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자명한산책 > 번역투 문장은 왜 나쁜가- 멀고느린구름
※ 메모: 위에 전출처로 밝혀진 글이 비공개 글이어서 여러 번 인용을 거친 이 글을 원출처 없이 다시 인용해야겠다. 원작자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 "번역투"라고 뭉뚱그려 일컬을 수 있는 우리말 표현법은 "대체로" 읽기에 불편하다는 데 공감하지만, "번역투"라는 이유 말고, 우리말 어법의 다양한 잣대들(문법이나 수사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준들)과 비교해서 판단하는 기준점이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자극해준 원작자의 글이 고마워서 때때로 음미하고자 여기에 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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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술 탓에 글쓰기 관련 서적이 넘쳐나고 있다. 얼마 전 지인의 부탁으로 쓸만한 글쓰기 참고 서적을 찾아보기 위해 영풍문고를 갔었다. 내가 글쓰기 공부를 할 적만해도 국내작문론 서적으로는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거의 유일했는데, 몇 년만에 수 십 가지로 책이 늘어났더라. 작문론 코너에서 이리저리 책을 살펴 보았다.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개 중에는 바른 문장쓰기와 관련한 책도 여럿 있었는데 재미난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하나 같이 번역투의 문장은 안돼! 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엉? 왜에?
그러게, 왜? 왜 번역투의 문장은 쓰면 안된다는 걸까? 국적없는 표현이라서? 아래 한 문장론 책에서 인용한 것을 먼저 보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낮술마신달님의 블로그에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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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없는 번역투 표현'란에서 대표적 사례를 부분 옮겨본다.
'피동형'은 글심(표현력)을 약하게 한다.
'피동형'은 '사동형'이나 '능동형'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책을 읽히다'(사동형), '책을 읽다'(능동형)
ㄱ.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ㄴ. 회의를 보다 즐거운 것으로 하기 위하여, 좋은 제안을 보내 주십시오.
ㄷ. 새 달 중순경 회의를 가지려 합니다.
ㄹ.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ㅁ. 오늘 중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ㅂ. 더 일찍 제출할 터였는데 미안합니다.
ㅅ.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이렇게 고쳐야 한다.
ㄱ. 이 책은 젊은이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ㄴ. 즐거운 회의가 되게끔, 좋은 생각을 보내 주십시오.
ㄷ. 새 달 중순께 회의하겠습니다.
ㄹ. 계획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ㅁ. 오늘 중으로 하여야 합니다.
ㅂ. 더 일찍 내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ㅅ.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을 행한다', '~을 갖는다'는 쓰지 마라
'을 행한다', '~을 갖는다'는 번역투 말이다. 구수한 청국장 냄새나는 우리식 표현으로 고치자.
7년간 연구를 행한 끝에 -> 7년간 연구한 끝에
전문적 조사를 행하고서야 -> 전문적으로 조사해야
재판이 행해진 뒤에 -> 재판 끝난 뒤에
단독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 단독 회담의 자리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진 사이인지 -> 어떤 사이인지
예정대로 입학식을 갖기로 했다. -> 예정대로 입학식을 하기로 했다.
조심할 번역투
'~을 시키다'는 번역투 표현이므로 '~하다'로 바꾸자.
환경을 개선시키다 -> 환경을 개선하다
회장을 구속시키다 -> 회장을 구속하다
전투기를 격추시키다 -> 전투기를 격추하다
계획을 구체화시키다 -> 계획을 구체화하다
'~화하다'는 '~해지다'로, '~화되다'도 번역투이므로 '~이되다'로, '~화되어지다'도 '~화하다'로 바꾸자.
비대화한 도시 -> 비대해진 도시
폐허화된 평양 -> 폐허가 된 평양
조직화된 종교 -> 조직화한 종교
산업화되어진 오늘 -> 산업화한 오늘
'~적', '~화', '~성'의 남용
한자어 접미어 '~적(的)' '~화(化)' '~성(性)'은 모두 추상(抽象)을 나타내는 접미사들이다. 너무 많이 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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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소위 '번역투' 문장을 다른 여러 서적에서도 문제 삼고 있다. 글쓴이의 나이가 많으나 젊으나 한 결 같이 그건 안돼! 라고 외친다. 그러나 다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단지 한국적이지 않다 라든가, 전통을 무시한다 라든가 하는 궁색한 근거만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문장 혹은 표현에 '국적'이 있다는 생각은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물론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개인이 구사하는 표현이나 문장을 가지고 국적을 들먹이며 규제할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첫 번째 주의에서 "피동형은 글심을 약하게 한다" 라고 외치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글심이 약해지는 것은 오히려 '능동형만'을 사용했을 경우의 현상이다. 피동형과 능동형을 함께 사용했을 때 되려 더욱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다. 예를 보자.
