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전북대학교 정석권님 홈페이지
1. 멜로드라마(Melodrama) 개관
1. 멜로드라마의 정의
멜로드라마 장르를 정의하는 데는 약간 혼란이 따른다. '멜로드라마'라는 말은 원래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로 관객의 값싼 감상에 호소하는 통속 영화' 정도의 뜻으로 저널리즘에서 썼던 단어였다. 하지만 영화 비평에서 멜로드라마는 다양한 형태의 영화를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쓰이는데, 범죄 멜로드라마, 심리 멜로드라마, 가족 멜로드라마 등의 구분이 있는가 하면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애정관계를 다룬 영화를 모두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포함시켜 언급하기도 한다.
2. 멜로드라마의 역사
멜로드라마의 최초의 뿌리는 중세의 교훈극과 구전 민담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전통은 18-9세기 프랑스 로맨틱 드라마와, 같은 시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감성 소설 등 보다 세련된 양식으로 계승된다. 도덕과 양심에 바탕을 둔 이런 유형의 드라마와 소설들은 가족 관계, 좌절된 사랑, 강제 결혼을 다루었다. 19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과 함께 당시 소비문화의 주축이던 여성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멜로드라마는 영화의 주된 메뉴로 등장하게 된다. 화려한 세트와 분장, 미남과 미녀들, 성과 육체 그리고 자본주의와 외면적인 화장을 다한 이 멜로드라마 영화들은 센티멘털리즘과 야합하여 대중들의 동경과 갈채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멜로드라마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가열한 시대상황의 처절한 리얼리티경험한 사람들의 황폐한 마음을 달래주는 현실 도피적인 감상에서 관객들을 탐닉하게 했다. 전후에 나타난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라고 할만한 머빈 르로이의 <애수(1949)>는 2차 대전 당시 처절한 전쟁 상황에서 군인과 영국의 발레리나와의 비련을 엮은 스토리인데, 자주 멜로드라마의 정석같은 것을 설명하는데 본보기로 설명하는 영화이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의 미국은 모든 것이 풍요로워 보였지만,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은 미국 중산층 여성의 공허한 삶의 이면을 슬쩍 들여다봄으로써 가차없이 무너졌다. 이 시기의 멜로드라마는 동요하던 미국 사회의 풍경을 여성의 입장에서 개인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여성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게 만들었지만 은근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부추기기도 했다.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용하는 모든 것(1955)><바람에 쓰다(1956)>처럼 50년대의 멜로드라마는 진보와 보수의 양날개를 펼친 채 다양한 정치적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장르로 자리 매김 되었다. 이후 할리우드 멜로드라마는 로버트 벤튼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나 리처드 브룩스의 <애정의 조건> 등 위축되어진 가정의 위기를 경고하는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줄리아 로버츠를 스타로 만든 <프리티 우먼(1990)> 처럼 퇴행적이고 솜사탕 같은 거짓말만 잔뜩 늘어놓는 영화나 검열의 완화로 인한 에로티시즘류의 멜로드라마 역시 쏟아져 나와 관객의 값싼 감상에 호소하는 통속 영화라는 오명을 여전히 벗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3. 멜로드라마의 특성
70년대 초 서구의 영화평론가들은 5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에서 다양한 정치적 태도와 형식을 고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더글라스 서크와 빈센트 미넬리, 니콜라스 레이와 오토 플레밍거 등의 감독이 만든 화려한 양식의 멜로드라마는 처음에는 이들이 감춰둔 화면 양식의 비밀에 매혹 당한 작가주의 비평가들의 찬탄을 샀고 나중에는 여성주의 비평가들의 이념적 독해에 그럴듯한 장을 마련해 줬다. 당시의 멜로드라마는 행복을 얻기 위해 애쓰는 여성의 모습을 담았는데, 여주인공들은 부르주아의 도덕률이나 신분의 차이에 묶여 자신의 행복을 단념하기 마련이었다. 또한 이 시기 멜로드라마의 배경은 여주인공을 둘러싼 사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50년대에 개발된 와이드 스크린의 광활한 너비는 이렇게 물질로 포위된 여주인공의 공허한 삶을 시각적으로 짜 맞추는 데 안성맞춤의 매체를 마련해주었다. 여주인공들은 화면에 장치된 일종의화면 속의 화면구도(거울 등의)를 통해 감옥에 갇힌 듯 보이고 때때로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허전한 모습에 실망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더글라스 서크가 만든 <삶의 모방(1959)>이라는 영화제목처럼 그들의 삶은 진짜 삶을 모방한 껍데기 삶에 불과했다.
