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0일 수요일

번역탄생 학이시습(01)

우리말을 공들여 파고드는 이 번역가의 노력 덕에 수시로 공부할 수 있어 즐겁다. 《번역의 탄생》 (2009년 이희재 지음 / 교양인 펴냄) 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를 적어본다. 연필을 쓰든 자판을 쓰든 한 번 적어보면 왠지 공부가 되는 듯한 느낌은 어릴 적 습관 탓인지, 손을 놀려서 뇌를 자극하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인용 시작]
(... 전략) 근대 이후 한국의 발전 과정에서 저는 어떤 가려움 내지는 불안을 느낍니다. (...) 전통이 폭력적으로 단절되었을 뿐 아니라 외국 문화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이유가 크겠지요. 그러다 보니 해방 이후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스스로 전통을 쌓아 가는 자신감이 부족합니다. 자신감 상실이 전통을 지속적으로 단절시켰다고나 할까요. 최인훈은 바로 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최인훈은 1960년에 낸 소설 《광장》을 여러 번 고쳐 썼습니다. (...) 최인훈은 19세기 후반 이후로 일본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근대 한자어를 그대로 들여와 그냥 한글로만 적는 것을 진짜는 은행에 맡겨두고 가짜 반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의 처지에 빗댑니다. 물론 서양어도 자기네끼리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알파벳 계열의 언어들과 한국어는 처지가 좀 다릅니다. 현대 영어에 흘러 들어온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에 뿌리를 둔 외래어는 원어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령 '점유'를 뜻하는 프랑스어 원어 appropriation은 영어에 들어가서도 그대로 appropriation으로 쓰입니다. 원어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산 한자어 占有의 한글 표기 '점유'에서는 한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작가는 이것이 글쓰기를 가볍게 만든다고 걱정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든 한자어를 그냥 한글로만 읽고 적으면서 자족하는 것을 돈에 비유하자면, '한국어'라는 통화의 가치 보증을 한국은행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중앙은행에서 하는 꼴입니다.

최인훈은 한자를 쓰지 않고 오로지 한글로만 적으려면 그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한자어도 될수록 고유어로 바꾸면서 고유어의 테두리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작품을 자꾸만 고쳤습니다. 역사 의식이 있는 작가도 있고 심미 의식이 있는 작가도 있지만 이렇게 철저한 언어 의식을 지닌 작가는 한국에 보기 드뭅니다. (...) 최인훈은 적어도 문학어로서 한국어는 일본어에 무임승차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결국 그 믿음이 토박이말의 표현 가능성을 최대한 넓히려는 노력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령 그는 《광장》을 이런 식으로 고쳤습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1. 《광장》 원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완결한 전체를 붙잡아, 안식을 얻으려 기대했다. 하지만 생활은 아랑곳없이 흐르고 있었다. 미련스럽게 움켜 온 강바닥 모래들도, 돌아가는 굽이에서 벌써 산산이 흩어졌다. 무엇인가 마지막 것을 얻은 후에는 다시 생각이란 이름의 요부를 침실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 표정과 제스처를 훈련하는 마음의 화장실에서는 자꾸 루즈가 빗나가고 아이섀도우가 번졌다. 끝없이 실수를 거듭하고 끝없는 뉘우침이 따랐다.
    윤리적 노력이라는 것이 고상하나마 비극적 자기 도취에 그치는 것이며, 더 혹독하게는 신에 대한 무모한 반항이라면 이리도 저리도 못 하는 피곤한 마음은 또 한 번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현상이 가지는 상징의 냄새를 혼곤히 맡아보며 에고의 패배감을 관용이라는 포장지로 그럭저럭 꾸려 가지고, 신이 명령한다는 '이웃 사랑'의 대용물로 쓰기로 한다는 에서 주저앉곤 했다.

  2. 1차 개정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무리진 뜻을 읽어내서 허전함을 달래려 한다. 하지만 은 아랑곳없이 흐르고 있다. 미련스럽게 움켜 온 강바닥 모래들도, 돌아가는 굽이에서 벌써 산산이 흩어진다. 무언가 마지막 것을 얻기만 하면 다시 생각이란 요부를 침실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 낯빛과 몸짓을 가꾸는 마음의 화장실에서는 자꾸 연지가 빗나가고 곤지가 번진다. 끝없이 실수를 거듭하고 끝없는 뉘우침이 따른다.
    실수가 없어지라는 것이 갸륵하나마 자기 됨됨이를 모르고 제멋에 겨웁는 데에 그치는 것이며, 더 혹독하게는 신에 대한 철없는 대듦이라면, 이리도 저리도 못 하는 고단한 마음은 또 한 번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누리와 삶의 뜻을 더 깊이 읽을 힘이 없는 자기처럼 남도 불쌍한 삶이거니 싶은 마음을 너그러움이라는 싸개로 그럭저럭 꾸려 가지고 신이 바란다는 '이웃 사랑'의 대용물로 쓰기로 한다는 언저리에서 주저앉곤 한다.

  3. 2차 개정

    의 흐름 속에서 마무리진 뜻을 읽어내서, 허전함을 달래려 한다. 하지만 삶은 아랑곳없이 흐르고 있다. 미련스럽게 움켜 온 강바닥 모래들도, 돌아가는 굽이에서 벌써 알알이 흩어진다. 무언가 마지막 것을 얻기만 하면 다시 생각이란 이름의 화냥년잠자리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 낯빛과 몸짓을 가꾸는 마음의 거울 속에서는 자꾸 연지가 빗나가고 곤지가 번진다. 끝없이 실수를 거듭하고 끝없는 뉘우침이 따른다.
    실수가 없어지라는 것이 갸륵하나마 자기 됨됨이를 모르고 제멋에 겨웁는 데에 그치는 것이며, 더 혹독하게는 신에 대한 철없는 대듦이라면, 이리도 저리도 못하는 고단한 마음은 또 한 번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누리와 삶의 뜻을 더 깊이 읽을 힘이 없는 자기처럼, 남도 불쌍한 삶이거니 싶은 마음을 너그러움이라는 싸개로 그럭저럭 꾸려 가지고, 신이 바란다는 '이웃 사랑'과 바꿔 쓰기로 한다는 언저리에서 주저앉곤 한다. [*]

    [*] 최인훈, "문명의 광장에서 다시 찾은 모국어",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지성사, 1994, 346~348쪽.
물론 토박이말만 쓰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말은 어디까지나 쓰임새가 중요합니다. (...) 맞춤법을 그냥 왜색을 없앤다거나 무조건 토박이말을 써야 한다는 안이한 기준으로만 밀어붙여서는 곤란합니다. (...) 한국에서는 아직도 무리하게 관념에 현실을 뜯어맞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맞춤법은 무엇보다도 의사 소통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 [인용 끝]

출처: 《번역의 탄생》 (2009년 이희재 지음 / 교양인 펴냄) 292~297쪽 중에서

댓글 2개:

  1. 당신은 확실히 당신이 hsalbert.blogspot.com ON 쓰기 작업에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이 믿는 방법을 말씀 두렵지 않다는 것을 당신처럼 더 열정적인 작가를위한 희망합니다. 항상 마음을 따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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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감사합니다. 한국어를 공부하시는 중이시든가 아니면 전달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번역기로 옮기신 흔적을 뵈오니 그 관심에 더 감사드립니다.

    I feel deep pleasure to see your words. Thanks for your interest and watching this place. Even though this and previous Korean sentences are not grammatically correctㅡand because of this I could suppose you'd be from some other cultureㅡI'd like to thank you all th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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