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6일 수요일

인간 딜레마 (이용범 연재 에세이), 행동 함정(behavior trap)

자료: 계간 문학잡지 "너머", http://beyond.or.kr/v4_w35.htm



(중략)...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행동을 선택했는데,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는 것을 ‘행동 함정’이라고 한다. 가장 흔한 예로 드는 것이 바로 ARS 전화이다. 휴대폰 요금이 잘못 부과되어 통신 회사에 전화로 문의한다고 하자. 아마 십중팔구는 통화 중일 것이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운이 좋아서 고객만족센터와 연결이 되었다. 그러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상담원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계적으로 녹음된 안내원의 음성이다. 상담원이 연결될 때까지 잠시 기다려 달라는 음성이 들린 후 세상에게 가장 긴 음악이 흘러나온다. 시간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상담원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음악을 들은 당신은, 이번 음악이 끝날 때까지 상담원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전화를 끊기로 결심한다.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만일 전화를 끊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를 되뇌이다가 마침내는 욕설을 퍼부으며 전화기를 내동댕이치고 말 것이다.

당신이 단번에 전화를 끊지 못하고 망설인 것은 그때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의 비용이 아깝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매몰 비용 효과’라 부른다. 사람들에게는 손실이나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미 지불한 노력과 시간을 손실로 느끼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려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오지 않는 버스를 10분이나 더 기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초과해서 기다린 시간만큼의 손실을 보상받아야 했던 것이다.

택시를 탄 뒤에 한꺼번에 몰려온 버스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두 대의 버스를 목격한 것은 그만큼 충분히 기다렸기 때문이다. 『왜 버스는 세 대씩 몰려다닐까(Why the toast always butter side down: the science of Murphy’s law)』의 저자인 과학 저술가 리처드 로빈슨(Richard Robinson)의 설명에 의하면 버스가 몰려다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버스가 첫 정거장에서 승객을 싣고 출발한다. 첫 버스는 정거장마다 멈춰 서 승객을 싣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때 두 번째 버스가 차고지에서 출발한다. 첫 버스가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에 두 버스 사이의 간격은 조금씩 줄어든다. 더구나 첫 버스가 많은 승객을 태웠으므로 두 번째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은 많지 않다. 따라서 두 번째 버스는 각 정거장에서 더 빨리 출발할 수 있고, 정거장이 반복될수록 그 거리는 더 좁혀진다. 그때쯤 세 번째 버스가 차고지에서 출발한다. 세 번째 버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버스와의 간격을 줄인다. 따라서 어느 순간에는 버스 세 대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로를 변경한 것이 부질없는 행위라는 점에 대해서도 리처드 로빈슨은 그럴듯한 설명을 내놓는다. 옆 차로가 덜 막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옆 차량이 움직일 때 차량들 간에 거리가 생기면서 차량 행렬의 길이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차량 10대가 움직이면, 차량들 간의 벌어진 간격 때문에 20대의 길이만큼 줄이 길어져서 더 많이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20대가 움직이다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당신의 자동차는 앞차가 움직여도 출발 후 금세 멈추어 버린다. 그래서 당신의 차가 10대의 옆 차량을 지나쳤어도 잠깐 움직인 것처럼 느껴진다. 즉 당신은 다른 차로의 ‘길이’를 당신 차로의 ‘시간’과 비교하기 때문에 옆 차로가 빨라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옆 차량을 기준으로 보면 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사실은 모든 줄이 느린 줄이다.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줄은 결국 일정한 비율로 나뉘게 되고, 어느 줄이든 속도는 같게 된다. 이를 ‘빈도 의존성 선택’이라 한다. 당신이 늘 재수가 없다고 느끼는 것도 느린 줄은 기억에 남지만 빠른 줄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기 때문이다.

매트리스의 딜레마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첫머리에 출근길의 딜레마를 예로 든 것은 ‘매트리스의 딜레마’라는 도덕적 딜레마를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행동 함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두 명 이상의 당사자가 개입하게 되면 ‘집합적 함정’이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게 되면 집단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로 출근길의 딜레마가 여기에 해당한다. 끼어들기로 인한 교통 체증은 도로 위에 서 있는 모든 차량의 운전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의 끼어들기가 결국 다수의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경제학자 토마스 셸링(Thomas C. Schelling)은 ‘매트리스의 딜레마’를 예로 들었다.