그러나 멜로드라마가 등장인물의 체념을 강조함으로써 기존 사회의 보수적인 가치에 동조하는 저질이라고 공격하는 의견도 많았다. 영국의 문화 이론가 레이몬드 윌리암스는 멜로드라마는 악질적인 부르주아의 미학이다. 멜로드라마가 급진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했다. 여성이 주로 보는 멜로드라마는 연인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얘기나 또는 거꾸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연인을 희생시키는 얘기가 많았다. 삼각관계에 휘말려 고통받는 주인공의 얘기도 있었고 자식을 향한 모성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여인의 얘기도 곧잘 나왔다. 이런 얘기들에서 감독과 평론가들은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뭔가를 얘기하고 해석하기도 하겠지만 일반 관객들은 그저 눈물을 흘리며 세상의 질서 앞에 체념한다는 것이다. 반면 페미니즘 영화 비평가들은 멜로드라마의 하찮은 줄거리에서 특이한 조짐을 끄집어냈다. 이데올로기 텍스트 비평의 이론적 성과를 흡수하면서 페미니스트 비평은 당연히여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멜로드라마 장르가 풍부하게 담고 있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성계급,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용들이 분석, 비판이 되었다. 가부장제 가족 내에서 여성이 받는 억압의 표현으로부터 해방된 여성이 치러야하는 대가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멜로드라마는 페미니스트 비평에 풍부한 재료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감정이입을 존중했고 그런 점에서 멜로드라마 기법은 영화기법에서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어 폭넓은 대중을 흡인하고 산업적, 상업적 기반을 확대하는데 큰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 영화의 예술적 발전을 더디게 한 것도 멜로드라마였다. 멜로드라마는 관객의 이성을 잠재우고 예술적 품성이나 소재의 심화를 개척하는데 안이한 도피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멜로드라마가 인간과 시대, 현실을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영화의 예술적인 고양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멜로드라마의 대표작들
1. 스텔라 달라스 (Stella Dallas) - 1938년, 킹 비더
신분 상승을 위하여 부잣집 아들과 결혼한 노동자 출신의 여성 스텔라를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가 내러티브 중심에 놓여있는 50년대 멜로드라마를 예비한 영화로, 부르주아적 도덕에 순종하는 '현모양처와 거리가 먼 주인공은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로서는 예외적인 설정이었다.
2. 카사블랑카 (Casablanca) - 1942년, 마이클 커티즈
이 영화 속에서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은 할리우드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한 쌍을 이룬다.전쟁, 사랑, 이별을 소재로한 수많은 아류영화를 낳은 할리우드 연애담의 전형이다.
3. 바람에 쓰다 (Written on the Wind) - 1956년, 더글라스 서크
독일 출신 감독 서크는 50년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를 독립된 장르로서 완성하였다. 이 영화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면서, 70년대의 비평가들에 의하여 5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재평가되는 계기를 제공한 핵심적인 텍스트라는 비평사적 의미에서도 중요한 영화이다. 대담하게 리얼리즘을 무시한 미장센의 뛰어남 또한 높이 평가되었다.
4.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 - 1966년, 끌로드 를루슈
제목 그대로 남과 여의 극도로 단순화된 사랑이야기를 줄거리로 잡고 60년대 모더니스트 작가영화에 사용되었던 기법을 총동원한 를루슈의 실험적 멜로드라마이다. 프랑스풍멜로드라마에 대한 선입관을 전 세계 관객들에게 심어준 영화이며, 50년대이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미장센과는 또다른 감각과 인상으로 특정 지워지는 새로운 계보를 시작하였다.
5.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1973년,라이너 베르너 파스 빈더
70년대 뉴 저먼 시네마를 주도한 파스빈더는 특히 5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70년대 서독 사회의 모순을 그리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독일인 할머니와 외국인 노동자인 흑인 청년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용하는 모든 것(1955)>을 번안한 작품이다.
