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발췌: 김명섭]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탄생: '극동'의 부정과 '대동아'의 온존 (2005)

출처: 백영서 외, 《동아시아 지역 질서: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창비. 2005.
자료: 구글도서


※ 발췌(excerpts):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탄생: '극동'의 부정과 '대동아'의 온존 (김명섭)


p.265:

( ... ) 그러나 2차대전 이후의 전후질서는 평화체제가 아닌 냉전체제로 이어졌더. 2차대전은 종식되었지만 종료되지 못했다. 세계적 수준에서의 '이룰 수 없는 평화'와 '일어나 것 같지 않은 전쟁'이 공존하는 상황으로서의 냉전(Cold War)[주]3은 1989년까지 지속되었다. 냉전은 2차대전과 같은 뜨거운 전쟁(Hot War)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한다는 의미의 뜨거운 평화(Hot Peace)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평화(Cold Peace)에 비해 좀더 갈등적이었고, 뜨거운 전쟁에 비해 약간 더 평화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적 수준에서의 관찰이다. 세계적 수준에서의 냉전은 어디까지나 지역적 열전,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열전에 의해 담보되었다.

세계적 수준에서의 냉전의 특성은 '대립적 양축구조'였다. 그 동안의 많은 연구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축이 왜 대립하게 되었는가'라는 문제(냉전의 기원 문제)에 치중했다. 이에 비해 둘 사이의 관계가 대립적이든 상호의존적이든 '어떻게 두개의 축으로 압축되었는가'라는 문제는 간과되었다. 2차대전 이후의 세계질서가 양축구조였다는 것은 무엇보다 영국·프랑스·네럴란드 등과 같은 서유럽이 주요 행위자의 대열에서 탈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 이들은 2차대전의 승전국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주도성을 상실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이야말로 냉전시대 유럽인들의 뼈아픈 성찰의 화두였으며, 탈냉전시대의 유럽헌법을 낳은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첫째, 2차대전을 통해 유럽이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 발발 당시 전세계 인구의 ㅇㄱ 3분의 1을 지배했던 식민질서[주]4가 그 추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 ... ) 식민질서에 대한 국내적(식민모국의) 안티테제는 좌파정치세력이 주도했던 반제운동이었다. 그리고 국제적 안티테제는 미국과 소련이라는두 반제(反帝)적 제국(帝國)들이었다.[주]5 미국의 자신의 어머니였던 유럽제국에 대한 부정의 소산이었고, 소련의 자신의 전신인 러시아제국을 초월하고자 했다.

두 반제적 제국들간의 냉전과 마그마처럼 분출하고 있던 민족해방운동세력 사이에서 동아시아는 새롭게 탄생했다. 그것은 유럽 중심적 '극동' 개념을 탈피한 동아시아였지만 냉전에 의해 분절된 동아시아였[다.]  p. 266.

p. 271:

( ... ) 만방이 기념할 자취"라고 보았다.[주]17 이러한 러일전쟁에 대한 평가는 1893년(메이지 26년) 타루이 토오끼찌가 출간한 <대동아합방론>에 나타난 당시의 사조를 연상시킨다 타루이의 논지는 "아시아의 제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동맹군을 결성하고 백인 제국주의의 침략에 공동으로 방어하여 쇠퇴하는 동양의 기운을 만회하는 흥아(興亞)의 대업을 양성"[주]18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또오 히로부미에 대한 안중근의 거사는 배신당한 동양평화론에 대한 응징이었다. 동양을 이야기함으로써 일본은 중서관계를 동서관계로 대체했고, 동양의 대표임을 자임했다.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부르면서 동양에 속하는 하나의 나라로 상대화했다. 일본은 동양이라는 개념, 나아가 동아(東亞)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에서 통용될 자신들의 근대적 정체성을 창출해내고자 했다.[주]19 이것은 지역적 수준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일본·조선·중국을 주축으로 하는 '동아'의 개념은 점차 타이완·몽골·티베트·만주, 그리고 남양(南洋)으로 확장되었다. 일본은 '동아'의 개념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희석하고자 했지만 각각의 민족국가들을 수립하고자 하는 역사적 흐름과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의 세계질서를 논의하는 베르싸유회의에서 일본은 영국·프랑스·미국·이딸리아 등의 승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G5'의 하나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일본 내에서는 코노에 후미마로의 「영미 본위의 평화주의를 배격한다」(1918년)라는 글이 주목을 받았다. 1차대전 이후의 세계에서는 국제협조, 국제주의, 문화교류, 상호의존성의 추구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평화주의는 이러한 흐름을 함축하는 새로운 화두였다. 코노에 후미마로는 일찍이 '아시아보전론'을 내세웠고 동아동문서원의 모체인 동아동문회를 주도했던 코노에 아쯔마로의 아들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유학했던 코노에 아쯔마로는 러시아의 남진에 맞서서 아시아단결론을 주창했다. 1898년 동아회와 동문회가 합쳐진 동아동문회가 발족되었는데, 그 강령의 1조는 '지나'를 보존해야 할 것, 2조는 '지나' 및 조선의 개선을 조성할 것 등이었다. 그리고 동아동문회의 주의서(主意書)는 "형제들은 집안에서 서로 다투고 열국은 그 틈을 노리고 있으니, 시국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주]20

