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3일 월요일

캉디드(Candide)

자료: http://zmanz.blogi.kr/tag/볼테르


볼테르  Voltaire(프랑스, 1694~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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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www.thequoteblog.com



17세기가 저물어 가는 즈음인 1694년에 태어난 볼테르Voltaire는 운이 좋게도 18세기를 내내 지배하다가 18세기가 저녁 해를 맞이하는 즈음인 1778년에 지상에서의 할 일을 마감한다. 파리에서 공증인의 아들, 요컨대 순전히 부르주아 출신인 그는 예수회 교도들이 경영하는 학교인 콜레즈 루이-르-그랑에서 공부한다. 그곳에서 그는 문학 원리와 그곳의 편협하고 순수한 취미를 배우기보다는 유익한 친구들을 사귀려고 애쓴다. 그는 그들을 발판으로 가능한 한 일찍 상류 사회와 ‘사람들이 즐겁게 지내는 사교계’에 들어갈 생각을 갖는다. 그는 이때부터 벌써, 문인들에게서는 아직껏 볼 수 없었을 만큼의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궁정에서도 주목을 끈다. 그는 아루에(Arouet)라는 평민의 성을 버리고 아루에2세Arouet  Lejeune 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자칭 드 볼테르 씨M. de Voltaire가 된다. 이 아호는 쉽사리 받아들여진다. 왕비는 친밀하게 그를 ‘내 가엾은 볼테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느 날 슈발리에 드 로앙이 하인들을 시켜서 그를 곤봉으로 후려치게 한다. 자기의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공작이나 후작들이 자신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만류하거나 옹호해주기보다는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본 그의 분노는 극도에 달한다. 그는 슈발리에에게 결투를 요구하지만 그의 이 불손한 행위로 그는 바스티유에 투옥된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난다. 이러한 것이 불평등과 전제정치에 관해서 그가 겪은 첫 경험이 된다. 
그는 1755년 무렵까지 문학에 전념했는데, 그의 삶은 파리의 체류로 이따금 중단되긴 하지만 영국 망명의 3년 간, 샤틀레 후작 부인 댁에서 지낸 시레이에서의 10년 간, 프리드리히 2세 곁에서 지낸 프러시아에서의 3년간으로 나누어지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세 번의 시기를 거친다. 
그가 영국망명에서 알게 된 것은 창작의 자유였다. 이 자유의 덕택으로, 과학은 프랑스보다도 훨씬 더 진보해 있었으며, 과학의 응용은 인간 생활의 조건을 개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깨어난 호기심은 뉴턴에서 종두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면을 섭렵하게 된다. 그는 실험적 방법의 힘을, 법칙에 따라 수행되는 탐구의 힘을 확인한다. 
볼테르는 시레이에서 10년간을 지낸다. 그는 여기서 사치와 오락과 연극의 생활을 한다. 10년간을 떠나 있던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아카데미 회원이 돤다. 또한 국왕의 사료 편찬 관 겸 시종, 정부를 대변하는 시인, 정치 신문의 편집자, 비밀 외교관이 되는 등 바쁜 일상을 보낸다. 그는 이제 위대한 인물이 되었으며, 아무의 속박도 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하고, 아무에게도 개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발 빠른 출세를 시기하는, 지위 있는 사람들의 은근한 반감에 화가 난 그는  오래 전부터 그를 수하에 두기를 열망하던 프러시아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일신의 안전과 특별한 호의와 자유를 약속 받고, 포츠담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국왕과 안 좋은 감정으로 결별하고 만다. 
만년에 볼테르의 영광은 우상 숭배로 바뀌게 된다. 이는 쉬아르 부인Mme Suard의 영향으로, 이 20세의 젊은 여자는 무척이나 볼테르에게 숭배심을 가지고 접근했다. 마치 하느님 앞에 나선 신자와도 같은 것이다. 떠나기 전에 그 여자는 그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그에게 청할 정도였다. 1778년에 다시 파리에 돌아온 그는 석 달도 못 가서 영예스러웠던 삶을 마감한다. 

해설                  

철학적인 소설로서의 ≪캉디드≫

캉디드, ‘순진한’, ‘순박한’이란 이름을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작가 볼테르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서는 대단한 문제작이며 훌륭한 작품으로 최근에도 많은 연구  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상을 낙천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비관주의로 볼 것인가를 화두로 던지고, 끝까지 이 두 이데올로기의 반복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는 당대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던 철학사상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인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은 주인공 캉디드를 내세워서 낙천주의로 출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가는 우선은 낙천주의, 즉 당대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철학적 논쟁 중에서 라이프니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라이프니츠의 틀에 박힌 듯한 낙천주의를 공격한 것일까? 반대로 니체나 쇼펜하우어와 같은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의 편에 가담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제 3의 철학을 택할 것인가? 아마도 그 대답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시점에서야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매우 유순하고 고지식하고 순박한 소년 캉디드, 그는 이름의 뜻처럼 순진하기 이를 데 없다. 소위 말하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여정을 추적하는 것 자체가 흥미를 유발하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에 실소를 자아내게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렸을 적에 배운 낙천주의를 유지한다.

