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1일 일요일

longue durée: 자본주의의 비굴한 출발

자료: 러시아교민신문 다바이코리아, 본 게시물 링크


지은이: 백동인
2007-09-24

※ 훌륭한 글과 여러 가지 공부거리를 정리해 주신 저자분께 감사한다. 나름의 공부를 위해 텍스트에 일부 표기와 메모를 삽입해가며 읽는다. 원문을 보고자 하시는 분은 위 링크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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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경제가 한국 정치의 화두가 되었다. 대선을 불과 97일 앞둔 2007년 9월24일 현재, 대한민국 유권자의 삼분의 일은 차기 한국 대통령이 될 각 후보의 자질로서 경제적인 것이 도덕적인 그것보다 더 중요하며 우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병적인 학력 선호사상도 일본의 선진 기술력과 중국의 저가 생산품 사이에서 샌드위치로 전락한 한국경제의 어려움이 근본원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일용할 양식 문제로 고통 받지 않기 위해서 국민 누구나 취미와 자질, 능력에 따라 배분되어야 할 직업시장이 극단적인 경쟁의 장으로 변모되면서, 취업과 성공을 갈망하는 예비취업자들, 혹은 더 큰 야망을 성취하려는 권력지향적 인물들이 학위위조라는 극단적 선택을 주저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경제란 원래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태초에도 경제가 있었을까? 특별히 역사 속에서 경제는 언제부터 일상사와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되었을까?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서구의 그것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경직된 관료주의그들의 부패, 후진적인 금융시스템, 무엇보다도 시민사회의 뿌리가 없는 러시아의 정치적 행로가 참된 민주주의가 될 것이란 확신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역사 속에서 처음 출현하게 되었을까? 자본주의의 마지막은 세계 공통의 형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중국,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와 결국 결별의 길을 택할 것인가? 

그 동안 자본주의의 앞을 내다보는 것이 경제학의 주요한 과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서구가 러시아, 혹은 중국의 자본주의 방향에 이의를 제기하면 할수록 역사 속에서 처음 출현한 자본주의의 원형에 대한 궁금증도 그 도를 더해가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색다른 관점에서 자본주의에 관한 물음을 던져보려 한다.


- 페르낭 브로델(1902-1985)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은 ‘최초의 노벨 역사학상 수상자’, ‘역사학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은 금세기 최고의 역사학자로서 ‘지중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프랑스의 아이덴티티’등과 같은 대작들을 저술하여 ‘장기지속’, ‘전체사’, ‘세계-경제’등과 같은 개념들을 역사이해에 적용함으로써 역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친 위대한 역사가이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초고를 작성한 후 전쟁 후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바 있는 자신의 출세작, ‘지중해’라는 작품에서, 과거에 위대했던 지중해 세계, 즉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아메리카 까지 연결되는 광범위한 지리역사의 흐름을 운명적, 체념적으로 엮어내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역사학 분야에 국한된 자신의 논문 1000페이지 가운데 무려 1/3을 지리 분야에 할애함으로써 지리적 관찰을 역사의 중요한 수단으로 부각시켰다. 

지리학은 19세기까지만 해도 국경설정에나 동원되는 역사학의 시녀정도로 인식되었었다. 그래서 1891년 창간된 ‘지리학연보’(Annales de Géographie)에 관여한 프랑스 아날학파는 지리학을 주로 지방사를 엮는 수준으로 응용하려 들었으나, 뒤늦게 가담한 브로델은 지리학을, 지방이라는 제한된 틀로부터, 대륙적 차원의 시간적 테두리로 확대해서 지리역사를 사건--국면변동(conjoncture)--구조라는 삼분구조의 틀로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소위, 장기지속(la longue durée)은 브로델의 역사학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개념이다. 이 말은 역사란 지속되는 시간이 길다는 뜻이다. 적어도 수세기 동안 반복적으로 동일한 영향을 끼친 역사의 장기지속을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역사를 복원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관점을 주목하고,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려낸 수세기의 시간대를 함께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 장기지속

브로델의 역사는 삼분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바다의 비유를 빌려 표현하자면, 바다 맨 아래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완만한 리듬을 가진 역사”가 있으며, 맨 위 바다 수면에는 “표면의 출렁거림”이 있다. 조금 전에 설명한, 구조-국면변동-사건의 역사가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로 말하면, 35년의 일본 제국주의, 뒤 이은 54년의 분단체제 등이 완만한 리듬을 가진 중간층의 역사라고 한다면, 최근 급락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증시의 형국이나,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정치권의 균열구조의 변화가 거대한 태풍을 몰고 오는가 하면, 순식간에 고요함의 정적을 유지하는 대양 수면의 출렁거림에 비유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리학이 동원된 그의 역사학에서 말하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브로델의 제자 라뒤리는 그의 영향을 받아 1320년부터 1720년 까지 프랑스의 역사는 인구의 증감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이야기 했고 이것은 많은 사람을 경악시켰다.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다니? 역사학의 실탄은 시간인데,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역사학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의 원인제공자인 브로델의 ‘장기지속’은 과연 그러한 뜻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것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브로델은 주장한다. 

