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31일 목요일

서문

클라이브 해밀턴



지난 20년 동안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위세에 짓눌린 좌파는 광야를 헤매는 생활을 해왔다. 더 이상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계속해서 옛 구호들을 외치고 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에 대한 최종적인 ‘불신임’이 확정되자마자 좌파는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되었고, 그 빈자리에 제3의 길the Third Way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정치 노선은 1997년 영국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노동당 토니 블레어Tony Blair 전임 수상의 정책과 정치 스타일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폐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 제3의 길은 창백하리만큼 허약한 대응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해악을 무마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서슬 퍼런 대처리즘Thatcherism에 그저 사람의 가면을 씌워놓은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그 동안 정치 강령으로서 제3의 길을 못마땅해하는 분위기는 널리 퍼져 있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견고하고 명료한 반박이 없었던 것처럼 제3의 길에 대해서도 딱 부러진 비판은 나오지 않았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3의 길이 고수하는 근본적 신념은 제1의 길인 신자유주의와 전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이 공유하는 신념이란, 경제성장의 촉진을 정부의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하며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시장의 지배를 관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정치인들은 그들 반대편의 보수파들과 다를 바 없이 거의 모든 문제마다 경제가 더 성장하는 길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가 느끼는 행복은 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 사람들은 경제성장이 만족을 줄 거라고 믿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만족을 주던 많은 것들이 경제성장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허황된 소비지상주의consumerism는 갈수록 심해지고, 자연환경은 악화되고 있다. 또 사회적 유대도 취약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품성마저 야금야금 병들고 있다. 하지만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는 말은 경제성장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모순이다. 제3의 길은 이 엄청난 모순에 깔려버린 희생자다.

제3의 길이 펼치는 정치를 보노라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고, 이 정치 노선을 따르는 정치인들은 실체보다 스타일을 앞세운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이들이 탈산업 시대의 사회운동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꽤나 석연치 않다. 이를테면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을 정치 프로그램에 하나 더 끼워 넣을 항목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 여론조사를 보고 그때그때 의제에 올렸다 내렸다 하는 식으로 대응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고 절실한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제3의 길이라는 정치는 이러한 사안들을 그저 지엽적인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책임은 좌파 지도층에게 있다. 전후 50년 동안 소비자본주의consumer capitalism가 지속적으로 팽창하면서 우리 사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다. 사회구조가 철저하게 변화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좌파 지도층은 좀 더 올바르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진작할 만한 새로운 대안을 개발해야 했지만, 이 임무에 참담하리만큼 실패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일지는 몰라도, 좌파는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 democrats이든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이든 일반 대중이 물질적 궁핍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미 그들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그걸 발판으로 활력을 얻는다. 그러고는 경제 사정이 악화될 때마다 자신들의 정당성이 입증됐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현 시스템을 비판할 명분에 다시 힘이 실린다. 어쩌면 좌파는 집단적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구미 세계에서 좌파의 ‘빈곤 모델deprivation model'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빈곤에 찌들기는커녕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게 현대 사회의 지배적 특징이다. 어떤 잣대로 따져보더라도 서유럽과 미국, 캐나다, 그리고 일본과 호주는 엄청나게 부유한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에 사는 시민들은 대부분 아쉬울 게 없다. 이 나라들의 평균 실질소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적어도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그들 대부분이 누리는 생활의 풍요는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꿈속에서나 그릴 수 있었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 중략 ...)

빈곤으로 굶주리기는커녕 풍요로움이 특징인 세상에서 좌파는 여전히 소득분배에 집착한 채 자본주의는 항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주장으로 일관한다. 이건 사실과 완전히 어긋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득분배상의 평등은 전보다 나아질 때도 있었고 나빠질 때도 있으며, 나라에 따라 악화되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개선된 곳도 있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과거 한때 빈곤에 허덕이며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생존의 경계선에서 계속 사투를 벌여야 하는 극빈층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빈곤이 남아 있다. 경제도 줄기차게 성장했고 오래도록 애써 왔지만 빈곤을 없애지는 못했다. 우리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빈곤을 척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좌파가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철학과 전략 전체를 최저 소득계층 10%의 생활상에서 찾아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는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기독교 자선단체의 윤리강령에 더 어울리는 철학이 아닌가.

빈곤층을 배려하는 관심이 제아무리 훌륭한 명분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이 가진 돈을 어떻게 써야 잘 쓸 것인지 궁리하느라 바쁜 사회에서는 그러한 관심이 사회변혁을 일으킬 정치적 원동력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좌파의 세계관은 여전히 결핍이 지배적 사회악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 모델을 전제로 삼고 있다. 물질적 생활수준에 대한 과도한 문제의식은 역사적으로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대규모 빈곤에서 비롯된 것인데, 지난 50년간의 경제성장으로 말미암아 그 타당성을 잃어버렸다. 좌파의 사회 모델은 극적으로 낡아버렸고 대다수의 일반인들의 생활상에서 완전히 괴리되어버렸다.

하지만 남반구 개발도상국가의 빈곤층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경제성장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유형의 성장이지 정실 관계로 사치를 누리는 자본가들을 살찌우고 탐욕스러운 금융족벌들의 권세를 키워주는 그런 유형의 성장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좌파는 남북문제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어서버렸다. 그들은 세계화와 다국적 기업의 해악을 겨냥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그사이 자국 내 사회변혁에 대한 희망을 사실상 내버렸을 뿐 아니라, 국내 정치공간을 비워둠에 따라 우파에게 그 빈자리를 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반세계화anti-globalisation’ 운동이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나아가 국제적인 경제통합 과정을 지연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저항 운동가들에게는 정치적 변혁을 위한 일관된 전략이 없다. 사실 이들은 서로 합의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반세계화의 기치를 내건 좌파가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소비자본주의와 그 위에 발 딛고 있는 권력은, 먼저 국내에서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절대로 국제무대에서 변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좌파는 자기 나라로 돌아와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좌파 진영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통적인 ‘빈곤 모델’이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허덕이고 있고, 빈부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으며, 막대한 수의 빈곤층이 세계화의 혜택에서 배제돼가고 있다. 또 노동시장은 만성적인 실업과 함께 착취가 심화되고 있으며, 고용도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담론에서 주요 모순은 지금도 역시 생산 영역에 존재하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며, 그에 따른 적절한 조직적 대응은 노동조합주의라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 이야기가 묘사하는 세상은 이렇다. 낭비와 과소비가 넘쳐나고 있으며, 성장과 개발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지상주의가 기존의 공동체적 가치를 몰아내고, 도처에 만연하는 마케팅의 상술이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담론에서 주요 모순을 구성하는 고리의 한쪽에는 문화와 정치를 좌우하는 기업 세력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율성, 그리고 자연의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보호해야 한다는 요구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조직적 대응은 기업의 정치적·문화적 세력을 견제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 두 가지 담론은 모두 좌파 진영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잘해봐야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주장이고, 잘못되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논리가 되고 만다. 하나는 물질적 빈곤을 강조하는데,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성장과 소비가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이 양자를 조화시키는 데 실패함에 따라 좌파 진영은 정치적 혼란으로 치달았다. 현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계급 유권자들을 붙잡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이와 동시에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그리고 인권과 세계 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진보적 중산층 유권자들을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확보하려고 다가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파 정당들은 두 집단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 중략 ...)

