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원광대학교 사학과, http://history.wonkwang.ac.kr/school/west/medieval/medwich.htm
중세의 마녀사냥
1. 머리말
2. 중세의 마녀사냥
1) 마녀의 기원
2) 마녀재판의 시작과 전개
3) 마녀에 대한 처벌과 재판
3. 맺음말
1. 머리말
마녀사냥은 세계사적으로도 잘 알려진, 전형적인 여성억압사이다. 지금도 "사회적 희생양"을 곧잘 마녀사냥에 비유할 정도다. 13∼16세기 유럽은 사회가 안정되지 않은 혼란기였던 데다 악성 전염병이 유행했다. 또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당시 구종교, 가톨릭계는 그 관심을 돌릴 대상이 필요했고 사회적 지위가 열등한 여성들이 그 표적이 됐다.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수백만 명을 넘는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마녀로 몰려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10만 명, 희생자는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11세기 전까지 마녀는 단지 환상 속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막기 어려운 질병이 휩쓸고 시대적 변환기의 혼돈이 닥쳐오자 불안해진 사람들은 그것이 악마와 마녀의 소행이라고 믿게 되었다. 문학작품들은 상상력을 더해 마녀가 달밤을 배경으로 날아다닌다든지 아이의 피와 같은 엽기적인 재료로 요리를 만든다는 등 공상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마녀사냥꾼을 낳았고 마녀사냥꾼들의 마법 이야기는 널리 퍼져서 교황 이노센트 8세가 교서를 발표해 마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마녀를 추적하도록 했다.
여성은 남성의 타락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여겼고 이것이 여성이 악마의 유혹이나 마술을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녀사냥"은 인류의 절반에 대해 인류의 절반이 저지른 "집단 괴롭힘"의 성격을 띠었고 그 방법도 점점 기이하고 잔인해졌다. 바늘로 특정 부위를 찔러 통증과 출혈이 없거나 물에 빠뜨려 가라앉는다거나 뜨거운 쇠뭉치를 잡았을 때 화상을 입은 사람이 마녀라는 등의 엉뚱한 판별 법이 횡행했다. 대부분의 마녀재판은 자백 위주로 진행됐고 일어날 수 없는 공상을 범죄라고 우겨 자백을 받아야 했기에 마녀재판에서는 잔혹한 고문과 처형이 행해졌다.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지목된 여성들은 대부분 늙은 과부나 노처녀, 혹은 지나치게 똑똑한 여성들이었다. 남성들의 판단에 괴벽스럽거나 못마땅한 말을 하는 여성들은 종종 그 목표가 되었고 재산이 많은 과부들이 재산을 노린 남자 친척들의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사건은 결과적으로 여성들을 "훌륭하게" 순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녀사냥 이후 유럽 전역에 걸쳐 부부의 재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가 약화되었고 여성의 역할은 크게 제한됐다. 남성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마녀사냥에 걸려들 위험이 컸기에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의존도는 자연 더 높아졌다.
2. 중세의 마녀사냥
1) 마녀의 기원
마녀탄압의 가장 오래된 예는 기원전 1200년의 이집트에서 있었고, 그리스에서는 데모스테네스의 시대(BC 4세기)에 한 사람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로마에서는 네로와 카라카라 황제에게 심하게 박해받았고, 크리스트교에 개종한 직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AC 4세기)와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대제(AC 9세기)도 주술을 금지한 엄격한 법령을 선포하는 등, 마녀와 그 주술에 대해 탄압과 박해를 가한 예는 드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과 박해는 마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반사회적인 범 죄에 대한 것이었다. 마녀 선풍기 이전에는 마녀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탄압도 극히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마녀에 대해 온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1300년을 경계로 하여 사태는 일변한다. 마녀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돌연 강경해진 것이다. 마녀 선풍은 13세기 무렵에 프랑스에서 불기 시작하여 결국 모든 크리스트교 국가, 즉 서유럽 전역을 황폐화시키고 17세기말에 그 여파가 신대륙 아메리카에 퍼진 후 급속하게 진정되었다. 수만, 수십만의 마녀가 교살 당하고, 혹은 교살 당한 후에 불태워지고, 또는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져 죽었다. 1590년에 독일을 여행했던 여행자는 적고 있다. 제네바에서는 3개월 동안 5백 명(1513년), 트레이브즈(독일)에서는 7천명이 불태워진 탓에 두 개의 마을이 전멸되고, 다른 두 개 마을에서는 여자 2명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1580). 작센에서는 하루사이에 1백 33명(1589년), 알사스의 마을 상 아라만에서는 1년 동안 2백명 이상(1596년), 라부르에서는 4개월 동안 6백명(1609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5천명(1615∼55년), 뷔르츠부르크에거는 8백명, 밤베르크에서는 1천 5백 명이다.
