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1: 딴지일보 게시판 그냥불패
제목: 농사 이야기 7 - 농부 철학자
지은이: 젊은농부, 201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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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라비는 부익부 빈익빈, 식량난, 환경문제, 전쟁, 정치적 문제들이 모두 시장경제가 부르짖는 과도한 발전에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사고(思考) 없는 무조건적인 발전을 주장하고 강요하는 세력들은 그 발전의 열매를 절대로 세계인과 공유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발전'이라는 것을 이룩하려 안간힘을 다해 고생하는가? '발전'이란 무엇의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에 따라 구분된 좁은 공간을 삶의 터로 여기며 기계처럼 '생산을 위한 생산'을 거듭하다 결국엔 '죽어가는 인간'들이 소비하는 자본주의 상품들과 자본주의 농산물들. 그것이 개인과 국가, 그리고 이 지구의 모든 생명을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는 점에 대한 현실적이고 철학적인 비판에 그는 많은 시간을 할애 합니다. 그가 철학자로 불리는 이유 중에 '신비가'스러운 모습이 존재한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크리슈나 무르티의 영적 세계관에 관심이 많다고 하며 그 자신도 나름의 성찰로 얻은 인간 영혼의 신비와 고결함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임을 그의 인터뷰나 글들을 통해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적인 사람인 동시에 현실적인 눈을 갖고 있는 아주 힘든 것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결한 것, 고결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에만 빠져 그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방향의 전환은 커녕 현실의 거친 물결에 휩쓸려 버리는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된다고 역설합니다.
“세상에는 최고의 지성을 갖춘 과학자들은 영원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이 영적인 영역 안에 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순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진정한 통찰력에 반대되는 발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세계화를 생각해 봅시다. 세계화의 가장 나쁜 점은 교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화의 단점은 행성 전체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힘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피에르 라비
누군가가 ‘의도한 발전’은 그 발전을 이루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열매를 의도한 자, 자신만이 독식하고 있다는 현실의 문제점이야 말로 그가 주장하는 막무가내 식의 발전과 그것을 부르짖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이자 한계입니다. ‘발전’을 위한 기계로 전락해버린 현대인들에 대한 그의 연민이라는 점에서 그의 생각은 철학자 앙드레 고르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제학자, 정부, 실업가는 ‘성장’ 자체를 요구하지 결코 그 궁극적 목표를 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성장은 우선 자본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지 주민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이런 식의 성장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빈곤을 양산합니다. 또한 다수를 희생시켜 소수에게 이익을 안겨주며 환경과 삶의 질을 개선하기는 커녕 그 질을 심각히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 [에콜로지카] 中, 앙드레 고르 저
귀농을 준비하며 알게된 단어가 있습니다. ‘전인(全人)’, 온전하게 내 힘만으로 내 살아가는 것들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 집짓고, 먹을 것 구하고, 우리 가족 필요한 크고 작은 것들을 내 땀 흘려 마련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가족과 함께하는 대화에서 가족의 철학을 성립하고 스스로 만든 노래를 부르며 맘껏 춤출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그런 가족이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피에르는 몇몇의 누군가가 아닌 이 행성의 모든 사람들이 전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만큼만 스스로 생산하는, 넘쳐서 썩어나는 것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
자료 2: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93701
제목: 논두렁에서 경전을 읽다
지은이: 신승근 시인, 2010년 12월 20일
(...) 이제 먹물의 삶을 접고 농부의 삶을 준비하던, 머리로만 살았던 강퍅한 생의 방식을 버리고 몸으로 느끼며 살고자 노력했던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논두렁에서 많은 지혜를 만났다. 늘 살아 숨쉬는 경전을 읽는 경건함과 벅참으로 가슴이 뛰곤 했다. 영혼까지 맑아진다는 믿음도 갖게 되었다. (...) 어느 날 논두렁 풀을 예초기가 아닌 낫으로 베고 있었다. 두어 시간을 기특한 듯 바라보시던 어르신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 벼들도 기계소리를 싫어하는데 자네가 낫으로 조용히 베었으니 잘 자랄 것이라고, 저 벼들이 엄청 고마워 할 것이라고. 그 때 비로소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생명체들과 교감할 수 있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예초기를 사용하면 힘도 덜 들고 능률도 오른다. 그러나 낫을 사용할 때 느끼는 풀과 흙의 감촉과 벌레들과의 교감은 영원히 잊게 된다. 흙에서 점점 멀어지며 느림의 평화를 버리고 속도의 쾌감에 탐닉하게 된다.
농사는 느림과 기다림의 지혜를 우리에 일깨워 준다. 속도를 늦추면 눈앞의 풍경이 달라 보인다. 자연의 속살을 보게 되고 그들의 호흡도 느낄 수 있게 된다. 모든 생명들과의 조화로운 삶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
‘월든’의 소로우가, ‘조화로운 삶’의 니어링 부부가,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가, 그리고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다’의 리 호이나키가 뿌리 뽑힌 지식인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흙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농부의 삶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혼은 팽개쳐 버리고 무한 경쟁의 세계에 뛰어들어 다들 미쳐갈 수밖에 없는 이 불행한 시대에, 저들이 흙속에서 찾아낸 지혜는 무엇이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때다.
그런데 이 나라는 농사를 포기할 모양이다. 속도를 대변하는 자동차만 많이 팔면 농사는 팽개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도대체 우리들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냐. 이 땅의 위정자들은 개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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