빈곤 모델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품고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야금야금 고갈시킨다. 왜냐하면 빈곤 모델에 붙들려 있는 한 신자유주의의 근본 목적에 동참하는 길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환경주의environmentalism가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소비자본주의에 맞서는 가장 진지한 도전 세력으로 성장했음에도 좌파가 이들과 연대하는 것을 빈곤 모델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쪽은 빨리 좀 성장하자고 보채고, 다른 한쪽은 좀 천천히 성장하자고 소리치는 형국이다. 이처럼 빈곤 모델에 집착하는 좌파와 풍요의 위험을 강조하는 환경운동가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행복주의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 반드시 인정해야 할 사실은, 자본주의는 풍요의 단계로 들어섰으며 풍요로운 생활의 저변도 폭넓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유디머니즘은 보통 사람들의 행복이 정말 어떠한 것들에 달려있는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조건은 과연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인지 눈여겨볼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물질적인 면에서 환상적인 진보를 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 무대도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본주의가 취약한 상태라는 점이다. 왜? 대다수 사람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부를 누리게 된 지금, 그냥 자본주의적 생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쳇바퀴 도는 생활을 그만두고, 광고도 무시하고, 최신식 전자 장치라든가 별장, 호화 승용차, 해외 휴가, 아무 의미 없는 쇼핑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마음먹고 살면 된다. 그런 삶을 사는 데 바리케이드를 칠 일도 없고, 빈곤에 찌들 정도의 고통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돈보다 개인적인 만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그러한 새 삶을 촉진하려면 무엇보다 정치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그 전략을 ‘축소이행의 정치political downshifting’라고 부른다.

오늘날 강박적 욕구에 이끌려 소비사회consumer society에 참여하는 이유는 물질적 궁핍이나 정치적 강압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면 더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믿음 때문이다. 오늘날의 보통 사람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사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시장의 유혹에 넘어가 화려해 보이는 새장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갇히고 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문이 열려 있다는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 문이 부자들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줄 정치가 필요하다. 즉 사람들이 해방을 성취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부와 지위보다 공동체와 인간관계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정치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지금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재물의 삶보다는 값진 삶을 추구하도록 고무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아울러 탈성장 사회post-growth society가 지향하는 이념과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틀을 개략적으로 묘사한다.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한 정치는 국가 전복이나 자본의 파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거창한 구호 없이 그냥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책에서 설명하는 탈성장 사회는 성장의 망상체계에 따라 유지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를 그 근저에서부터 거부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만약 역사가 끝났다면, 역사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탈성장 사회는 세계화된 소비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역사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행복의 새 정치는 권력구조의 변화를 초래할 뿐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과 인간관계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줄 것이다. 성장을 넘어서려고 하는 탈성장 정치는 시장이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박탈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소비자가 되려 하는 의욕이다. 또한 자본이 행사하는 정치권력의 많은 부분도 박탈해버릴 것이다. (... 생략 ...)

* * *

※ 다음 저작의 서문에서 일부를 발췌.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 성장 숭배: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 바오(한국어판 2011년), Allen & Unwin (영문 원저 2003년).

※ 주요 핵심어: 경제성장(economic growth), 제3의 길 (The Third Way),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빈곤모델 (deprivation model), 반세계화 (anti-globalisation), 환경주의 (environmentalism), 축소이행의 정치 (political downshifting), 탈성장 사회 (post-growth society)

[자료] 근대화 외삽론이 던지는 의미

자료: http://www.mediamob.co.kr/midas205/frmView.aspx?list=sum&id=25207&page=7
누리마당 | 2004-11-22 14:43

자료 속 다른 자료: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이해와 오해 (한림대 전상인 교수)

2011년 3월 30일 수요일

[자료] 12, 13세기 바러의 재편: 특히 시장(market)의 설치와 특권을 중심으로

자료: http://mahan.wonkwang.ac.kr/medsociety/jn/jn17/h17-05.hwp

지은이: 이순갑


발췌: 

본고에서는 우선 12,3세기에 일어났던 바러의 재편을 위한 전조를 경제적인 변화의 양상을 나타내는 주시장(weekly market)과 시장도시(market town)의 형성으로 파악하고, 그 원인을 기존의 연구성과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그러한 고찰을 바탕으로 바러의 재편은 어떻게 나타나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보고자 한다. 요컨대 본고에서는 중세도시라는 틀 속에서 시장의 설치와 확대가 바러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또한 그 의의는 무엇이었고, 그 전형성은 무엇이었나를 살피고자 한다. (...)

11세기 이후부터 이같이 농업생산력이 증대해가고 개간지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잉여생산물이 급증하면서 교환과 판매가 발달해갔고, 이러한 발달의 추세속에서 기존의 주시장(weekly market)이 정비되어 갔다. 주시장은 시장의 최초의 형태로서 일요일 예배가 끝난 후 교회의 주변에서 열렸다. 주시장의 판매물품에는 가축, 곡물, 소맥분등의 농산물과 빵, 맥주등의 음식물, 모직, 석탄, 소금, 생선, 각종 수공제품등 일용품이 있었다. 따라서 주시장들은 행상인들의 상품을 포함하여 농산물, 음식물, 수공제품, 일용품의 교환과 판매를 위한 출구였다. 그 상품은 주로 장원의 잉여물이 대부분이었고, 그 규모도 적었다. 잉여생산물의 교환과 판매가 활발해지는 추세 속에서 주시장의 단계를 넘어 보다 큰 곡물시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개간지의 확대, 주시장의 정비, 곡물시장의 등장 등과 같은 농촌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영국에서는 화폐경제가 진전되어갔다. 화폐의 사회적 유통에 따라서 봉건영주들은 화폐 보유 욕구를 증대시켰으며 톤턴 지역에서 지대를 1에이커당 6펜스로 유지하였던 것처럼 장원에서 화폐지대를 관리해나갔다.

이민족 침입의 종식 후에 봉건경제의 기반이 점차 정착되어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장원의 양적 팽창만으로는 화폐경제의 발달추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12세기 영국 전역에서 장원의 양적 팽창을 넘어서 장원의 질적 변화가 이루어져가고 있었다. 밀러(E.Miller)에 의하면 1167년 허포드의 영지와 1187-8년 런던의 영지는 직접 경영되었으나 그 밖의 곳에는 장원의 차지(farming)가 일반적이거나 우세한 경향을 나타낸다. 1182년 요크 주교직의 많은 세입원은 깎은 양모 판매 이외에 차지 경영이었다. 장원에 대한 차지는 1167년 베스, 1170년 치체스터, 1184년 체스터, 1192년 엑시터의 주교직을 유지하는 주요한 세입원이었다. 유사하게 모든 일리 장원은 하티스트(Hartest)와 리텐던(Rettendon)을 제외하고 1171년에 차지되었으며, 모든 링컨의 장원들은 1167년에, 윈체스터의 장원들은 1172년에 대부분 차지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12세기에 들어 차지 경영의 개념이 영국 전역의 장원에 점차 도입되고 있었고, 그러한 도입이 시장의 발전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장원 밖에서 뿐만 아니라 장원 내에서도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고자 시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비딕(Biddick)에 따르면 주시장 근처의 유리한 위치점이 농민들을 위한 시장선택을 증가시켰고, 지방 가격에 관한 그들의 지식에 공헌했으며, 운송비용을 절감하게 했다고 했다. 또한 소맥과 대맥, 대맥과 귀리의 혼합물, 귀리, 호밀, 완두, 강낭콩, 엿기름 제조용 보리와 밀가루는 케임브리지와 런던이 중심이 된 시장으로 판매를 위해 운송되었고, 동물들의 사료로 이용되는 완두, 강남콩, 귀리와 호밀은 각각 농촌지역의 주시장에까지 퍼져나갔다. 지방시장으로 가축시장도 열려 송아지, 어린 소, 황소, 암소 등의 등급별로 판매되었다.

