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위세에 짓눌린 좌파는 광야를 헤매는 생활을 해왔다. 더 이상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계속해서 옛 구호들을 외치고 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에 대한 최종적인 ‘불신임’이 확정되자마자 좌파는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되었고, 그 빈자리에 제3의 길the Third Way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정치 노선은 1997년 영국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노동당 토니 블레어Tony Blair 전임 수상의 정책과 정치 스타일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폐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 제3의 길은 창백하리만큼 허약한 대응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해악을 무마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서슬 퍼런 대처리즘Thatcherism에 그저 사람의 가면을 씌워놓은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그 동안 정치 강령으로서 제3의 길을 못마땅해하는 분위기는 널리 퍼져 있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견고하고 명료한 반박이 없었던 것처럼 제3의 길에 대해서도 딱 부러진 비판은 나오지 않았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3의 길이 고수하는 근본적 신념은 제1의 길인 신자유주의와 전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이 공유하는 신념이란, 경제성장의 촉진을 정부의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하며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시장의 지배를 관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정치인들은 그들 반대편의 보수파들과 다를 바 없이 거의 모든 문제마다 경제가 더 성장하는 길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가 느끼는 행복은 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 사람들은 경제성장이 만족을 줄 거라고 믿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만족을 주던 많은 것들이 경제성장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허황된 소비지상주의consumerism는 갈수록 심해지고, 자연환경은 악화되고 있다. 또 사회적 유대도 취약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품성마저 야금야금 병들고 있다. 하지만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는 말은 경제성장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모순이다. 제3의 길은 이 엄청난 모순에 깔려버린 희생자다.
제3의 길이 펼치는 정치를 보노라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고, 이 정치 노선을 따르는 정치인들은 실체보다 스타일을 앞세운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이들이 탈산업 시대의 사회운동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꽤나 석연치 않다. 이를테면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을 정치 프로그램에 하나 더 끼워 넣을 항목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 여론조사를 보고 그때그때 의제에 올렸다 내렸다 하는 식으로 대응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고 절실한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제3의 길이라는 정치는 이러한 사안들을 그저 지엽적인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책임은 좌파 지도층에게 있다. 전후 50년 동안 소비자본주의consumer capitalism가 지속적으로 팽창하면서 우리 사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다. 사회구조가 철저하게 변화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좌파 지도층은 좀 더 올바르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진작할 만한 새로운 대안을 개발해야 했지만, 이 임무에 참담하리만큼 실패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일지는 몰라도, 좌파는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 democrats이든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이든 일반 대중이 물질적 궁핍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미 그들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그걸 발판으로 활력을 얻는다. 그러고는 경제 사정이 악화될 때마다 자신들의 정당성이 입증됐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현 시스템을 비판할 명분에 다시 힘이 실린다. 어쩌면 좌파는 집단적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구미 세계에서 좌파의 ‘빈곤 모델deprivation model'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빈곤에 찌들기는커녕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게 현대 사회의 지배적 특징이다. 어떤 잣대로 따져보더라도 서유럽과 미국, 캐나다, 그리고 일본과 호주는 엄청나게 부유한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에 사는 시민들은 대부분 아쉬울 게 없다. 이 나라들의 평균 실질소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적어도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그들 대부분이 누리는 생활의 풍요는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꿈속에서나 그릴 수 있었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 중략 ...)
빈곤으로 굶주리기는커녕 풍요로움이 특징인 세상에서 좌파는 여전히 소득분배에 집착한 채 자본주의는 항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주장으로 일관한다. 이건 사실과 완전히 어긋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득분배상의 평등은 전보다 나아질 때도 있었고 나빠질 때도 있으며, 나라에 따라 악화되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개선된 곳도 있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과거 한때 빈곤에 허덕이며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생존의 경계선에서 계속 사투를 벌여야 하는 극빈층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빈곤이 남아 있다. 경제도 줄기차게 성장했고 오래도록 애써 왔지만 빈곤을 없애지는 못했다. 우리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빈곤을 척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좌파가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철학과 전략 전체를 최저 소득계층 10%의 생활상에서 찾아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는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기독교 자선단체의 윤리강령에 더 어울리는 철학이 아닌가.
빈곤층을 배려하는 관심이 제아무리 훌륭한 명분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이 가진 돈을 어떻게 써야 잘 쓸 것인지 궁리하느라 바쁜 사회에서는 그러한 관심이 사회변혁을 일으킬 정치적 원동력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좌파의 세계관은 여전히 결핍이 지배적 사회악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 모델을 전제로 삼고 있다. 물질적 생활수준에 대한 과도한 문제의식은 역사적으로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대규모 빈곤에서 비롯된 것인데, 지난 50년간의 경제성장으로 말미암아 그 타당성을 잃어버렸다. 좌파의 사회 모델은 극적으로 낡아버렸고 대다수의 일반인들의 생활상에서 완전히 괴리되어버렸다.