코노에 후미마로의 주장은 서양, 특히 영미적인 사고를 모방해서 유럽에서의 전쟁을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보는 대신,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국가와 현상타파을 도모하는 국가와의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주]21 현상유지국가는 이미 "거대한 자본과 풍부한 천연자원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평화주의'를 표방한 '경제적 제국주의'를 통해 세계적 표준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영토가 좁고 원료가 빈곤하고 인구도 많지 않아서 제조공업품의 시장으로서 빈약한" 일본이 영미 본위의 평화주의에 심취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이 '후진국들'과 함께 경제적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특히 베르싸유에서 거부당했던 "황인종에 대한 차별대우의 철폐"를 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코노에는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일본도 "자기생존의 필요상 전쟁 전의 독일처럼 현상타파적 행동을 취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주]22

1차대전 이후 평화체제의 모색과정에서 일본의 반(反)인종주의적 입장은 거부되었고, 일본대중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과 관련해서 패전국 독일이 누리고 있던 샨뚱 반도지역에서의 특권을 이양받고자 했던 일본의 야망이 베르싸유체제에 반영되지 못했던 점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영토적 측면 이외에도 일본인들은 국제연맹헌장 규약에 인종평등조항을 삽입하고자 했던 일본측의 제안이 거부된 것에 분노했다. 백호주의와 같은 인종차별적 정책을 시행하고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반대가 주효했다. ( ... ) 베르싸유에서 미결된 아시아의 질서는 1921년 11월에 시작되어 1922년 2월에 종결된 워싱턴회의에서 논의되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이딸리아·중국·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일본 9개국이 참가한 약 3개월에 걸친 회의 결과 해군 군비제한 조약, 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 태평양에 관한 4개국(미·영·불·일) 조약 등 7개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일동맹은 폐기되었고, 일본은 샨뚱성에대한 이권을 중국에 반환했다.[주]23

( ... ) 1903년 영국에서 <동양의 이상>, 그리고 1904년 미국에서 <일본의 각성>이라는 책을 출간했던 오까꾸라 텐신은 좀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동양의 이상>에는 이미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일본의 각성>에서는 "유럽의 영광이 아시아의 굴욕"이 되는 현실을 변혁하는 것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양자( ... )

p.276:

( ... ) 1940년 7월 22일 제2차 코노에 내각의 출번과 더불어 일본은 새로운 국가정책안을 승인했다. 1940년 7월 26일 승인된 이 정책안은 '동아신질서'에 관한 구상을 담도 있었다.[주]30

일본은 자국을 중심으로 세 개의 동심원적 지역권을 상정했는데, 첫 번째는 내역 혹은 내권이라고 분류되는 지역권으로서 일본과 조선(내선일체), 만주를 비롯한 연해주, 그리고 양쯔강 이남의 우한(武漢)과 상하이 등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두 번째는 소동아라고 분류되는 지역권으로서 중국과 시베리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등을 포괄하는 지역권이다. 세 번째가 대동아로서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 그리고 태평양 열도를 포괄하는 지역권이다. 일본은 소동아 건설을 위해 적어도 20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고, 이어서 영국과 그 동맹국들 간의 분쟁을 거쳐야만 대동아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다.[주]31

1941년 8월 루즈벨트와 처칠이 발표한 '대서양헌장'은 민족자결, 영토보전, 경제적 국제주의, 사회보장, 군비축소, 국제협조 등을 표방했다. 미국은 대서양헌장을 통해 유럽제국들이 2차대전 이후 또다시 베르싸유 체제하에서 되풀이했던 것과 같은 제국적 욕망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주]32 일본은 대서양에 맞서는 개념으로 대동아를 내세워 아시아 인민들을 동원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은 ( ... )

[주]40. ^Chronique d'une guerre oubliee: La guerre d'Indochine, 1945~1954^. 1er coffret: Saigon, perle de l'Empire, Cassettes Radio France. 로물로의 제안에 관해서는 Romulo Gladys Zehnphennig, ^The General Carlos P. Romulo: Defender of Freedom^, Minneapolis: T.S. Dension & Company, Inc. 1965, 98, 100면; Robert S. Ward, ^Asia for the Asiatics?: The Techniques of Japanese Occup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5, 205면; F.C. Jones, ^Japan's New Order in East Asia: Its Rise and Fall, 1937~45^, Issued under the auspices of 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498면.

p. 281:

( ... ) 2차대전 직후 베트남내전과 중국내전에서 보여준 미국의 태도는 1947년 마셜플랜과 트루먼독트린에서 표명된 미국의 단호한 태도에 비하면 확실히 미온적이었다.[주]45 이런 면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도 '초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미국을 초대한 데에는 미국이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후원자(한국의 이승만과 필리핀의 퀴리노), 유럽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동반자(에스빠냐와 싸우는 필리핀, 네덜란드와 싸우는 인도네시아, 프랑스와 싸우는 인도차이나, 영국과 싸우는 말레이시아·버마·인도), 서구적 근대의 전파자(일본)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기대가 있었다.[주]46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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