역사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짧은 시간이건 긴 시간이건 모두 움직임이다“(구조주의). 그 역사의 맨 위에는 ”출렁거림“이 있다. 그것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역사이고 그 영향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브로델의 역사관에서 중요한 것은, 심성(장기지속의 감옥)적 시간이 경제적 시간보다 뒤처진다는 점이다. ‘장기지속’은 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회수학, 구체적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장기지속적인 구조, 그것은 반복적인 움직임의 연속으로서 1470년에 시작되어 1650년 까지 180년간 지속된 세기적 추세(trend)가 가장 긴 장기적 변동으로 이해된다.  지리역사학에서, 이 장기 16세기에는 10년 이내의 짧은 주기를 다룰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원래 사건은 짧고 불규칙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사건은 홀로 있을 때 불규칙적이지만 구조위에 떠오를 때 움직임이 파악되기 마련이다. 포착 불가능한 사건은 더 이상 역사일 수 없다. 포착불가능하다는 말은 장기지속적으로 관찰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브로델의 장기지속적인 역사학에는 불규칙성이 본래적 성격인 ‘사건’의 자리가 없다. 모든 것은 다 사건이지만 장기지속적인 테두리로 들어오면 그것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고 역사가 된다. 

그의 역사에 나타나는 사회변동은 정치, 경제, 사회, 지리, 국가, 전쟁 등 모든 국면에서 사건으로 전개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사건들은 국가의 형태로서 도시국가->영토국가->제국 등의 추세와, 사회적으로 영주의 반동->부르조아지의 배신->빈곤화(사회적 학살)의 추세로 관찰된다. 또한 북유럽의 종교개혁->남유럽의 대응종교개혁->문명간 접촉->동화->추방 등과 같은 유럽에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문명전환의 과정도 그의 역사학에서는 장기지속으로 인식된다.


- (지리적) 구조란?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는 산, 평야, 바다. 등 거의 모든 지리적 환경이 웅장하면서 섬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는 근대이전의 “지중해 세계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는 말로 당시의 생존 환경을 설명했다. 바다에는 물고기가 부족했고, 따라서 어부와 선원도 부족했다. 산에는 건조한 날씨로 인해 목재가 부족했으며, 따라서 선박톤수의 감소, 건조비의 상승과 같은 경제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지중해 세계에는 농작물이 부족했고 그 결과, 하위 층은 언제나 기아선상에 놓여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빈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람들의 절제, 검약, 근면으로 이어졌고 제국주의를 용인했다는 것이 그가 말한 제국의 출현의 동기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의 성공에서 보듯 때때로 산은 도피처->자유->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유목민들로 하여금 바다로, 다시 사막으로, 더 낳은 목초지를, 고산지대로 이동하게 했던 그 거대한 흐름은 이동목축의 형태를 통해서 지리공간의 혁명적 확대를 초래했고 궁극적으로 지리상의 대 발견은 지중해 전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쨌거나 위의 이유들로 인해 지중해 공간은 동->서로, 남->북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정한 형태로 정돈되어 갔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피렌체와 로마, 16세기의 볼로냐를 둘러싼 각축 가운데, 베네치아->제노바->리보르노 순으로 도시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갔고, 그 같은 이탈리아의 혼돈은 전 지중해의 운명을 함께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적함대를 거느린 스페인이 아프리카 정복을 지속하는 대신, 경제적 대가가 분명하지 않은 신기루와 같은 이탈리아의 손쉬운 역사에 매어달린 것은 스페인으로서 대단한 비극으로 이해된다. 


- 상층구조

세계적인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1886-1964)는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인류역사상 가장 특이한 체제로서 그 특질은 <원래 경제, 종교, 법률 등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는 총체로서의 사회>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하던 경제가 돌연 그 가운데 독립하여 나와 오히려 사회를 강제하고 복속시킨 과정으로서 그 핵심은 다름 아닌 시장(market)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브로델은 자기조정적[self-controlling 혹은 self-regulating의 의미, 즉 "스스로 조절해 가는"의 뜻으로 보인다]시장은 산업혁명이후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에 이미 발달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19세기가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인간, 대지, 화폐 등이 상품화되어 시장, 곧 인력시장, 토지시장, 화폐금융시장 등과 같이 자체조달적인 시장이 장기지속적으로 관행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그는 보헤미아 광부들의 고용형태,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을 때 다리위에서 고용을 기다리는 관행, 포도밭 노동자들의 파업 등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예를 들고 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권 35-48쪽)