이러한 마녀선풍의 특이한 점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표방한 르네상스의 최전성기에 휘몰아쳤다는 것, 이 선풍의 선두주자였던 이들이 교황, 국왕, 귀족, 당대의 일류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이었다는 것, 마녀의 존재가 옛부터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 그리고 공적 권위와 권력들이 전국적인 조직망을 둘러침으로써 행해졌다는 것, 1600년을 절정으로 하는 전후 3, 4세기 동안에 한정된다는 것 등이다.
2) 마녀재판의 시작과 전개
원래 마녀는 마녀사냥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녀라기보다는 주술을 행하는 여자를 말하는 정도였다. 이들은 "신비적 직관에다가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거나 여성의 다산을 돕는다거나 또는 반대로 낙태를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것을 사람들의 일상요구에 응하여 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술사들이 마녀로 낙인찍히고 이단으로 핍박받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마녀를 판별하는 지표와 기준이 생겨나고 이들을 집단적인 섹트로서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14세기를 대표하는 이단심문과 '베르나르키'는 부부의 불화를 초래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병을 고치는 자를 주의하라고 촉구하였다. 그 후 교황은 마녀를 최악의 이단으로 처벌하는 것을 이단 심문관에게 허가하는 한편 많은 신학자, 악마학자는 마녀에 대한 공통의 특징, 그 식별방법들을 연구하게 된다. 그 결과 14세기말에는 일종의 마녀교로서 마녀라는 집단의 존재가 자명하게 된다. 그러나 15세기까지 마녀의 소추는 극히 경미하였다. 그러나 1500년경을 경계로 하여 전 유럽에 전염병과 같이 마녀의 체포? 재판? 소추가 퍼졌다. 처참하고 극한 마녀재판이 유럽을 휩쓸었다. 1484년에는 '마녀소추지침(Malleus Maleficarum)'이 간행되었다. 전자에는 교황이 아직 다수의 마녀가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추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그 3년 후에 퀘른 대학의 신학교사이자 이단재판관의 저작으로 간행된 '마녀소추지침'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마녀가 되는 학설을 망라하고, 마법의 역사를 서술하며 다시 마녀를 발견하고 추적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나아가 마녀가 실재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연구한 세 권의 서적이다.