캉디드는 웨스트팔리아의 툰더 텐 트롱크 남작의 성에서 자라게 된다. 그는 남작의 아들 및 그의 누이동생 퀴네공드 양과 함께 팡글로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선생은 ‘세상은 최선으로 되어있다’(Tout est pour le mieux)는 것을 증명해 보이곤 했다. 요컨대 “세상과 인생의 의의 및 가치에 대해 악이나 반가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세계와 인생을 최선의 것으로 보는 주의” 말이다. 비록 현실은 괴롭다 치자! 그래도 미래는 분명 즐겁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의 낙천관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캉디드의 삶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캉디드가 남작으로부터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다는 의심을 받고 성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군대에 들어가는 일, 아메리카에서 겪는 일, 등 그가 만나는 일들은 최선의 상태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악, 최악으로 되어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가 가는 곳은 엘도라도를 제외하고는 어디나 낙천적인 모습들보다는 추한 모습이며 악한 모습들로 가득 차있다. 군인도, 거룩해야할 종교계의 신부들의 모습도 추악한 모습들뿐이다. 어디에나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사기, 평화가 아니라 싸움이나 전쟁만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발생하는 지진 같은 것 그가 가는 곳 어디나 불행의 요소, 즉 비관적인 요소들만이 등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는 일을 막거나 방해하는 사람들,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기를 치고, 속이고 핍박을 가하는 사람들이며, 그가 어깨를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에게 의지하려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뿐인가? 착하디착하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본의 아니게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하고, 원숭이를 죽이기도 한다. 어디에 가나 속고 사기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며 도무지 되는 일이라곤 전혀 없다. 그야말로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며 최악으로 구성된 비관적인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에게는 그토록 존경하는 팡글로스 선생이 가르쳐준 낙천주의 철학을 버리는 일만이 남아있다.

이제 그 일을 부추기기 위한 존재로 마르탱이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까?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세계 및 인생을 추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보며, 진보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철학”의 편에 서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의 순진한 주인공은 낙천주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모두가 비관적인 일뿐이다. 심지어 그의 주변 인물들이나, 잊혔던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경험담 역시 온갖 추악한 일들뿐이다. 결국 선과 악으로 대별되는 마음의 싸움에서 악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신의 섭리라면 이제는 이 세상을 비관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팡글로스를 다시 만난다. 팡글로스의 모습은 변했으나 여전히 낙천적이다. 그래서 낙천주의는 유보되지만 이후에도 당하는 일마다 비관적인 상황들뿐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낙천주의를 비판하고 비관주의를 옹호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소설은 어떤 철학의 편을 드러내지 않고, 독자에게 그 판단을 유보하며 끝을 맺고 있다.

애정소설로서의 캉디드(생략)

목적소설로서의 캉디드(생략)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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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건들은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는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일세. 자네가 퀴네공드 양과의 사랑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성에서 엉덩이를 발로 차여 내쫓기지 않았더라면, 종교재판에 처해지지 않았더라면,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양들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이곳에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 열매를 먹지 못했을 테니까.”

캉디드가 이렇게 대답했다. “참으로 명언이긴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역자 소개        

최복현은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 《몽롱한 중산층》, 《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 《어린 왕자》, 《별》, 《틱낫한, 마음의 행복》, 《낙천주의자 캉디드》, 《행복한 상상 플러스 102》 등의 번역서,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등, 소설 《어느 샐러리맨의 죽음》을 발표하였고, 최근에는 철학 에세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아름다운 반항》을 출간하였으며, 인문 《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를 발표했고, 《올 댓 러브》는 최시언으로 최근 발표했다. 최근작으로는 《명작에서 멘토를 만나다》, 《어린 왕자의 인생수업》 등이 있다. 현재 인터넷 세계일보에 <최복현의 신화 속 사랑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시 창작 강사로 활동 중이다.

일러두기        

이 책은 2002년 판 라루스(Larousse) 출판사의 ≪캉디드Candide≫를 완역하였다.

편집자 리뷰     

당대에 논란이 되고 있던 철학사상을 염두에 두고 쓴 볼테르의 철학소설. 볼테르는 ‘순박한’ 캉디드를 통해 당시의 정치, 철학, 종교 등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삶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역경을 겪으면서도 낙천주의자 캉디드가 추구했던 행복은 많은 논점을 던지고 있다. ≪캉디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비관주의도, 낙천주의도 아닌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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