게다가 폴라니와 달리 브로델은, 시장이 언제나 경제적인 역할과 더불어 사회적 역할도 수행해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정기시(우리나라의 오일장)가 민중들에게 오락기능과 문화기능의 기본소통을 담당해 왔음을 주목했다. 정기시에서는 수많은 오락거리와 축제의 굿판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것이 당시 얼마나 일반대중의 의식을 깊이 지배해 왔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근대사를 보는 브로델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물질생활-경제-자본주의’의 도식이다. 여기서 ‘경제’는 우리가 이해하는 지금의 ‘시장경제’와 유사하다. 즉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가격이 결정되고 이 가격에 따라 경제활동이 조정된다. (시골장이나 정기시) 브로델의 설명에 따르면, 중세이래로 지속된 시장경제의 점진적인 확대가 산업혁명이후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지평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중세의 시장은 과거로 올라갈수록 자급자족적이거나 대부분 한정된 좁은 범위 내에서 물물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브로델은 엄청난 부피를 차지하는 이 '층'을 ‘물질문명’(la civilisation matérielle) 혹은 물질생활’(la vie matérielle)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브로델의 ‘경제’시대에 등장하는 대상인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장돌뱅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의 거래시킨 물건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가격을 조작했다. 이들은 환거래를 통해서 쉽게 자본을 불리고 국가기구나 지방 권력체와 결탁해서 이권을 챙겼다. 직물업에 투자했다가 농업이 수익이 더 좋을 것 같으면, 얼른 그곳으로 투자를 돌리는 등 시장을 교란하거나 독과점을 즐겼다. 바로 이것이 브로델이 말하는 역사 속에 나타난 ‘자본주의’이다.

유럽 근대사를 보는 브로델의 독특한 시각인 삼분할 체제는 이제 거의 고전적인 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물질생활-시장경제-자본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읽으면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종래의 역사학이 삶과 사회의 ‘변화’를 추적하였던데 반해서 브로델은 변화할 줄 모르는 ‘장기지속’을 역사학의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장기지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위 역사의 최하층을 이루는 ‘물질문명’ 혹은 ‘물질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 상층구조의 문제

브로델의 상층구조는 ‘시장’과 ‘시장경제’를 가지고 출발할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근대사란 점진적으로 자급자족적인 사회구조가 해체되면서 생산이 일반화되면서 시장이 등장했다고 보아왔다. 그러나 브로델은 시장경제가 자리잡아가는 발전의 극점이 자본주의이며 그 가운데 시장이 등장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미 중세부터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함께 기능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브로델의 ‘시장경제’는 여러 종류의 시장들이 다양하면서도 중층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이다. 브로델은 질릴 정도로 많은 시장들을 열거하는데 그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초보적 시장: 잉여농산물의 수집 및 교환처로서 통상적으로 읍에 하나 정도의 시장이 있었고 도시에도 공개시장이 있어서 도시의 공산품과 시골의 농산품을 교환하는 매개처로 이용되었다. 당시의 시장은 매매자들이 직접 나서서 거래하므로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드러나 독과점, 매점매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점차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시장의 수가 늘어나고, 전문화, 조직화가 진행되었는데, 특별히 대도시가 출현하면서 소규모 시장들이 큰 시장에 흡수되거나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시장의 혜택이 없는 곳에는 행상들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며 교환활동이 크게 증가하자 상설상점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생겨나더니 점차 읍과 시골마을에 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2) 정기시(foire)와 거래소(Bourse): 정기시는 원래 우리의 ‘장’과 같은 개념이다. 교환활동이 필요하지만 상설중심지를 가질 형편이 못될 경우 정기적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가면서 순환 시장체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때로는 엄청나게 큰 규모로 발전한 결과 단지 지방 차원의 물자교환 정도가 아니라 넓은 지역 간의 교환, 나아가서 유럽 전역 수준의 교환을 중개하는 초대형 정기시로 발전하였다. 파리 근교의 랑디 정기시나 상파뉴 정기시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그 안에는 값싸고 상하기 쉬운 지방산물을 거래하는 소매로부터, 원격지 산물을 거래하는 상층부 도매상은 물론, 화폐거래와 크레디트거래를 수행하는 최상층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피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정기시는 원래 도매, 소매, 상품, 금융이 함께 거래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시나 도시의 비상설 시장이 그것의 충분한 역할을 못할 때 항시적으로 대규모 거래를 도맡아 하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거래소’라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지방산물의 거래를 취급치 않는 대신, 도매 이상의 거래와, 환거래, 주식거래 등 큰 거래만이 이루어졌다. 