이 책은 1869년도에 이미 29판이 출판될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은 점차 그림이 가미되고 나중에는 독일어로 번역이 되기도 하였다. 점차 마녀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마녀의 본질을 논하는 허다한 서적이 간행되고, 저명한 법률가가 악마에게 혼을 파는 계약의 성질을 연구하며, 당시의 형법이 마법사를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로써 마녀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마녀를 적발, 추궁하는 것은 관리와 주민의 신성한 의무이기조차 하였다. 이것이 전에 없던 마녀의 박해시대가 열린 큰 배경이었다. 마녀재판이 극성에 이른 것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 사이였다. 기록에 나타나는 마녀처단의 경과와 사례를 몇 가지 보자. 1582년 바이에른 어느 백작의 한 작은 영지에서 한 명의 마녀가 체포되었다. 이 마녀의 체포에 이러 연속으로 48명이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 당하였다. 1587년 도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부터 1587년부터 이후 7년 간 368명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 당하였다. 1590년 남독일의 소도시 네르도링켄에서 시장의 제안에 의하여 시의회는 거리를 나돌아다니는 마녀를 철저히 일소하도록 결의하였다. 이후 3년 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되었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년부터 1676년까지 197명의 마녀가 화형 당하였다. 소소크만텔(승정령)에서는 1639년에 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되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가 된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년부터 1748년까지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이후 4년 간 2,255인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 간 11명이 처형되었으며 제롯부르크에서는 1679년에 97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튜링겐 숲에 인접한 게오르겐탈이라고 하는 인구 4천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1652년에서부터 1700년 사이에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되었다. 반베르크 승정령에서는 1627년 이후 4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285명이었고 그 이후 30년에 걸쳐 이 재판소에 계류된 마녀재판은 900건을 넘었다. 이 승정령의 인구는 겨우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뷰르스부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년부터 1631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900명에 달하였다. 1627년부터 이후 년 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 당한 157명의 희생자를 보면 잡다한 연령과 계급, 직업의 사람들이 혼재해 있었다.
시의회 의원, 고급관리 등의 부인, 시의회의원의 처자,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자녀 그룹, 8세, 9세, 12세의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루다에 살고 있는 바루다세르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간 7백명의 마녀를 화형 시켰는데 자신의 일생동안 1천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하였다고 한다. 로트링겐에 살고 있던 니콜라스 레미라는 사람도 재직 15년간 화형 시킨 마녀가 9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3) 마녀에 대한 처벌과 재판
① 체포와 수사
마녀는 먼저 풍문에 의해 적발되었다. 누구누구가 마녀라고 하는 소문이 나고 이들을 체포하고 이웃의 부합하는 진술에 기초하여 고문에 의해 마녀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마녀로서 소추 받은 자가 심문과정에 자신이 아는 마녀를 지명하는 경우 체포된다. 그 뿐 아니라 마녀의 자식도 마녀로 간주되었다. 그 자식들은 때로는 고문에 의해 마녀로 조작되거나, 어떤 때에는 고문도 없이 그냥 화형 당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희생자들 가운데는 시비를 가릴 줄 모르는 유아들이 발견되는 것은 대체로 그 들의 모친이 마녀였기 때문이다. 피의자가 수사과정에서 밤중에 집에 있지 않았거나 행선지를 대지 못하는 경우 '마녀회의'에 참석한 근거가 되었다. 고문을 가하는데도 비명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경우 마녀의 징표가 되었다. 체포되면서 지나치게 놀라는 모습이 마녀의 징표로 여겨지는가 하면 지나치게 차분한 것도 마녀의 습성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마녀로 한 번 의심을 받게 되면 마녀로 만들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② 규문주의 소송절차
당시에는 이태리 법학과 캐논법을 통하여 유럽 여러 나라가 이른바 규문주의(糾問主義) 소송절차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소송절차에는 고문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마녀는 바로 이 고문의 소산이었으며 이 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규문주의 소송절차의 당연한 결과였다. 15∼6세기 로마법이 유럽 전역에 전파되기 전까지는 이른바 게르만법계에 속하는 이른바 형식적 증거법주의가 증거법상의 원칙이 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요증(要證)사실의 진실 여부는 이론상 또는 경험상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장방법 자체에 의해 결정되었다. 진실은 주장자 자신의 선서, 또는 이웃의 선서, 때로는 결투에 의해 제기되고 인정되었다. 피고인 자신도 마녀가 아니라는 선서, 이웃의 선서에 의해 형벌을 면할 수가 있었지만, 마녀인지 여부는 수족을 묶고 수중에 던져 보아 가라앉으면 결백한 것이 입증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 결백이 입증되었을 때에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15-16세기경 로마법이 전래되면서 이른바 논리증거주의가 채용되었다. 요증 사실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경험상 논리상 진실인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증거자료의 존재를 필요로 하였다. 1532년 제정되어 18세기말까지 독일 보통법이었던 카톨리나 형법의 증거원칙에 의하면 유죄의 증거로서 피고인의 자백 외에 2인의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위하더라도 법률에 정하는 정도의 정황증거가 있는 경우에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 허용되어 이것이 마녀의 양산에 별다른 통제가 될 수 없었다.
