 서둘러 완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주의에 맞서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주의, 토건국가, 투기사회, 학벌사회, 부패사회 등 한국 사회의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고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3) (...)

[주3: 서구의 ‘이론’을 수입하는 것으로는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한국의 가장 큰 고질병인 토건국가 문제는 서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서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조차 엿볼 수 없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의 ‘이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우리의 토건국가 문제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토건국가, 투기사회, 학벌사회 등의 문제를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한국적 병리현상으로 치부한다. 연구자들과 운동가들이 서구의 ‘이론’에만 유식하고 한국의 ‘현실’에는 무식하다면 ‘사고사회’의 문제는 갈수록 더욱 더 악화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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