브로델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거래소가 등장해서 도시가 교환의 중개기능을 맡게 된 때이다. 이처럼 경제가 발달하고 규모가 커짐으로 해서 거래소 체계로 도시 기능이 확대되며 유럽의 주요한 시장으로 떠오른 곳이 바로 17세기에 찬란하게 상업의 꽃을 피운 암스테르담이다. 그러나 경제가 미숙한 폴란드는 16~18세기 내내 여전히 정기시에 의존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정체되었다. 

어쨌거나 12세기부터 여러 지역의 가격들이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위에 열거한 각종 시장이 ‘근대적’인 시장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 브로델의 생각이다.


- 하층구조

‘경제’라는 움직임, ‘자본주의’라는 민활성과는 달리 ‘물질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부동성 내지 타성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를 움직이려는 상층의 힘에 대한 저항력 혹은 제약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의 구조’는 15~18세기 동안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이 시기, 유럽인구의 80~90%가 농업에 종사했으나 밀알 한 알을 뿌리면 가을에 4~5알을 거두는 제약적인 구조 가운데 유럽인들은 운명과 같은 비극적인 일상사(routine) 가운데 생존을 영위했다. 따라서 당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제약하는 이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즉 지난 세기 각 지역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으며, 농업생산량, 그것을 환산한 칼로리는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인간은 인생이라는 단막극에서 단역을 간단히 소화하고 쓸쓸히 무대를 내려서는 단역배우와 같다. 이 차원에서는 인간이 어떤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구조만이 인간에게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장기지속의 역사는 ‘무의식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 자본주의

따라서 브로델이 파악한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의 다음단계가 아니라 경제의 위에 존재하는 영역이다. 그것은 최상층에 군림하면서 자신의 아래에 위치한 층위들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취해 온 또 다른 질서이다. 예를 들어 설탕은 16~17세기에 안틸레스 제도에서 노예를 통해서 생산해서 유럽의 몇몇 대도시에서 정제된 후 백설탕으로 정제되었다. 다음에 대상인들이 이것을 사들여 각지에 배분하고 다시 소매상에 의해 최종 소비자에게 판매되었다. 이 과정에 가장 큰 이윤을 누린 사람이 누구였을까? 사탕수수는 노예노동을 통하지 않고는 이윤 창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상인들의 인식이었다. 그러므로 이익산출을 위해서는 특별한 지점에 서서 자본주의의 급소를 밟고 있어야 한다. 당시 설탕 제조와 판매에서 정제업자, 소매상인이 약간의 이익을 누리기는 했으나 최고의 이윤을 누린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정제업 뒤편에서 도매 상업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와 같이, 권력과 화폐가 결탁되는 특별한 지점에 자리를 잡고 이윤을 취한다. 자본주의가 경제의 위에 위치한다는 말은 아래의 경제활동 전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유리한 곳에 자리를 잡고 최대의 이윤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통만이 자본주의의 영역이었고 생산은 남의 영역이었다. 왜 자본주의는 전체 사회경제에서 제한된 활동만 하고 전체를 정복하지 못했는가?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주머니가 쌓인 상태(unkysté)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업상의 수요와 공급은 엄청난 것이지만 대부분 자급자족적으로 이루어지며 그중 일부만이 시장을 거쳐 갔다. 영주의 권력, 농민봉기 등 그 어떤 것도 구체제를 부수지 못했다. 농업과 자본주의가 만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했다. 

17세기에 베네치아의 상업 활동이 위축되는데 반해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자 대규모 자본이 농업에 쏠린 적이 있다. 동구에서는 농노제를 통해서 곡물을 쥐어짜낸 다음 서구로 수출하고 이윤을 독점했는데 이것은 동구의 재판농노제와 서구의 상업자본주의의 결탁을 의미한다. 브로델은 이 같은 당시의 관행에 대해, 생산과정은 봉건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전체로 보면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결코 한 분야에 특화하지 않는다. 역사가 사건-국면변동(conjoncture)-구조의 삼분구조라고 할 때, 자본주의는 국면변동을 잘 관찰하다가 기회가 오면 순식간에 이곳저곳으로 손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것은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찾는 경제 질서에 부응해서가 아니라, 투기와 지배로 이윤을 강제 수취하는 사회적 기생관계로 파악된다. 

역사학이 파악하고 있는 당시 자본주의는 시장의 최후 단계에서 요청되는 투명성 내지는 규칙성과는 정반대의 질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우리는 그것을 반시장(contre-marché)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같은 성질의 것이기는 커녕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것이었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바닥 ‘경제’가 발달해 있어야 거기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도 발달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경제로부터 자본주의로 한 단계 더 발전해 나가는 것이, 저절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국가인데 이것은 다음번에 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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