농촌경제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장은 어떤 계기로 확대되었고, 도시에서 시장의 기능과 위상을 미치는 특허장은 무엇이며 어떤 권리를 나타내는 것인가는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헨리 1세는 특허장에서 뉴캐슬-온-타인(Newcastle-on-Tyne)에 수여한 특허장을 포함하여 시장을 여는 권리를 앨르닉(Alnwick)과 북부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과 남 스코틀랜드 지역까지 부여했다. 헨리 1세는 런던에 부여한 특허장을 옥스퍼드에도 그대로 수여하였다. 그리고 브레트일(Breteuil)의 특허장 양식을 모방하여 그 밖의 다른 도시들인 허포드(Hereford), 슐즈버리(Shrewsbury), 베드퍼드(Bedeford)와 다른 주들에 채택되어졌다. 브리스톨에 주어졌던 헨리2세의 특허장은 나중에 더블린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헨리 1세는 1103년에 관습에 따라 매주 토요일에 열려지는 맬링(Malling) 시장에 특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1121년 헨리는 르왕(Rouen)의 성 메리(Mary) 대수도원장에게 햄프셔에 있는 킹스 클레어(King’s Clere)의 토지를 하사하면서, 시장권도 함께 주었다. 헨리는 또 1127년 호머 헌드레드(Hormer Hundred)와 애빙던(Abingdon) 시장에 대한 애빙던 수도원장의 권리를 확정했다. 1129년에 헨리는 램시(Ramsey) 대 수도원장에게 장원에 부가하여 그의 클랙클로즈(Clackclose) 헌드레드의 절반과 다운햄(Downham)의 시장을 부여했다. 1136년에 스테펀은 몬터큐트(Montacute) 대 수도원에 몬테큐트 헌드레드와 통행세를 보유한 시장을 허가했다. 이같은 시장의 설치는 당시 지방 인구와 교역의 연계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고리였다. 따라서 당시 특허장에 의해 설립된 시장은 지방 봉건층에도 매력적인 요소였다고 할 것이다.

1141년 스테펀 시대에 우스터셔 세리프에게 주었던 특허장은 그 지역의 바러에 시장권의 수여와 함께 다른 권리도 보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허장에 기재되어 수여된 이런 시장권은 상인과 상품의 보호라든지 또는 통관세 등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었다.

1147-8년경 글로스터(Gloucester) 백작부인 메이블(Mable)과 그녀의 아들로서 어얼이었던 윌리엄은 솔즈버리(Salisbury)의 주교인 조스린(Jocelin)으로부터 셔본(Sherborne)의 헌드레드와 시장을 회수했다. 1147-8년 마틸다(Queen Matilda)와 스테펀(Stephen)은 템플기사단에 에식스에 있는 위덤(Witham)의 장원과 헌드레드의 절반을 수여하면서, 이전시대만큼 평화롭게 위덤(Witham)에서 시장이 열려야 한다고 명령했다. 월덤(Waltham) 헌드레드는 월덤 대수도원의 칙령을 받고 있었고, 1189년 장원과 헌드레드에 시장이 확정되었다. 1204년 존왕은 웰스(Welles)의 부주교에게 체더(Cheddar)와 액스브리지(Axbridge)의 장원들, 체더와 윈터스톡(Winterstoke)의 헌드레드, 액스브리지 자체의 시장권을 하사했다. 1197년과 1205년 사이에 베스(Bath)와 글로스턴버리(Glastonbury)의 주교는 알레산더 칸터로우(Alexander de Cantelou)에게 섬머셋(Somerset)에 있는 브러톤(Bruton)의 헌드레드와 시장을 확정한 브러톤 소수도원(Bruton Priory)의 특허장을 검사하게 했다. 시장의 설치로 바러와 헌드레드의 명확한 구분이 없어지고 그곳에서 거래를 보증하는 12명의 사람을 선발해야 했다. 지속적인 시장의 확대는 이웃 지역에도 경쟁적으로 시장도시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
 

[자료] Notes Critiques: Deux Livres sur les changes

자료: Percée

Connus d'abord d'un petit nombre de spécialistes, les traveaux de Raymond de Roover ont maintenant acquis une juste notoriété. Aussi le Centre de Recherches historiques de l'Ecole des Hautes Etudes a-t-il été bien inspiré en lui donnant un ouvrage sur ce thème capital: L'Evolution de la lettre de change(14e-18e siècles).

(...)

L'idée maîtresse à retenir c'est qu'aux yeux des cannonistes la spéculation sur les changes était admissible en raison de l'incertitude des gains; tandis que le prêt à intérêt était, par définition, illicite. En quoi consistait cette spéculation? Rappelons pour le lecteur non initié qu'elle supposait un aller et retour: le marchand banquier, qui achetait une lettre de change, faisait une avance d'argent, mais acquiérait ainsi un avoir sur une place étrangère; avec quoi son correspondant achetait une autre lettre permettant le retour des fonds à leur point de départ. Normalement, dans la plupart des cas, le marchand banquier gagnait à cette double opération. R. de Rouver en conclut--ce qui paraît incontestable--que l'intérêt se dissimulait dans le cours de change. Mais--nous l'avons dit--il subsistait une possibilité de perte; cet élément d'incertitude était, aux yeux des docteurs, ce qui différenciait le change du prêt à intérêt et, par conséquent, le légitimait.

(...)

ricorsa (...)
rechange

Dic: Confirmer qqn dans une certitude

2. [Suivi d'un compl. dir. désignant une pers. et d'un compl. précédé de dans, désignant un état, une attitude intellectuelle ou morale, un sentiment] Confirmer qqn dans une certitude, dans une croyance, une espérance, une impression.

  • Un rapport qui pût me confirmer dans mon erreur (Mme de Genlis, Les Chevaliers du Cygne, t. 3, 1795, p. 64). 
  • Pour que cette proximité de la capitale le confirmât dans sa solitude (Huysmans, À rebours, 1884, p. 11) : 
  • Mme Dunoyer, la patronne, connaît admirablement sa clientèle, et feint une indulgence excessive qui confirme chacun de ces messieurs dans la bonne opinion qu'il a de lui-même, de ses prudentes débauches, de son cynisme démodé. (Bernanos, Un Mauvais rêve, 1948, p. 945.)