당신이 휴일을 맞아 해변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하자.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당신은 교통 체증을 감안하여 2차선의 고속도로를 선택했다. 하지만 당신은 ‘머피의 법칙’을 신봉하는 재수가 옴 붙은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살펴보니 고속도로 한가운데 트럭에서 떨어뜨린 매트리스 한 장이 놓여 있다. 모든 차량들이 그 매트리스를 피하느라 차로를 옮기는 바람에 교통 체증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투덜거리며 한시라도 빨리 이 구간을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이윽고 오랜 기다림 끝에 문제의 매트리스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이제 이곳만 벗어나면 휑하니 뚫린 고속도로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당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룸미러를 통해 뒤에 뒤엉켜 있는 차량들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휘파람까지 불며 그곳을 지나칠 것이다.
‘아니!’라고 당신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윤리 의식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당신같이 올곧은 사람은 조용히 갓길에 차를 세우고, 뒤에 뒤엉켜 있는 차량들을 위해 도로에 떨어져 있는 매트리스를 치운 후, 다시 운전을 시작할지 모른다. 당신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그 매트리스를 치울 것인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고 씨네 집에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있었다. 뭇 쥐들이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상한 바람 소리만 들어도 쥐들은 ‘고양이가 온다!’고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무리를 거두어 숨으니, 이로 인해 쥐들 또한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들은 누추하게 지내며 종족을 번식해 왔으나 늘 먹을 것이 없어 근심하였다. 이윽고 쥐들이 한데 모여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살려면 반드시 고양이를 없애야 하는데, 누가 고양이를 죽일 것인가?”
어떤 쥐가 나서서 말했다.
“고양이를 없애는 일은 어려우니, 차라리 목에 방울을 매답시다. 방울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미리 피하면 되지 않겠소?”
―이광정(李光庭), 「서여묘(鼠與猫)」, 『망양록(亡羊錄)』 부분

이 우화가 목적하는 바는 쥐와 고양이의 상생(相生)이지만, 매트리스의 딜레마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관이 있다. 매트리스의 딜레마에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매트리스를 지나칠 것이다. 당신도 경험하지 않았는가? 도로 한가운데에 자갈이 흩어져 있거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떠돌이 개의 주검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이런 질문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리저리 핸들을 돌려 매트리스를 피해 간다. 매트리스를 피하는 순간부터 그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제 고통을 겪어야 할 사람들은 도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난 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당신 자동차 뒤편에 있는 운전자들이다. 이미 매트리스를 지나간 사람들은 더 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는 매트리스를 잊을 것이며, 오직 눈앞에 펼쳐진 도로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신은 그 매트리스를 잊어도 된다. 내일 아침이면 매트리스는 치워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만일 내일 아침에도 매트리스가 치워져 있지 않다면 고속도로 통행료나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는 당신은 무척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도로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당신 대신 매트리스를 치웠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이타주의자일 것이다.

‘집합적 함정’에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 출근길의 교통 체증을 생각해 보자. 만일 모든 사람이 버스를 이용한다면 버스는 교통 체증 없는 도로를 신나게 달릴 것이다. 따라서 지각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버스 안에서 겪는 고통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출근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남에게 과시하거나, 버스보다 자동차가 편하기 때문이거나, 낮 동안 자동차를 사용할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동차로 출근하기도 한다. 도로에 자동차가 많다면 당신이 버스를 타도 별 이익이 없다. 버스 전용 차로가 없다면 오히려 버스는 자동차보다 더 늦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자신이 충분히 납득할 만큼의 충분한 사람이 버스를 이용할 때에만, 버스를 탈 것이다.

‘집합적 함정’을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이타심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타심을 발휘하기가 망설여진다. 당신이 이타심을 발휘하는 순간, 누군가 그것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버스를 이용하면 자동차를 타는 인간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진화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타심을 가진 존재가 점점 많아진다 해도 이를 이용하려는 소수의 이기주의자들은 뻔뻔하게 살아남는다. 이기주의자들이 발을 붙일 수 없는 경우는 같은 이기주의자들만 살아남아 더 이상 이득을 얻을 수 없게 되거나, 이타주의자들이 그들을 응징할 수 있을 만큼 숫자가 많아지는 것뿐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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