2. 한국의 멜로 영화와 그 70년대 영화 경향
1. 한국 멜로의 개관과 시초
한국의 멜로 영화는 그 주제가 '남녀간의 사랑', '기구한 인생역정' 을 주로 다루고 있어서 그 기원이 신파극에 두고 있으리라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멜로 영화는 특히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고무신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60-70년대에 호황을 누렸고, 많은 여성들이 멜로 영화의 주인공들과 함께 웃고 우는 가운데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영화퇴조와 맞물려 주춤했고, 80년대 와서는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를 이루는 소위 호스티스 영화, 에로 영화로 방향을 전환하여 수많은 아류작들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전통(?)적인 멜로 영화의 생산은 90년대 <고스트 맘마>의 흥행 성공으로 다시금 그 불을 붙이게 되었다.
2. 한국 멜로 영화의 연대별 특성
한국 멜로 드라마를 시대에 따라 관찰해 보기로 한다. 20년대에는 무성영화시대로 퇴폐적이고, 유치한 통속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는 후에 <수일과 순애>로 리메이크된 <장한몽>이라는 영화가 유명하다. 30년대에는 <춘향전>,<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있다. 4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오락성 강한 멜로 드라마가 유행을 하는데, 유교적 테마의 고전적인 신파인 <검사와 여선생>이 있다. 50년대에는 봉건적인 유교 가부장 제도로부터의 성적 자유를 그린 <자유부인>, 홍성기의 <실락원의 별>, 신상옥의 <동심초>,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구름은 흘러도> 등이 있다. 60년대에 이르러 멜로 드라마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데 당시 시대상과 맞물려서 사회, 정치적 소재보다는 홈드라마 패턴의 작품이 두드러진다. 이 당시 신상옥과 홍성기 감독은 양대산맥을 이루는데, 신상옥-최은희, 홍성기-김지미 콤비의 제작 열기가 불붙기도 했다. 또한 주로 신파성을 띤 여성취향의 작품이 인기를 얻는데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이 시대 최대의 멜로물이었다고 한다. <초우>,<맨발의 청춘>도 60년대 작품인데, 김기덕 감독의 67년작인 <맨발의 청춘>은 최고의 청춘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건달과 부유층 아가씨의 사랑이야기인데 그들의 사랑은 부모의 반대(당시 가치관)로 파국을 맞는다. 지금 보면 다분히 신파조의 분위기와 대사가 있지만, 여전히 훌륭한 영화로 남을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 당시 신파성 멜로 영화의 범람시기에 발표되어 당시 멜로 영화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 외 60년대 멜로 영화 작품으로는 신상옥의 <로맨스 빠빠>, 홍성기의 <길은 멀어도>, 김수용의 <굴비> 등이 있다.
3. 한국 멜로 영화의 70년대 상황
지금까지는 60년대까지의 멜로 영화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후 70년대 영화는 어떠했을까? 70년대의 한국영화는 영화사상 유례없는 불황 속에 개막되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의 텔레비전 확산은 영화계의 파산선고와 같았다. 또, 정부는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함과 동시에 영화제작을 유신이념으로 설정해버렸다. 영화는 국가 정책을 반영한 계몽물과 10대 관객들을 겨냥한 하이틴 영화의 범람 속에서, 몇몇의 감독들은 과감히 사회 현실 풍자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리고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최루성 멜로 드라마 유행을 주도했던 주부관객들이 영화관을 떠나고 극장가는 젊은 관객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청춘 영화가 인기몰이에 나선다. 67년 <맨발의 청춘>을 필두로 일어난 청춘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에서 극에 달하게 된다.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어제 내린 비>,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겨울여자> 가 당시 충무로를 장악했던 신기류였는데 그것들의 공통점은 멜로 드라마의 세련된 변형, 청년들의 굴절된 의식과 좌절감을 은유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붐을 이룬 것은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인데 <영자의전성시대>외에도 <26*365+0> 등이 있다. 70년대 초 불황의 늪에 빠진 영화계가 적은 예산에 흥행이 보장되는 방안으로 모색한 게 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의 상품화를 기치로 건 상업주의 멜로 영화의 흐름가운데 중산층 분위기인 <애마부인> 과는 달리 호스티스는 철저한 밑바닥 생활을, 그리고 정서를 보여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70년대 영화는 '유신이념을 구현해야 한다'는 통제하에 가장 착취 받는 계급인 여성 근로자들의 문제는 검열조항에 깔리고 그 대신 호스티스를 다룬 영화들이 난무했던 것이다. 도시의 일상적인 삶의 공간은 영화에서 배제되고, 영화들은 창녀촌과 룸살롱 등 에로틱한 공간만을 찾아다니게 된 것이다.