2011년 3월 29일 화요일

[책] Fox (Edward W.) : L'autre France. L'histoire en perspective géographique

Fox (Edward W.) : L'autre France. L'histoire en perspective géographique. Paris, Flammarion, 1973, 229 p.

자료: Percée

Qu'un auteur américain signe un ouvrage sur la France, le fait mérite d'être mentioné, surtout lorsqu'il éclare d'un jour nouveau les structures sociales de notre pays. (...) le professeur Fox nous apparît comme l'un de ses observateurs les plus perspicaces. Qu'il ait été frappé par la complexité contradictoire de la vie politique française ne saurait surprendre, l'explication qu'il fournit n'en sort pas moins des sentiers battus par les politologues. (...)

2011년 3월 26일 토요일

[참고] 은대지와 봉토

자료 1:  유럽사회의 기틀: 봉건제도
지은이: 원광대학교 인문학부 윤병걸

(...) 봉건제도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의 은대지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일시적으로 점유했던 은대지 제도가 이제는 세습되는 봉토로 바뀌었다. (...)

자료 2: 중세 유럽의 귀족 작위
출처: 블로그, Myst's Laboratory of European Arms and Armours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봉건제도는 은대지 제도beneficium와 종사 제도comnitatus의 결합품입니다. 중세 초기의 혼란했던 시대에 , 프랑크 제국이 건설되고 나서 왕은 봉신들에게 병역 의무의 대가로 토지의 용익권을 주었습니다. 봉신들은 토지에서 나오게 되는 재산으로 자신과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왕이 소집할 경우 전쟁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토지는 왕의 것이었고,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토지는 봉신의 죽음과 함께 다시 왕에게로 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관습적으로 이러한 토지는 군사적으로 복무할 적당한 후계자가 있다면 충성 서약을 통해 상속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토지의 용익권을 부여하는 은대지의 개념에서 상속이 허가되는 종신은대지, 즉 봉토feodum로서 하사되기도 하였습니다. (...)

[cf] Jean Lhomme, de l'économie à l'histoire (1901-1987)

자료: Persée, http://www.persee.fr/web/revues/home/prescript/article/reco_0035-2764_1988_num_39_3_409079
출처: Revue économique, 1988. vol. 39-3.
지은이: Christian Morrisson

[cf] UN PROJET D’HISTOIRE SOCIALE UTILE CLASSES LABORIEUSES ET CLASSES DANGEREUSES

LE PARIS DANGEREUX DE LOUIS CHEVALIER : UN PROJET D’HISTOIRE SOCIALE UTILE
CLASSES LABORIEUSES ET CLASSES DANGEREUSES (1958)

자료: http://esopp.ehess.fr/docannexe.php?id=103
지은이: Paul-André Rosental et Isabelle Couzon

Dic: en vedette

I. A. − [Jusqu'au xixe s.]
1. Cavalier ou combattant à pied placé en sentinelle pour observer et signaler les mouvements de l'ennemi.{보초, 초병}

II. A.1. Loc. adv. ou adj. En vedette
a) [En parlant d'un texte](Qui se détache du texte auquel il se rattache) souvent sur une seule ligne et en gros caractères.

  • Les journaux américains se signalent par un goût prononcé du sensationnel. Scrupuleux quant à l'indication de leurs sources, beaucoup n'éprouvent aucun embarras à démentir le lendemain une nouvelle sensationnelle qu'ils publiaient la veille en vedette, sans prendre le temps de la confirmer (Civilis. écr., 1939, p. 40-3).
− Loc. verb. Mettre en vedette. Détacher de la sorte.
  • S'il écrivait à quelqu'un de ces messieurs [des fournisseurs] (...) il observait les formules les plus polies, mettait Monsieur en vedette (Balzac, Employés, 1837, p. 112). 
Être (mis) en vedette. Être ainsi détaché. P. ext. Signaler à l'attention du lecteur par l'emploi de certains signes ou caractères.
  • On nomme: (...) italique, le caractère penché utilisé pour la composition de certaines parties (préface, par exemple) ou pour mettre en vedette (souligner) des mots, des phrases ou des textes (Gouriou, Mémento typogr., 1961, p. 5).
b) [En parlant d'un inanimé concr. ou d'une pers.] Dans un lieu ou dans une situation qui attire l'attention, bien en vue.
  • Mes yeux s'arrêtèrent sur une lettre placée en vedette sur le marbre de la cheminée (...) et je reconnus l'écriture de Cécile (Feuillet, Journal femme, 1878, p. 312).
c) SPECTACLES. Mettre en vedette. Mettre le nom d'un acteur en tête d'une affiche, d'un générique, à titre d'acteur plus important que les autres.
  • Le renom des acteurs mis en vedette contribuant à la réussite commerciale du film, il arrive qu'un acteur ne soit pas choisi pour un rôle donné mais bien pour qu'un rôle soit confectionné à son usage (Cohen-Séat, Vocab. filmologie, 1946, p. 211). 
Être en vedette; avoir, occuper, tenir la vedette. Avoir son nom ainsi affiché.

Dic: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개혁과 쇄신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그뒤 교회의 현대세계에 대한 적응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0-1965.12)의 정신을 대변해주는 말이 되었다.

.... 가톨릭 용어 해설, http://imsine.hihome.com/idioms/ca_id08aa.htm

2011년 3월 25일 금요일

Dic: une mesure, à la mesure

B. − Au fig.
1. [Évoque un rapport, une proportion]
a) Élément de référence, critère d'appréciation : 
 ㅡ des qualités d'une personne, de ses capacités ou de ses moyens, 
 ㅡ ou de l'importance d'une chose.

  • Dire que l'homme est mesure des choses, c'est donc opposer à la diversité du monde l'ensemble ou le groupe des pouvoirs humains (Valéry, Variété III, 1936, p.242): 
  • L'homme devrait être la mesure de tout. En fait, il est un étranger dans le monde qu'il a créé. Il n'a pas su organiser ce monde pour lui, parce qu'il ne possédait pas une connaissance positive de sa propre nature. (Carrel, L'Homme, 1935, p.31.)
(...)

b) Dans des loc.
α) À la mesure + adj. (= à l'échelle (de)):
  • ... les hommes pourraient être heureux − d'un bonheur menacé, sans doute, pénétré d'inquiétudes et de souffrance − mais épreuves et joies, tout serait à la mesure humaine. Le malheur qui nous menace n'est plus à notre mesure. (Mauriac, Journal 3, 1940, p.212.)
− [Dans une loc. prép.]
À la (juste) mesure de.
  • L'idée pratique et modérée que les dirigeants et les mondains se font de la fonction mystique de l'artiste qu'ils s'imaginent fait à la mesure de leurs besoins (Faure, Hist. art, 1909, p.121). 
  • Choisir dans nos actes et nos réalisations, à la mesure de nos moyens, les entreprises qui peu à peu modèleront un pays plus homogène (Amén. terr., 1964, p.7):
  • ... quand vient le moment d'ouvrir les portes d'accès à certaines fonctions ou à certaines études (...) l'on se résigne de nouveau aux examens. Mais (...) que ce soit, au moins, après avoir ramené les examens, par leur nature, leur fréquence et leur ampleur, à la juste mesure de leur utilité. (Capelle, Éc. demain, 1966, p.157.)
..... http://www.cnrtl.fr/definition/mesure

À la mesure de : qui correspond, est proportionné à. (cf. échelle). 
  • Un adversaire à sa mesure. 
  • Une architecture à la mesure de l'homme. 
  • Sa réussite n'est pas à la mesure de ses ambitions. 
  • « que nous offre la technologie, sinon précisément un monde à notre mesure ? » (Finkielkraut). 
...... Nouveau Petit Robert

예문

1.
Le vécu intentionnel est très exactement et par définition à la mesure de ..

Le vécu intentionnel est très exactement et par définition à la mesure de ce que l’on peut en dire dans une description, ..