③ 고문
위와 같이 고문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한 요소로 등장한다. 마녀는 결국 고문의 소산이었다. 물론 희귀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어떤 소녀는 자신이 마녀임을 아버지에게 자백하고 아버지가 딸을 신고하여 마녀재판에 등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에서 마녀들은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럴 경우 위에서 본 마녀의 징표들을 들이밀며 마녀라는 사실을 시인할 것을 강요한다. 그 강요의 수단이 바로 고문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행해진 고문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써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건강한 남자조차 견디기 어려운 정도의 고문이 연약한 여성에게 가해질 때 심문관이 요구하는 내용의 진술을 자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터이다.
④ 형량과 집행
기독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을 당시에는 신에 대한 반역이나 모독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 중죄였다. 신의 적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란 있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마법의 유형에 따라 달리 취급하였지만 나중에는 마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火刑, 斬首, 絞首 등의 엄벌을 받았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핀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로버트 무쳄블래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3. 맺음말
죄를 저지른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단지 소문과 추측에 근거해 범인이라고 단정짓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탐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피고가 항변할 기회조차 묵살된다면 진실을 추적하는 탐정은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다. 중세 유럽을 휩쓴 무시무시한 마녀사냥의 실체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인간을 영원한 신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는 교회였고, 로마 교황청은 세계 교회의 중앙정부였다. 그러나 면죄부를 돈으로 팔고 사는 금전거래를 비롯해 성직자들의 각종 부패와 타락이 드러나자 12세기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개혁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기존의 교회 권위를 비판하고, 교황과 성직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거부했다. 개혁의 핵심은 누구보다 신도 자체가 중시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절대권력을 유지하던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자 교황청의 태도는 과격해졌다. 종교개혁자의 움직임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3세기부터 이단자 처벌이 화형으로 일반화됐고, 탐문 과정에서 잔인한 고문이 허락됐다. 초기 이단자 색출의 임무는 각지의 주교에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우스(1227-1241)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어느 곳에서도 이단자들을 퇴치하는데 전념할 수 있는 특별수사대를 조직한다. 신학논쟁에 필요한 충분한 학식,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인격, 그리고 이단 퇴치에 대한 강력한 종교적 열의의 3박자를 갖춘 도미니크 수도회가 여기에 발탁된다. 금욕과 청빈 생활이 철저한데다 신학 지식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이단 박멸의 열의에 불타는 조직이었다.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의 두 신학자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는 오랫동안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단자 색출에 힘썼다. 그런데 이단자는 단지 종교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전염병으로 가축이나 사람이 죽는 일, 흉년과 자연재해가 모두 이단자 때문이라 여겨졌다. 또 성(性)에 대한 불행한 내용, 즉 성교불능, 남근탈락, 유산, 불임 등 이 모두 이단자의 탓으로 돌려졌다. 이때 종교적 이단자는 악마와 간통하고 온갖 해괴한 일을 벌이는‘마녀’와 동일시 돼서 불려졌다(당시 이단자로 색출된 사람들 중 남성도 있었지만 여성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통칭해서 마녀라고 표현한다). 도미니크 신학자 두 명은 자신들의 경험을 ‘마녀의 망치’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오랫동안 마녀사냥 지침서로 활용됐다. '마녀의 망치'는 오로지 마법의 단죄만을 목적으로 쓰여졌다. 일단 마녀로 낙인이 찍히면 법정은 피고에게 최소한의 동정을 보일 필요가 없다.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포기된 존재다. 마녀에 대한 체포가 이뤄지는 과정은 너무나 단순하다. 누군가의 고발이 있으면 또는 세상의 소문’만으로 체포가 가능했다.
《參 考 文 獻》
1. 홍성표, 『서양 중세사회와 여성』, 느티나무, 1999.
2. Tierney,Brian, 『西洋 中世史 』, 집문당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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