하지만 남반구 개발도상국가의 빈곤층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경제성장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유형의 성장이지 정실 관계로 사치를 누리는 자본가들을 살찌우고 탐욕스러운 금융족벌들의 권세를 키워주는 그런 유형의 성장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좌파는 남북문제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어서버렸다. 그들은 세계화와 다국적 기업의 해악을 겨냥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그사이 자국 내 사회변혁에 대한 희망을 사실상 내버렸을 뿐 아니라, 국내 정치공간을 비워둠에 따라 우파에게 그 빈자리를 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반세계화anti-globalisation’ 운동이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나아가 국제적인 경제통합 과정을 지연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저항 운동가들에게는 정치적 변혁을 위한 일관된 전략이 없다. 사실 이들은 서로 합의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반세계화의 기치를 내건 좌파가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소비자본주의와 그 위에 발 딛고 있는 권력은, 먼저 국내에서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절대로 국제무대에서 변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좌파는 자기 나라로 돌아와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좌파 진영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통적인 ‘빈곤 모델’이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허덕이고 있고, 빈부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으며, 막대한 수의 빈곤층이 세계화의 혜택에서 배제돼가고 있다. 또 노동시장은 만성적인 실업과 함께 착취가 심화되고 있으며, 고용도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담론에서 주요 모순은 지금도 역시 생산 영역에 존재하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며, 그에 따른 적절한 조직적 대응은 노동조합주의라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 이야기가 묘사하는 세상은 이렇다. 낭비와 과소비가 넘쳐나고 있으며, 성장과 개발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지상주의가 기존의 공동체적 가치를 몰아내고, 도처에 만연하는 마케팅의 상술이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담론에서 주요 모순을 구성하는 고리의 한쪽에는 문화와 정치를 좌우하는 기업 세력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율성, 그리고 자연의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보호해야 한다는 요구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조직적 대응은 기업의 정치적·문화적 세력을 견제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 두 가지 담론은 모두 좌파 진영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잘해봐야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주장이고, 잘못되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논리가 되고 만다. 하나는 물질적 빈곤을 강조하는데,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성장과 소비가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이 양자를 조화시키는 데 실패함에 따라 좌파 진영은 정치적 혼란으로 치달았다. 현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계급 유권자들을 붙잡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이와 동시에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그리고 인권과 세계 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진보적 중산층 유권자들을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확보하려고 다가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파 정당들은 두 집단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빈곤 모델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품고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야금야금 고갈시킨다. 왜냐하면 빈곤 모델에 붙들려 있는 한 신자유주의의 근본 목적에 동참하는 길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환경주의environmentalism가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소비자본주의에 맞서는 가장 진지한 도전 세력으로 성장했음에도 좌파가 이들과 연대하는 것을 빈곤 모델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쪽은 빨리 좀 성장하자고 보채고, 다른 한쪽은 좀 천천히 성장하자고 소리치는 형국이다. 이처럼 빈곤 모델에 집착하는 좌파와 풍요의 위험을 강조하는 환경운동가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행복주의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 반드시 인정해야 할 사실은, 자본주의는 풍요의 단계로 들어섰으며 풍요로운 생활의 저변도 폭넓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유디머니즘은 보통 사람들의 행복이 정말 어떠한 것들에 달려있는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조건은 과연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인지 눈여겨볼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물질적인 면에서 환상적인 진보를 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 무대도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본주의가 취약한 상태라는 점이다. 왜? 대다수 사람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부를 누리게 된 지금, 그냥 자본주의적 생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쳇바퀴 도는 생활을 그만두고, 광고도 무시하고, 최신식 전자 장치라든가 별장, 호화 승용차, 해외 휴가, 아무 의미 없는 쇼핑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마음먹고 살면 된다. 그런 삶을 사는 데 바리케이드를 칠 일도 없고, 빈곤에 찌들 정도의 고통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돈보다 개인적인 만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그러한 새 삶을 촉진하려면 무엇보다 정치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그 전략을 ‘축소이행의 정치political downshifting’라고 부른다.
오늘날 강박적 욕구에 이끌려 소비사회consumer society에 참여하는 이유는 물질적 궁핍이나 정치적 강압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면 더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믿음 때문이다. 오늘날의 보통 사람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사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시장의 유혹에 넘어가 화려해 보이는 새장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갇히고 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문이 열려 있다는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 문이 부자들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줄 정치가 필요하다. 즉 사람들이 해방을 성취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부와 지위보다 공동체와 인간관계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정치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지금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재물의 삶보다는 값진 삶을 추구하도록 고무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아울러 탈성장 사회post-growth society가 지향하는 이념과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틀을 개략적으로 묘사한다.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한 정치는 국가 전복이나 자본의 파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거창한 구호 없이 그냥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책에서 설명하는 탈성장 사회는 성장의 망상체계에 따라 유지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를 그 근저에서부터 거부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만약 역사가 끝났다면, 역사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탈성장 사회는 세계화된 소비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역사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행복의 새 정치는 권력구조의 변화를 초래할 뿐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과 인간관계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줄 것이다. 성장을 넘어서려고 하는 탈성장 정치는 시장이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박탈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소비자가 되려 하는 의욕이다. 또한 자본이 행사하는 정치권력의 많은 부분도 박탈해버릴 것이다. (...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