Le vécu intentionnel est très exactement et par définition à la mesure de ce que l’on peut en dire dans une description, pour la bonne raison qu’il ne la précède pas mais trouve en elle son expression  (c’est donc elle, en un sens, qui lui impose son « format », en entendant par là le format spécifique sous lequel il peut être décrit).

[자료] Psychologie - Un monde numérique à la mesure des narcissiques

자료: Le Devoir.com
14 décembre 2010
Fabien Deglise

* * *

Le paradoxe est savoureux. À une époque où le «moi», sous toutes ses formes, ne s'est jamais autant montré, pour contemplation, dans les univers numériques, l'Association américaine de psychiatrie se prépare à retirer le narcissisme des troubles de la personnalité de son Manuel diagnostique et statistique des troubles mentaux, livre de référence connu sous l'acronyme DSM chez les spécialistes de la santé mentale.

Étrange, le geste peut laisser croire qu'en se généralisant, ce goût prononcé pour l'étalage admiratif du «je», stimulé par les Facebook, Twitter mais aussi par les télé-réalités ou la démocratisation de la photo et de la vidéo numériques, serait finalement sur le point de perdre son statut de désordre affectif pour devenir une norme socialement acceptable. À moins que la mise à jour vise plutôt à mieux cerner un mal épidémique en profonde mutation dans la société depuis son entrée dans le manuel en 1980?

«Dans ces univers de création de sens, les gens sont invités quotidiennement à raconter leur histoire, et ils le font, dit l'anthropologue du Web Geoffroi Garon, président de la société de communication Pygmalion qui se spécialise dans les identités numériques. L'accès à cette technologie stimule effectivement un côté narcissique chez nous, mais nous ne sommes pas tous en train de devenir fous au point de normaliser ce qui était jusque-là considéré comme un trouble de la personnalité.»

Il y a quelques jours pourtant, le New York Times faisait la révélation avec un sourire en coin: les narcissiques vont bientôt être victimes de ce qu'ils détestent le plus, être ignorés, indiquait le quotidien en évoquant la nouvelle version du DSM, dont la cinquième édition est annoncée pour 2013. La définition de ce trouble de comportement, tout comme celle des personnalités borderline et histrionique, est fortement remise en question par le comité chargé de la mise à jour.

Pas question, toutefois, d'y voir la banalisation d'un comportement jusque-là exceptionnel, assure le psychologue Marc-Simon Drouin, professeur à l'Université du Québec à Montréal qui concède pourtant que le narcissisme, ou l'attention exclusive que l'on porte à soi-même, ne s'est jamais aussi bien porté dans notre société. «Et pas seulement par l'entremise des outils technologiques à notre portée, dit-il, mais aussi en raison de l'éclatement du tissu social» et des carences affectives qui viennent naturellement avec.

«Le DSM propose pour le moment des critères diagnostiques très limités pour identifier le trouble de personnalité narcissique qui, en 1980, était stéréotypé», résume le spécialiste des maladies de l'âme. À l'époque, les narcissiques flamboyants, dont Pierre Elliott Trudeau était un des fiers représentants, volaient en effet, dans ce livre de référence, la vedette à des formes plus nuancées de ce trouble et dont l'émergence a été favorisée par la modernité.

«La mise à jour du DSM devrait donc permettre des représentations plus fines de ce trouble, mais aussi de mieux comprendre la dynamique qui est à la source de ces comportements-là», ajoute M. Drouin. Comportements qu'un simple écran d'ordinateur, un téléphone intelligent, une tablette numérique branchée sur un réseau de communications sans fil permettent souvent de mettre en lumière.

Un trouble mis en réseau

«Ces technologies agissent comme un miroir», dit Geoffroi Garon. Miroir dans lequel les Narcisses 2.0 aiment désormais se regarder pour se trouver beaux. «Dans les nouveaux espaces de communication, on expose notre personnalité en construisant notre identité numérique, mais on prend aussi conscience de cette personnalité que l'on peut alors contempler chaque jour», dit-il. Comment? En envoyant ici une photo de nous en vacances, là en informant nos amis de notre positionnement géographique dans une ville, ou encore en se vantant d'être l'ami d'une chanteuse à la mode, en tenant un blogue sur nos passions, nos aventures, les repas que l'on mange, en envoyant plus de 100 micro-messages par jour... entre autres exemples.

Dans le bruit de la communication numérique, qui chaque jour produit des milliards de données, l'ego numérique en se surdimensionnant devient aussi une arme redoutable pour se faire entendre et surtout pour accéder à ce que la personne atteinte de trouble narcissique convoite le plus: la valorisation rapide dans une époque où le déficit de gratification s'est imposé au même rythme que l'individualisme et l'atomisation des rapports humains.

Cet égotisme n'est d'ailleurs pas toujours mauvais, croit M. Garon qui y voit là, pour une génération moins affectée par l'inhibition, une façon «de se faire connaître, de s'exposer pour avoir des contrats en montrant toutes les facettes de sa personnalité», dit-il. Avec parfois des risques de dérapages.

«Les moyens technologiques rendent l'attention immédiate, mais elle est aussi éphémère et pas très nourrissante», dit M. Drouin d'où la nécessité d'en redemander sur une base quotidienne même si cela peut à la longue faire apparaître de nouvelles pathologies, comme l'anxiété.

En Australie, par exemple, une styliste de renom expliquait récemment dans les pages d'Adelaide Now que la socialisation numérique, mais surtout le fait de vivre en permanence sous l'oeil d'un appareil photo transmettant des clichés à la pelle dans des comptes Facebook, était une source d'angoisse élevée pour les victimes de la mode, qui ont désormais très peur d'être photographiés dans la même robe rouge ou le même complet bleu que la veille. En résumé.

«Aux États-Unis, les jeunes angoissent aussi quand ils ne sont pas en ligne, parce qu'ils ont peur de manquer quelque chose», dit M. Garon. Et forcément, cela a plutôt tendance à rendre les psychologues lucides: «À l'avenir, on ne va pas manquer d'ouvrage», conclut Marc-Simon Drouin. Et ce, que le narcissisme dans sa forme descriptive actuelle soit retiré du DSM, ou pas.

psychologie, nouvelles technologies, réseau social, égoïsme

Dic: gros, gros sabots

■ gros(grosse):

B.Qui, par son volume ou ses dimensions, est supérieur à une chose ou à un être de même sorte, de même natureGros pain, gros sel, Gros grains
D.Qui dépasse son volume habituel.