ㅅ-1.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ㅅ-2.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적을 지키기 위해 피동형(ㅅ-1)을 능동형(ㅅ-2)으로 바꾸어 보면 문장의 늬앙스가 전혀 달라진다. ㅅ-1의 문장에서 그녀는 어떤 외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행위를 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다. 허나 ㅅ-2의 그녀는 스스로 어떤 일을 해버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걘 왜 그랬대? ㅅ-2의 그녀는 왠지 얄미운 그녀이다. 자랑스런 문장의 국적을 지키기 위해 모든 '위기의 그녀'를 '얄미운 그녀'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두 번째 주의, '행한다, 갖는다'를 쓰지 말라고?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이 어디 있는가. 뻔히 있는 표현을 쓰지 말라니. 언어는 기본적으로 풍부할 수록 좋은 것인고, 표현 또한 선택지가 많을 수록 재미난 것이다.
예정대로 입학식을 갖기로 했다. -> 예정대로 입학식을 하기로 했다.
앞의 문장은 소위 번역투이다. 영어의 have 표현을 우리말로 옮겨 온 것. 자 우리 입학식으로 다양한 말을 만들어 보자.
입학식을 열다.
입학식을 하다.
입학식을 개최하다.
입학식을 치르다.
입학식을 겪다.
입학식이라는 주어로 우리는 숱한 다른 형태의 표현들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다 영국에서 물 건너 온 '갖다'라는 표현을 하나 더 붙이는 게 그렇게 몹쓸 짓이란 말인가.
입학식을 갖다.
표현이 좋지 않은가? 영어식 표현에는 시적인[사적인?] 것이 많다. '입학식을 갖다'라는 표현 역시 사물이 아닌 것에 사물을 소유한다는 뜻의 '갖다'를 붙임으로서 독특한 늬앙스를 전달한다. 창의적인 언어 사용자라면 더 참신한 표현을 발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입학식을 풀다', '입학식을 맞이하다', '입학식을 잡다', '입학식을 낚다' 등등도 아직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의미의 전달이 가능한 표현들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표현 방법은 풍부하면 풍부할 수록 좋다.
문장이나 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나친 민족주의자이거나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문장,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전통이란 과연 어느 시대의 것일까. 아마도 일제시대, 좀 더 길게는 조선시대의 것일 터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테니 그 전통이라고 해봐야 끽해야 3~400년 정도이다. 그러나 이 3~400년 동안 우리 한반도의 언어가 단일한 표현 방식으로 균일성을 유지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언어와 요즘의 언어 사이에서 조차도 도드라지는 이질성이 발견되니까. 언어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연한 언어의 자연(스스로 그러함)이다. 언어는 도도히 흐르고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것을 인간의 보수적 욕심으로 틀어막아 버리면 물이 고여 썩게 된다.
언어는 흐르고 흘러 저 다른 세계의 강줄기와도 뒤섞이며 넓고 넓은 바다가 되어야 참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 민족의 언어는 참으로 품이 넓은 언어이다. 영국식 표현이든, 일본식 표현이든, 중국식 표현이든 모두 우리의 언어 속에 품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이는 '문장, 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려처럼 재앙인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구사하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혜택인 것이다. ~행하다도 쓰고, ~하다도 쓰고, ~시키다도 쓰고, ~갖다도 쓰고,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다양한 국적의 독특한 표현들을 문맥의 상황에 맞게 맛깔나게 쓰면 그만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입학식을 갖도록 하셈!' 이라고 쓴다고 해서 훈민정음이 알파벳이 되지는 않는다.
사족으로 몇 년전에 어떤 국어학자(아마도 민족주의자)가 방송에 나와서 대한민국을 표현할 때 '저희 나라' 라고 하면 안 되고, 꼭 '우리나라' 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덕분에 요즘 어디가서 저희 나라가... 어쩌구 라고 말 시작하려 하면 철썩! 뺨 맞는다. 그런데 이게 참 웃기는 일이다, 웃기는 일. 아니, 나라를 좀 낮추면 어때서 그러는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모든 존재에 앞서서 존재하는 최상의 것인가. 옳지 않은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국가가 평화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나라보다 항상 우위에 있는 나라인가. 대한민국은 내가 태어난 나라이기 때문에 항상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나라로 대접해주어야만 하는 걸까.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를 통하여 교묘하게 국가주의를 학습시키려는 계략에 온 국민이 얼씨구나 하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건 아닐까. 오호 통재라!
2007. 3/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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