특별히 70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과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영화는 산업화, 도시화의 과정에서 희생된 여주인공을 통해, 당시의 사회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사회성 영화에 대한 정부의 검열이 심했던 때라, 웬만한 사회성 영화의 여주인공엔 호스티스와 매춘부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우리 한국의 멜로 영화에 있어서 그 주제가 모성이든, 삼각관계이든 그 속의 신파성은 계속해서 유지되어 간다. 68년의 화제작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여주인공과 더불어 관객들은 계속해서 운다. 정소영이 연출한 이 영화를 보러 물밀듯이 밀려든 아줌마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유교적 가부장제에 눌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었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소박받는 여자의 기구한 운명을 담은 시나리오는 틀에 박힌 것이었짐나 관객을 울게 만드는 호소력만은 대단했다.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지만 보수적인 남자 집안의 반대에 밀려 결혼하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 멜로 드라마를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유교적 가부장에와 어쩔 수 없이 긴장관계를 맺는 그 당시 여성들의 삶을 거꾸로 읽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60-70년대 영화에서는 봉건적 유교 가치관이 팽배해 있었다. 여성들은 그에 희생되는 약한 존재로, 남성들은 그 위를 군림하는 지배자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여성의 상을 제시함으로서 이것이 착한 여자의 삶이다라는 식의 고착화를 유발한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정소영은 70년대 중반 <내가 버린 남자>등의 영화를 만들어 연인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여성의 삶쪽으로 멜로드라마의 틀을 옮겼고 그 영화들은 70년대의 대표적인 멜로드라마로 자리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진짜 멜로 드라마 걸작은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였다. 여공에서 매춘부로 떨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본주의 가부장에 사회의 억눌린 현실에서 사랑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몸소 보여준다. 당시까지 공전의 흥행을 기록한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방황하는 여주인공 경아의 이미지를 예쁘게 포장한 뒤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는 것으로 몰고가서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멜로 드라마였다. 70년대 한국 멜로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들은 대체로 여공이나 매춘부나 호스티스였다. 박호태의 <나는 77번 아가씨>와 같은 호스티스 영화들은 산업사회의 대세에 더밀려 도시로 밀려든 여성들의 삶이란 소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면서 호스티스라는 신분 때문에 이뤄지지 못하는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우려먹었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여주인공들은 김호선의 76년작 <겨울여자>의 이화처럼 현실을 초월한 성처녀의 모습을 띠고 맑고 투명하게 살다가 남자들과 헤어지는 것으로 결말을 맺곤 했다. 어떤 쪽이었건간에 70년대 한국 멜로드라마에 선 개발독재국가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끈에 묶인 여성의 음울한 현실이 묻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3. 1980년대 한국 멜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
1. 1980년대 한국영화계의 특징
세대교체와 새로운 경향 또는 재출발(1980-1991) : 업계의 상업적 요구와 영화 인력의 성장에 의해 신인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다. 또 정치적 격변에 따른 사회적 인식의 성장으로 비판적인 영화가 나오는 동시에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서구적 드라마 서사의 확립되고 미적으로는 스타일적 실험이 이루어진다. 경제적 성장과 대중들의 인식 변화로 영화 이론과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 또한 증대한다.
2. 한국 멜로 주인공들의 성격변화
그 전의 한국 멜로 에서 보이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들은 약간은 어수룩하거나 혹은 무능력해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등의 기존과는 다른 다양한 캐릭터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멜로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여주인공이 그렇듯 80년대 멜로의 여주인공 역시 착하고 지고지순하기 그지없다.
한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언제까지고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가슴속에 묻어 두고 눈시울을 적시며 지난 사랑을 회상하는 여주인공들...욕심 많고 천덕꾸러기일 것 만 같은 여성들도 멜로 영화의 여주인공이 되어 사랑만 하게 되면 이 공식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적용되는 듯 하다.