■ gros sabots:
Expr. fam. Voir, entendre venir qqn avec ses gros sabots.
Deviner aisément les intentions, les projets grossiers ou sans finesse de quelqu'un.

  • C'est bon! Assez! Cela suffit! Je vous vois venir avec vos gros sabots, vos histoires de deux sous et de jupe écossaise qui se soulève sous les courants d'air (Courteline, Article 330, 1900, p. 283). 
  • Geneviève me prenait parfois par la tendresse: pauvre lourdaude que j'entendais venir de loin avec ses gros sabots! (Mauriac, Nœud vip., 1932, p. 144).
CF. Ne pas avoir, ne pas rester les deux pieds dans le même sabot. Être très actif, mener rapidement plusieurs tâches en même temps. V. pied.

■ un sabotD. −P. métaph., fam.

1. Mauvais bateau.
  • Il a fallu monter dans le sabot, quitter la France, et mettre la mer entre moi et M. Rodolphe (Sue, Myst. Paris, t. 8, 1843, p. 258). 
2. Outil, instrument inefficace, usé ou désuet.
  • Vos presses sont des sabots qui ne valent pas cent écus, et dont il faut faire du feu. − Des sabots?... s'écria le vieux Séchard, des sabots? (Balzac, Illus. perdues, 1837, p. 13). 
  • Hein! disait-il, en voilà, un sabot!... Et ça casse l'herbe, ça l'empoisonne. Ma parole! il y a trois moutons déjà qui en sont morts. Les paysans ricanaient, examinaient la faneuse comme une bête farce et méchante (Zola, Terre, 1887, p. 156).
− P. anal. Personne qui s'acquitte mal de sa tâche, peu douée pour quelque chose.
  • [Le vendeur Hutin] se faisait (...) une dizaine de francs par jour, en moyenne. Favier n'arrivait guère qu'à huit; et voilà que ce sabot lui enlevait les morceaux de la bouche, car il sortait de débiter une nouvelle robe (Zola, Bonh. dames, 1883, p. 483).
♦ Fam. Verbe (d'action) + comme un sabot. Faire très mal quelque chose. Jouer comme un sabot.
  • Il savait qu'au pistolet et à l'épée, le banquier tirait comme un sabot (Gyp, Raté, 1891, p. 260). 
  • Je suis rompu. J'ai dû écrire comme un sabot. Dès hier j'avais épuisé toute ma provision cérébrale (Alain-Fournier, Corresp. [avec Rivière], 1905, p. 88).
3. Mauvais violon.

CF. en sabots

[학습자료] Banking in the Middle Ages

자료: Banking in the Middle Ages
출처: The End of Europe's Middle Ages: A Tutorial ( 그 중, 경제편: Economy )

내 검색어: Bardi and Peruzzi

* * *

With the increased economic activity of the Middle Ages, there was a growing need for money exchange and the conversion of coins. Money changers were soon holding and transferring large sums of money and extending loans to merchants. As the demand increased, so did the number of services. Common financial activities came to include granting loans, investing, as well as most of the deposit, credit and transfer functions of a modern bank.
Massys, 1514
Van Eyck, 1434
A major obstacle to the growth of banks in the Middle Ages was the Church's prohibition of usury, the charging of interest on loans. As economic activity expanded, however, the papacy became one of the first to insist that interest should be paid on investments made at a risk. Because they were forbidden to hold land or engage in more "acceptable" sources of economic enterprise, money changers in the Middle Ages were typically Jews. After the shift in Church policy regarding usury, it became more acceptable to be a financier and attempts were made to expel Jews from their commercial role.
The international luxury trade was centered in Rome during the Middle Ages. By the end of the thirteenth century, Florentines, as papal treasurers and tax collectors, spurred Florence to become the banking centre of Europe. Large numbers of families invested capital in commercial and industrial developments. In the 1290's, the Bardi and Peruzzi families had established branches in England and were the main European bankers by the 1320's. By 1338, there were more than eighty banking houses in Florence with operations across Europe. The financial success of Florentine banking activities led others to break the monopoly. During the fifteenth century, municipal banks became established, including one at Barcelona in 1401 and one a few years later at Valencia. One of the longest and most stable banks was the Bank of Saint George in Genoa, established in 1407 by state creditors and run by a board of directors.
The greatest danger to Medieval banking was in granting loans to European monarchs to finance wars. The use of mercenary armies and field artillery increased the costs of mounting military operations. To finance these activities, rulers were often willing to repay loans at extremely high rates of interest sometimes as high as 45 to 60 percent. Yet if they were unable to repay the loans, they simply did not. Most of the bank failures of the late Middle Ages and Renaissance were the result of large loans to rulers who refused to pay their debts. The Bardi and Peruzzi banks suffered greatly when England's monarchs refused to pay for loans acquired to finance the Hundred Years' War.

2011년 3월 24일 목요일

Dic: Changer le fusil d'épaule

[1]
Changer qqc. ou qqn de + subst. (indiquant la nouvelle manière d'être de l'obj.).
Changer un objet de place. Déplacer un objet.
Changer qqn de poste. Placer sur un autre poste − quelqu'un :

  • Notre-Dame de Bétharram (...) est un des lieux d'excursion les plus connus des pèlerins qui vont y passer quelques heures, afin de changer leur piété de place. (Huysmans, Les Foules de Lourdes, 1906, p. 7.)
Changer le fusil d'épaule. Placer sur une autre épaule − le fusil.
Fig. Changer son fusil d'épaule. Adopter une autre manière d'agir, de penser.

...... http://www.cnrtl.fr/lexicographie/Changer

[2] Expression: « Changer son fusil d'épaule  »

ㅡ Signification: Changer d'opinion, ses projets... Adopter une autre manière d'agir, de penser...

ㅡ Origine: Cette expression est attestée depuis la fin du XIXe siècle.

C'est une métaphore militaire dans laquelle le soldat qui passe son fusil d'une épaule sur l'autre représente l'homme (ou la femme) qui change de projets, d'opinion, d'activités...
Chez le soldat, le changement dans la manière de porter le fusil sur son épaule est immédiatement observable, comme l'est celui constaté chez la personne à laquelle s'applique l'expression.

