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한겨레21 칼럼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세상에는 분명 나와 같은 공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계층, 빈부 격차, 경제적 파산, 깨어진 혼담,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와 같은 말들은 늘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득한 어딘가의 별처럼 멀기만 하다. 그들 사이에는 E. M. 포스터 식의 표현을 쓰자면 한국어를 쓴다는 것 외에는 별 공통점이 없다. 나와 내 가족이 걸맞지 않은 결혼을 한다거나, 파산해 몰락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몇 광년을 지나는 듯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역을 가정하는 것 역시 불쾌 천만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만약, 우리가 어떻게든 한 발을 내디뎌 다른 세계와 ‘연결’하려 한다면?
△ 일러스트레이션/ 이정현 |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계급적 장벽이 잔존했던 20세기 초 영국. 온화했으나 죽는 날까지 근본적으로 급진적이었던 작가 E. M. 포스터는 네 번째 장편 <하워즈 엔드>를 통해 냉철한 회의주의자이자 문학사상 가장 열정적 휴머니스트인 여주인공 마거릿 슐레겔을 탄생시킨다. 마거릿과 그녀의 동생 헬렌은 약 100여 년 전,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에 등장한 계몽주의자·낭만주의자 자매 엘리너와 메리앤 대시우드의 피를 얼마간 물려받았을 법한 인물들이다.
마거릿과 헬렌의 슐레겔가는 제국주의 독일의 영광을 거부하고 영국으로 망명한 집안으로, 이들은 마거릿의 혼인을 통해 대영제국 확장의 최일선에 선 사업가 집안 윌콕스가와 맺어진다. 마거릿의 동생 헬렌이 미혼모가 되자 윌콕스가 사람들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그녀를 내치려 하고, 마거릿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물질주의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녀의 영웅적인 노력과 남편 헨리의 변화를 통해 결국 두 세계는 하워즈 엔드의 지붕 아래 공존하게 된다. 하워즈 엔드의 정신적·실질적 상속자가 된 마거릿은 그곳에서 지친 여동생과 남편이 나란히 함께 목가적 휴식을 누리게 한다.
마거릿은 분명 고귀한 이상주의자이지만, 세상이 이상주의의 ‘희미한 잿빛 공간’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인생이 자매의 삶을 지탱하는 ‘부’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으며, 모든 이상주의자들이 한 번쯤은 고민했을 법한 지점에 대해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너하고 내가 가본 적 없는 거대한 외부 세계가 있어- 그 세계에서는 전보와 분노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우리한테는 인간관계가 최고지만, 거기서는 그렇지 않아. 그 세계에서 사랑이란 재산의 결합이고 죽음은 상속세야. (…) 끔찍해 보이지만, 때로는 그게 진짜 같거든. 그 속에는 어떤 거친 힘이 있고, 강한 인간을 만들어내.”
이러한 역지사지의 능력과 사려 깊음을 통해 마거릿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는다. ‘단지 연결하는 것’(Only connect). 산문의 세계와 열정의 세계를 연결시켜 양쪽을 모두 고양시키고 계급과 이념, 성별을 넘어 인간의 사랑을 정점에 이르게 하는 것. 양차 대전으로 구제도의 관습이 붕괴되기 전까지, 동성애자이자 반전주의자였고 “조국을 배신하는 것과 친구를 배신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조국을 배신할 용기를 택하고 싶다던” 양심적 지식인 E. M. 포스터가 꿈꾼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슐레겔 자매와 같은 이상주의자들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잊을 수 없는 표현을 남겼다. “그들은 때로 한숨을 쉬며 대영제국 전체를 외면하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서 역사의 위업은 세워지지 않는다. 슐레겔 자매 같은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다면 이 세상은 희미한 잿빛 공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은 그렇지 않으므로 이들의 존재는 그 안에서 별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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