3. 과거와는 다른 80년대 영화의 경향
한국판 여성영화. 이것은 멜로드라마가 장르 내부의 변화를 겪으면서 특정 감독의 의식 변화와 맞물려서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작업은 주로 박철수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정지영의 <위기의 여자>(1987)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배창호와 곽지균은 과거의 것과는 다른 80년 대식 멜로드라마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배창호의 초기 작품이 다소 할리우드식 멜로드라마의 관습적 세련미를 동원하여 신파형 멜로드라마를 극복했다면, 곽지균은 필름 느와르의 형식을 가미한 <겨울 나그네>(1986)로 그것을 약간 뛰어 넘었다. 배창호의 그러한 대표 작품으로는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4) 등을 꼽을 수 있고 이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다른 감독들에 의해 보다 경쾌하거나 경박한 모습의 영화로 드러나게 된다.
4. 탈신파 멜로드라마
한국영화의 신파성이 갖고 있는 시대적 특수성 속에 어떤 미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양식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신파는 분명히 한국영화의 극복대상이다. 신파는 한국 멜로드라마가 젊은 관객들로부터 외면 받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기능하였던 것은 물론 모든 장르에 걸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신파성이 가장 두드러진 장르인 멜로드라마를 통하여 그것의 잔재를 극복하려고 했던 감독은 바로 배창호다. 배창호의 <적도의 꽃>(1983),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4),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이 그러한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인물과 환경은 다소 모조된 듯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파성을 극복한 내러티브 그리고 시대 감각에 맞는 인물 설정과 사건의 진행은 기존 한국 멜로드라마의 수준을 한껏 올려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에 두드러지게 등장한 청춘 멜로드라마는 많은 부분에서 이 영화에 빚지고 있다. 기억이 분명하다면, 배창호가 처음으로 언제나 심각하기만 했던 멜로드라마의 인물들을 친근한 리얼리티 속에서 건져낸 것이었다.
배창호의 이러한 영화 내적인 성과는 영화 외적으로는 한국 관객들을 한국영화로 불러모으는 것으로 이어졌다. 70년대 영화의 몰락한 내러티브 그리고 현실감 없는 주제 의식 등에서 비롯된 관객층의 한국영화에 대한 지지도의 감소는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껏 성장하였는데 여기에 배창호의 역할은 결코 적지 않았다.
5. 한국적 영상의 등장
1980년대 한국영화를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장호와 배창호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두 감독은 지나칠 정도로 대중과의 접점이 넓은 편이었다. 그것을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영화의 새로운 경향은 그런 점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이장호의 주제의식 못지 않게 그가 <과부춤>에서 시도한 "영상과 사운드의 시간적 변형을 통해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라든가 <바보선언>의 서술구조가 가진 대안적 측면 역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 역시 치밀한 영상 구성력과 서술과 형식을 일치하려는 노력 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배창호의 <황진이>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런 맥락에서 한껏 중요성을 갖는다.
6. 80년대 외면당한 한국 멜로
80년대 한국영화는 주류를 이루는 충무로의 상업적 영화와 새로운 시도와 모험을 주도하는 비주류의 실험적 영화가 공존하였다. 고답적 신파조 멜로드라마를 극복하고 상황과 감정이 절제된 현대적 감각의 멜로드라마도 출현하였지만 답답한 정치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인듯 소프트 포르노물<애마부인>(1982, 정인엽), <빨간앵두>(1982, 박호태), <무릎과 무릎 사이 >(1984, 이장호), <뽕>(1985, 이두용), <어우동>(1986, 이장호), <매춘>(1988, 유진선), <애란>(1989, 이황림)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중 <매춘>은 4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88년 흥행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 환영받기도 하였다. 소프트 포르노물은 제작자에게 상업적 만족을 가져다 주기는 하였겠지만 한국영화를 저급한 오락물로 취급받게 만들어 한국영화의 몰락을 재촉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80년대 한국 멜로 영화는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발전을 꾀하려는 몸부림이 많았던 시기였지만 상업적이기만 한 소프트포르노물의 인기에 눌려 노력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
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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