[자료] INTRA-ASIAN TRADE in 16th-17th centuries

자료: International Consortiums, Merchant Networks and Portuguese Trade with Asia in the Early Modern Period

지은이(By): Om Prakash, Delhi School of Economics, University of Delhi

* * *

INTRA-ASIAN TRADE in 16th-17th centuries

Throughout the sixteenth and the first half of the seventeenth century, trade between Portugal and Asia remained the raison d’etre of the Portuguese enterprise in the East.  But that should not lead us to lose sight of the fact that trade within Asia-or what the Portuguese termed ‘trade from India to India’-was also a very important component of the Portuguese commercial presence in Asia.  Indeed, beginning as early as the period of Afonso de Albuquerque (1509-15), the intra-Asian trade of the Portuguese was considerably larger in value and substantially more lucrative than the trade between Goa and Lisbon. It is another matter that, while a large part of the profit in the intercontinental trade went to the Portuguese Crown, the profit from the intra-Asian trade accrued overwhelmingly to private individuals.  Precise quantitative data are hard to come by but the available evidence would seem to establish the broad orders of magnitude.  A Dutch estimate pertaining to 1622 put the working capital invested annually by the Portuguese Crown and country traders in the intra-Asian trade at the enormously high figure of f.50 million.  But in all likelihood, this particular estimate was grossly inflated on purpose in order to obtain larger amounts of capital from the Netherlands.  That the value of the Portuguese intra-Asian trade around this time was nevertheless quite impressive is, however, borne out by the 1630 Bocarro estimate of the annual investment in this trade from Goa alone being 2.85 million xerafins (the equivalent of f.6.6 million)-about fifteen times the value of the Portuguese India Company merchandise exported to Lisbon that year.[20]

The Portuguese participation in intra-Asian trade was substantial during the sixteenth century as well.  Luis Filipe F.R. Thomaz has argued, for example, that even in respect of an item such as cloves, of the total amount bought by the Crown factors (which did not amount to more than 12.5 per cent of the estimated output in the Moluccas), less than a third (32 per cent) found its way to Lisbon, the rest being sold in places such as China, Burma, Indonesia, India and Persia.  As for profitability, Thomaz has pointed out that against an annual average of 33,000 cruzados earned by the Captain-Major together
with the captains of each of the naus of the returning fleet from Goa to Lisbon between 1570 and 1590, the average annual profit earned in the intra-Asian voyages around 1580 was five times as much.[21]

Some of the Portuguese intra-Asian trade fed the export of Moluccan spices to Lisbon: indeed these spices were procured overwhelmingly against Indian textiles. But the bulk of this trade was aimed simply at earning profit.  Quite early in the sixteenth century, mainly with the help of Tamil keling merchants settled at Malacca, the Portuguese managed to make their way into a complex intra-Asian trading network of goods and routes with Malacca as the centre-point.  The goods that figured in this network originated, apart from southeast Asia, in China, in India and, on a limited scale, in the Middle East.  The southeast Asian goods included cloves from the Moluccas, nutmeg and mace from Banda, and pepper from Sumatra and Sunda, besides items such as sandalwood from Timor, camphor from Borneo, gold from Sumatra, tin from Malaya and precious stones from Burma.  These goods were first collected at Malacca and then
re-exported to China, Japan, and to various ports in the Indonesian archipelago as well as those around the Bay of Bengal.  Some of the cargo was also sent on to the west coast of India, whence a part found its way to Persia and the Near East and another to Europe via the Cape route.

The principal item procured in China was porcelain, though silk, lacque, jewellery and copper coins were also obtained there.  Malacca served as the principal transit point for redistribution to the western India, Near East and Europe complex as well as to the archipelago and the Bay of Bengal complex.  After the founding of Macao in 1557, however, the transit role of Malacca for the archipelago was increasingly eroded and direct connections were established.  India, as noted earlier, mainly provided textiles which were used primarily to buy the Indonesian spices and drugs.  This practice was so
established and so extensive that in many of the treaties concluded between the Portuguese and the suppliers of spices the prices of the latter were specified in terms of Indian textiles, rather than in any currency.  As far as goods available in the Middle East were concerned, the Portuguese involvement was rather limited and confined to goods such as silk, carpets and worked leather, and base metals such as iron, copper, lead and mercury.

The voyages undertaken included both those on the high-seas circuits as well as those on the coastal ones.  From Tome Pires, we know the details of one of the coastal voyages from Malacca to the Moluccas.  A direct route via Brunei, which the Portuguese initiated around 1525, would have taken only forty days.  But the preferred route was a much longer one taking as many as eleven months to traverse.  The principal commodity carried on the outward trip was Indian textiles and the first stop was in eastern Java at ports such as Gresik and Panarukan where the better quality textiles were exchanged against caxas and sapecas, Chinese copper coins of small value.  The coins were employed to buy rice as well as low-quality cotton textiles at Bima which, in turn,
together with the remainder of the Indian textiles loaded at Malacca, were used to buy mace, nutmeg and cloves in Banda and the Moluccas respectively.  The hopping trip was extremely profitable and fully justified the much longer time taken.


Crown participation in intra-Asian trade

The extensive Portuguese network of intra-Asian trade grew basically along the lines defined by the pre-existing commercial system.  As it happened, the period of the Portuguese apprenticeship was shortened considerably by the advice and assistance provided by the keling merchants of Malacca.  In the wake of the Gujarati merchants’ increasing withdrawal from the city following its conquest in 1511, the Tamil keling merchants had emerged as the single most important group of Indian merchants operating from Malacca.  Amongst the Portuguese, the lead in the matter of getting into intra-Asian trade in a big way was taken by the Crown, though the period over which the Crown's involvement in this trade lasted was not very long.
(....)

Some collections: readings in Fernand Braudel

2011년 3월 23일 수요일

Dic: Enfermer le loup dans la bergerie.


Loc. proverbiale et fam.
Enfermer le loup dans la bergerie.

ㅡ ,,Mettre, laisser quelqu'un dans un lieu, dans un poste où il peut faire aisément beaucoup de mal`` (Ac. 1835-1932).
ㅡ Spéc. ,,Laisser, sans s'en douter, un amoureux auprès de celle qu'on essayait de soustraire à ses poursuites`` (DG).
ㅡ ,,Laisser fermer une plaie avant qu'il en soit temps, ou faire rentrer un mal qu'il fallait attirer au dehors`` (Ac. 1835, 1878).

...... http://www.cnrtl.fr/definition/bergerie




(...) There is a less familiar French idiom ^laisser entrer le loup dans la bergerie^ "to let the wolf into the sheepfold" 'to let something dangerous or evil into a place where one should be safe; to promote a misdeed' where the WOLF is linguistically connected to the frame HOUSE; CF. (53) below.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Dic: envahissant(e) B.2.

B.2. [En parlant de la végétation ou des eaux] Qui a tendance à se répandre dans ou sur un lieu.

  • Les colonies envahissantes des arbres (Taine, Notes Paris, 1867, p. 251). 
  • Un immense bas-fond, où les eaux envahissantes devaient rapidement s'accumuler (Verne, Enf. cap. Grant, t. 1, 1868 p. 208). 
  • Partout du blé, la mer de blé envahissante, débordante, couvrant la terre de son immensité verte (Zola, Terre, 1887, p. 201).
− P. anal., littér. [En parlant d'une perception visuelle]
  • Les roseurs du couchant et, montant du lit du Gardon, derrière nous, l'obscurité envahissante (Gide, Si le grain, 1924, p. 371). 
  • L'aube pointa, (...) une demi-pâleur envahissante, sur cette immensité plate, venteuse et désolée (Van der Meersch, Invas. 14, 1935, p. 80).
♦ Au fig.
  • Longtemps après qu'il était devenu presque aveugle, elle mettait encore en doute, ainsi que beaucoup d'autres, cette nuit envahissante (Gide, Si le grain, 1924 p. 399).

Dic: engloutir (qq exem.)

1. Avaler avec avidité par excès de gourmandise.
2. Au fig. Consommer, dépenser pour en jouir, avec une rapidité excessive (une somme d'argent, etc.). Engloutir de l'argent, un héritage, sa fortune :

  • Il [Saccard] vivait sur la dette, parmi un peuple de créanciers qui engloutissaient au jour le jour les bénéfices scandaleux qu'il réalisait dans certaines affaires. (Zola, La Curée, 1872, p. 463.)
− Emploi pronom. à sens passif.
  • Que de fortunes sont venues s'engloutir à la bourse (Boyard, Bourse et spécul., 1853, p. 399). 
  • Il [Eugène] s'engageait à se marier et à délaisser le « panier fleuri » où, pendant les dernières années du père, tout l'argent d'Eugène s'engloutissait (Aragon, Beaux quart., 1936, p. 14).
B.− P. anal. [Le suj. désigne une chose] Faire disparaître totalement et de façon soudaineL'océan, la forêt, la neige engloutit qqc. ou qqn.
  • Bien plus redoutable que le glacier, est la mobile avalanche qui peut, en quelques secondes, engloutir tout un village (Michelet, Chemins Europe, 1874, p. 395). 
  • De grands nuages voyageurs, par intervalles, engloutissaient puis dégageaient le croissant de lune (Ambrière, Gdes vac., 1946, p. 361).
♦ Emploi pronom. à sens passif. Disparaître, sombrer. S'engloutir dans un abîme, une fosse, un gouffre.
  • Soudain le toit tout entier s'engloutit entre les murs, et un volcan de flammes jaillit jusqu'au ciel (Maupass., Contes et nouv., t. 2, Horla, 1886, p. 1123). 
  • Les vols, en accents circonflexes, des mouettes gris perle, montaient s'engloutir dans ces ténèbres blafardes (Hamp., Marée, 1908, p. 9).

2011년 3월 21일 월요일

[참고] piastre (piaster)



A 100 piastre note from French Indochina, circa 1954.
French Indochina Piastre 1885
The word piastre or piaster originates from the Italian for 'thin metal plate'. The name was applied to Spanish and Latin American pieces of eight, or pesos, by Venetian traders in the Levant in the 16th century.
These pesos, minted continually for centuries, were readily accepted by traders in many parts of the world. After the countries of Latin America had gained independence, pesos of Mexico began flowing in through the trade routes, and became prolific in the Far East, taking the place of the Spanish pieces of eight which had been introduced by the Spanish at Manila, and by the Portuguese at Malacca. When the French colonised Indochina, they began issuing the new piastre de commerce, which was equal in value to the familiar Spanish and Mexican Pesos.
In the Ottoman Empire, successive currency reforms had reduced the value of the Ottoman piastre by the late 19th century so as to be worth about two pence (2d) sterling. Hence the name piastre referred to two distinct kinds of coins in two distinct parts of the world, both of which had descended from the Spanish pieces of eight.
Because of the debased values of the piastres in the Middle East, these piastres became subsidiary units for the TurkishCypriot, and Egyptian pounds. Meanwhile, in Indo-China, the piastre continued into the 1950s and was subsequently renamed the riel, the kip, and the dong in CambodiaLaos, and Vietnam respectively.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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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As a main unit

[edit]As a sub-unit

[edit]Informal usage

  • Early private bank currency issues in French-speaking regions of Canada were denominated in piastres. The term is still unofficially used in QuebecAcadian andFranco-Ontarian slang as a reference to the Canadian dollar (the official French term for the modern Canadian dollar is dollar). When used colloquially in this way, the term is often pronounced and spelled "piasse" (pl. "piasses").
  • Piastre was also the original French word for the United States dollar, used for example in the French text of the Louisiana Purchase and that usage is still common in Cajun French. Modern French uses dollar for this unit of currency as well. The term is still used as slang for US dollars in the French-speaking Caribbean islands, most notably Haiti.
  • The piastre is still used in Mauritius when bidding in auction sales, similarly to the way that guineas are used at racehorse auctions. It is equivalent to 2 rupees.[citation needed]
  • The term ""piastre"" is used in the game Resort World on Facebook. It is a currency earned by players to use towards buildings and upgrades in the game.

[edit]See also

Dic: banyan, banyan merchant

자료 1: http://en.wikipedia.org/wiki/Banyan

A banyan (also banian) is a fig[무화과 나무] that starts its life as an epiphyte when its seeds germinate in the cracks and crevices on a host tree (or on structures like buildings and bridges). "Banyan" often refers specifically to the Indian Banyan or Ficus benghalensis, the National tree of India,[1]

Etymology

The name was originally given to F. benghalensis and comes from India where early travellers observed that the shade of the tree was frequented by banias or Indian traders.[7]
In the Gujarati language, banya means "grocer/merchant," not "tree." The Portuguese picked up the word to refer specifically to Hindu merchants and passed it along to the English as early as 1599 with the same meaning. By 1634, English writers began to tell of the banyan tree, a tree under which Hindu merchants would conduct their business. The tree provided a shaded place for a village meeting or for merchants to sell their goods. Eventually "banyan" became the name of the tree itself.

자료 2: http://en.wikipedia.org/wiki/Banyan_merchants

Vaishya, (vi- shia) also known as Vaisya, Vanika or Vysyas, is one of the four varnas (social order) of Hinduism. According to Vedic tradition, this order primarily comprises merchants, cattle-herders and artisans.[1][2] In Hindu beliefs, the duties of a Vaisya, as described by Hindu God Krishna, are krsi (growing food grains),goraksha (cow protection), vanijyam (trade), vaisya karma (work) and svabhavajam (born of his own nature[???]). The Vaisyas eventually became land-owners, money-lenders and influential traders and are often credited for the evolution of capitalist ideologies in India.[3]
The Vaisyas, along with the Kshatriyas, claim to be of the 'twice born' (dvija) castes of the classical theory.[4] Historically, Vaisyas have played a much larger role in Indian affairs apart from trade and commerce. Indian traders were widely credited for the spread of Indian culture to regions as far as southeast Asia.[5]

The Vaisya community consist of several Jātis, notably — the Agarwals, the Varshneys, the Khandelwals, the Mathurs, the Oswals, Aroras, Rastogis, Lohanas and theMaheshwaris of the north; the Arya Vysyas of the south; and the Ambanis, Sarabhais, Beesa Neema, Dasa Neema, Dasore, Parekhs and Patidars of the west. Some jātis are of mixed heritage. For example, according to legend, the Agrawals trace their origin to the Kshatriya Sun Dynasty who later adopted Vaisya tradition.[6][7] Khandelwals and Barnwals are similarly from Kshatriya background and their adoption of Vaishya Dharma is of relatively recent origins, probably no more than a thousand years.

Vaishyas in most of the country come under the forward castes. In Bihar and Jharkhand, Baniya come under OBCs because of the economic situation there.
[edit]See also
Varna (Hinduism)
Agarwal
Tarkhan
Bengali Banik
Patel
Royal Vaisya in Kerala